건달의 제국 79화
제11장 코스모스 질 무렵에(5)
이제 서둘러 전장을 이탈해야만 했다.
원서는 저격총을 해체하여 바이올린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오래된 습관에 따라 재빨리 손을 움직이면서, 원서는 작전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어젯밤.
“……장태성을 사살하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까?”
“그렇다.”
이시백이 자신을 응접실로 불러들였다.
원서가 방 안에 들어오고서 이시백은 한 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단지 책상에 흩어진 서류를 내려다보면서 사무적인 어조를 이어나갔다.
“리을령 소좌와 자리한 곳에서 나 혼자서 저격을 맞는다. 만일 내가 없었더라면 리을령이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장태성은 그 희생양이다.”
“동료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굳이 장태성을 말살할 이유가 있습니까?”
“입막음이다.”
극도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이시백의 입에서 나왔다.
원서는 자기도 모르게 등줄기가 긴장했다.
“입막음이라면.”
“말 그대로다. 작전의 진실이 리을령 소좌에게 흘러가면 나는 곤란한 입장에 처한다. 신뢰를 얻겠다고 자작극을 연출한 셈이니. 장태성은 분명히 이번 사건을 가지고 광수대에 보고하겠지. 그런 사태만은 결단코 막아야 한다.”
“…….”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원서는 의문을 제기했다.
대담하지만 원서 입장에선 물어볼 수밖에 없는 질문을.
“단장님, 저 또한 광수대에서 파견한 프락치입니다. 차수현 팀장한테 작전의 실체를 보고할 가능성은 장태성이나 저나 똑같습니다. 왜 제가 아니라 장태성을 블랙리스트에 올리셨습니까?”
“신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용……?”
“그래. 본래 차수현 팀장은 프락치들을 파견한다고 말했을 때 자네에 관하여 이렇게 언급했다. 여차하면 몰래 처리해 버려도 상관없다고.”
그런 말까지 오갔는가.
원서는 얼굴이 굳어버렸다.
경찰에서 자신을 눈엣가시로, 잠재적인 트러블 메이커로 취급한다는 것쯤은 예전부터 잘 알았다.
생도 시절부터 교관들은 원서를 괜히 괴롭혔다. 얼른 떨어져 나가서 경찰이 되려는 꿈 따위는 포기해라 하고 압박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자신을 귀찮게 여길 줄은 몰랐다…….
원서는 피와 땀으로 실력을 입증했다. 괴롭힘과 따돌림을 이겨 내고 당당히 수석 졸업생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실력이 확실하면 그래도 인정해 주리라 믿으면서,
하지만 원서에게 돌아온 보답은, 문제아를 내보내듯 부산에서 평양으로 전출.
더군다나 언제 어디서든 처분해 버려도 상관없다는 취급이었다…….
“문제는 장태성의 입지다. 무척 이상하지.”
“예?”
“국회의원의 사생아인 자네를 경찰들이 버거워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장태성까지 내게로 보낸 것이냐. 자네보다는 못할지라도 장태성은 보아하니 경찰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했더군. 충분히 엘리트로 불릴 만한 인재이지 않은가.”
“그렇습니다만…….”
이시백이 서류철을 뒤적이며 덤덤히 말해 나갔다.
“자네는 문제를 갖고 있다지만 장태성에겐 아무런 결격사유가 없다. 그런데도 기껏해야 조금 잘나가는 소규모 용병단인 내게 투입했다. 인력 낭비에도 정도가 있어. 차수현 팀장이 정신이 나갔을까? 산수 계산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지.”
이시백이 고개를 들어서 원서를 바라보았다.
또 그 눈초리였다. 무정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안타까워하는 눈동자. 후회, 상념, 어쩌면 자조까지 섞인 시선과 마주할 때마다 원서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단장님이 자신을 저렇게 다정한 눈길로 쳐다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답은 하나다. 차수현 팀장은 우리 용병단에 장태성을 파견한 게 아니야. 원서, 바로 자네를 관리하고 감독하기 위해서 보낸 것이다.”
“…….”
전부 알아챘구나.
