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75화
제11장 코스모스 질 무렵에(1)
1
윤시아가 잠결에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윤시아는 습관적으로 선배를 끌어안으려다가 팔로 허공을 저었다.
“……선배?”
어디로 간 것일까.
윤시아가 눈을 비비적거리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벌써 창밖이 새하얀 아침이었다. 아차, 하고 윤시아는 가슴이 덜컹했다. 그만 늦잠을 자버리고 말았다. 어젯밤 이시백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느라 꼬박 밤을 지새운 탓이었을까.
“선배. 으응, 선배 냄새를 못 맡으면 하루가 시작되지 않는다구요…….”
윤시아가 좀비처럼 비틀거리면서 침실을 나섰다. 다행히도 시아는 이시백을 바로 발견했다. 거실의 창가, 이시백이 외로이 홀로 서 있었다. 이시백은 창밖을 내다보며 조용히 담배를 피웠다.
“서언배―”
윤시아가 뒤에서 이시백의 몸을 꼭 껴안았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를 뒤쪽에서 안는 것을 특히나 좋아했다.
“지금 일어났느냐?”
“네에, 선배는 밤새웠어요? 딱 폼이 그런데.”
“생각할 것이 많았다.”
선배는 항상 생각할 게 많으면서 뭘 또 생각할까.
윤시아가 배시시 웃으면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이시백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윤시아는 잠기운이 확 달아났다. 이시백이 지금까지 전혀 보여 준 적이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몹시 따뜻하고 자상한 눈동자였다.
“생각할 것이 많았단다, 시아야.”
“선배……?”
“우리는 앞으로 아주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될 것이다. 그중에는 강대한 조직의 보스도 있고, 경찰도 있고, 그들보다 더 거대한 권력자도 있다. 당연하지만 우리도 위험에 처하는 날이 많을 거다.”
윤시아에게는 지금 두 가지 생각이 평행하게 달렸다.
하나는 이시백이 대단한 청사진을 그렸다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이시백은 자신의 계획을 ‘위험하다’라고 표현한 경우가 절대로 없었다. 자신의 자랑스러운 애인은 무엇보다도 조심스러운 남자였다. 인생을 도박판에 올려두는 경우 따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남자가 위험하다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너도 많이 위험해질 거다.”
이시백이 자신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
이시백은 기본적으로 무뚝뚝한 남자였다. ‘나는 사람을 좋아할 줄 모르는 인간이다’라고, 윤시아가 고백했던 그날 이시백이 토로했다. 그녀는 그게 진실임을 잘 알았다.
여태껏 두 사람은 애인 관계를 그 나름대로 유지해 왔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시백이 윤시아에게 보내는 감정은 사랑과 거리가 멀었다. 애정과도 한 발자국 멀었다. 기껏해야 일종의 다정함이라고 불러야겠지.
그런 선배가.
‘아.’
그런 선배가 지금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내주고 있었다.
윤시아의 마음속에서 풍경(風磬) 소리와 같은 무언가가 조용히 울렸다.
윤시아는 애초부터 저런 눈빛을 받는 걸 포기하고 있었다. 선배는 삭막한 인간이고,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니까. 괜히 그런 걸 기대해서 힘들게 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틀림없이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겠냐?”
“……걱정하지 마세요, 선배.”
윤시아가 웃었다.
꽃이 활짝 피는 듯한 미소였다.
“위험한 인생이랑 편안한 인생이 있으면 저는 언제나 전자를 선택할 거예요.”
“너가 위험한 여자라서?”
“아니요. 제가 좋아하게 된 사람이 위험한 남자라서요.”
윤시아가 이시백의 옷깃을 잡았다.
이시백이 가만히 있는 사이를 노려서, 윤시아는 옷깃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이시백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윤시아는 가볍게 애인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왜 선배의 눈빛이 갑자기 바뀌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행복했다.
두 사람이 평소보다 약간 늦게 출근하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다음 날.
백산 용병단에 신