백산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도 안 되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이시백은 자신들의 정체와 관계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단순히 장태성이 차석 졸업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원서는 긍정하거나 부정할 여력조차 없었다.
“광수대가 자유롭게 활개 치려면 정치가들의 후원이 불가피하다. 장태성은 아마도 자네의 생부가 키워낸 스파이일 터. 행여라도 자네가 길에서 엇나가지 않을까 걱정되어 붙여놓은 감시견이다.”
이시백은 그저 당연한 사실을 읊듯이 차분히 말했다.
상대방을 추궁하는 목소리도, 자신의 추리가 맞는지 확인하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담담했다.
“원서. 나는 경찰을 신뢰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치인은 더더욱 신뢰하지 않아. 경찰이 협력의 증거로 자네를 파견한 것까지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이중간첩이 내 조직의 내부를 휘젓고 다니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장태성 같은 부류는 틀림없이 자네를, 그리고 나를 배신한다.”
“그러니까 처리하시려는 것입니까.”
“……그래. 두 번 다시 배신당하기는 싫으니 말일세.”
이시백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두 번 다시 배신당하기는 싫다. 그 말이 어째서인지 원서의 마음에 작게 부딪혔다.
그녀도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이시백의 목소리에는 진실만이 가지는 뚜렷함과 강인함이 있었다.
“내일 아침엔 격전이 펼쳐질 거다. 붉은 처녀 용병단과 도천 용병단이 서로 전력을 다해서 맞부딪친다. 난전 중에 저격수 한 명이 전사하는 것쯤이야 당연하지. 차수현 팀장도 별다른 의심을 갖지 못한다.”
설령 의심을 품더라도 증거가 전무하리라.
원서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차수현 팀장이 왜 그토록 눈앞의 남자를 경계했는지 깨달았다.
냉철하고 교활한 늑대. 자신의 적을 섬멸하는 데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않았으며, 수법은 더없이 치밀했다.
그러나.
“물론 자네는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
“예?”
“이건 자네의 인생이 걸린 문제일세. 이대로 스파이를 거느린 채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면 그것 역시 자네의 자유야. 자네가 임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떠한 불이익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약속한다.”
동시에,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이쪽을 배려해 주었다.
원서는 잠시간 멍하게 이시백을 바라보다가 경례를 올렸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자발적으로 임무에 참여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장님.”
“그래. 다행이로군…….”
어느새 원서는 이번 작전의 공범자가 되어 있었다.
원서에겐 손해는커녕 이익밖에 없는 작전이었다. 아마 차수현 팀장도 지금처럼 이시백 단장의 공범자가 되었겠지.
뒤늦게 눈치채 보면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있었다. 원서는 이것이 이시백의 무서운 점이라고 생각했다.
“이만 나가보게.”
“예, 단장님.”
원서는 어젯밤 나눈 작별 인사를 떠올리며 건물 옥상에서 내려갔다.
작전은 완벽하게 끝났다. 이제부터 이시백 단장이 마무리를 지을 단계였다.
원서는 그 남자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보고 싶었다.
8
이시백은 총탄이 안겨준 타격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방탄복이 관통을 저지했다고 해서 충격까지 다 흡수하진 못했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서 있던 이시백이 쓰러지자, 간부단들 사이에서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야!? 괜찮아!?”
가장 가까이에 있던 리을령 소좌가 달려들었다.
그녀는 입술에 물고 있던 담배도 내동댕이치고 이시백을 부축했다. 그러자 이시백이 리을령 소좌를 끌어안았다.
리을령이 ‘어? 어?’ 하고 혼란스러워할 때, 이시백이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뭐 하는 거냐! 저격수다……! 소좌님을, 지켜라……!”
고통으로 들끓는 목소리.
하지만 덕분에 붉은 처녀 용병단의 간부들은 사태를 파악했다.
“소, 소좌 동무를 지켜라!”
“몸으로 막아! 저격수한테 시야를 허락하지 마!”
용병단원들이 순식간에 이시백과 리을령을 에워쌌다.
리을령 소좌는 이시백의 몸에 안긴 채 여전히 당혹을 금치 못했다.
저격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이시백이었다. 그런데 정작 자기가 보호받고 있었다. 처지가 역전되지 않았는가.
“이 애송이가, 내 몸은 괜찮으니까 우선 네놈부터 챙겨!”
“괜찮습니다.”
그때 이시백이 품 안에 안은 리을령 소좌를 내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소좌 각하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뭐…….”
“안심하십시오.”
무슨 멍청이 같은 소리를 하는 거냐고 리을령 소좌는 말하려 했다.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 이시백이 한층 더 강하게 리을령을 끌어안았다.
빈틈없는 근력에 리을령 소좌가 무심코 읏, 하고 신음을 흘렸다. 숨이 조금 괴로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괴로운 만큼이나 안심이 들었다.
‘처, 천하의 리을령이…….’
이 나이를 먹을 때까지 리을령 소좌는 애인을 여러 번 둬봤어도 연애다운 연애를 경험하지 못했다.
리을령 소좌가 차지한 위치에 남자들이 기를 쓰지 못했다. 그녀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지키는 쪽이었지, 결코 지켜지는 쪽이 아니었다.
“어서 소좌님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게.”
“가, 감사합니다. 이시백 단장님도 저희와 함께 가시죠.”
붉은 처녀 용병단의 호위대장이 리을령을 넘겨받으며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 위압적으로 굴던 태도는 진즉에 사라졌다. 저절로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저격을 맞고도 다른 사람부터 챙기는 남자를 본다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시백이 고개를 저었다.
“저격수는 소좌님이 아니라 나를 먼저 노렸다. 처음부터 내가 목적일 가능성이 있다. 나와 함께 있으면 소좌님께서 위험에 처하실지 모른다. 여기서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편이 좋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부디 무운을.”
붉은 처녀 용병단원들이 일제히 이시백한테 경례했다.
리을령 소좌가 방탄차에 올라타면서 이시백을 쳐다보았다.
그곳에선 이시백이 끝까지 남아 리을령 소좌의 차량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을령 소좌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형씨, 너무 무리한 거 아니요?”
붉은 처녀 용병단의 부대가 모두 떠나자, 순우경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번 작전은 백산의 간부들 전원이 인지하고 있었다. 순우경은 완벽하게 연기를 해낸 단장한테 손뼉이라도 쳐주고 싶었다.
“골병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을 텐데 멋진 척을 너무 해버리는구먼.”
“시끄럽다. 현장에 오래 남아 있으면 역으로 의심을 당할 수 있어. 서둘러 이동해라.”
“에잉, 쯔쯧. 형씨 앞에선 농담도 제대로 못하겠네.”
그러면서도 순우경은 착실하게 차량을 지휘하여 퇴각 태세를 갖추었다.
순우경한테 부축 받으면서 이시백은 차량에 올라탔다.
평양의 도로 사정이 영 형편없기 때문인지, 자동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이시백은 가슴 부위가 찌리릿 아파왔다.
총탄에 충격을 받은 부위였다.
“원서라고 했나? 그 아가씨 실력이 대단하네. 한 방에 골로 보내버렸어야.”
“프락치이긴 해도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다. 앞으로 네가 여러모로 편의를…… 크윽.”
“아이고야. 억지로 대답하지 마십쇼, 단장님요. 댁은 지금 뼈가 부러져도 한두 개 부러진 게 아닐 공산이 무척 다대해요. 일단 병원으로 모실 테니까 얌전히 계십쇼. 알겠습니까?”
“…….”
이시백이 불편한 얼굴로 턱을 끄덕였다.
하세가와 노부유키의 도천 용병단은 괴멸했다.
위험분자인 장태성을 처리했고, 리을령 소좌의 신뢰마저 얻었다.
이번 작전은 대성공이라고 자부해도 좋으리라.
비록 몸이 약간 상하기는 했지만.
“……위험을 무릅쓴 보람이 있는 하루였다.”
이시백이 입꼬리를 비틀며 두 눈을 감았다.
백산 용병단이 평양에 입성한 지 이제 석 달째.
거대한 장성과 같았던 10인 위원회에서 벌써 두 용병단이 쓰러졌다.
북방에 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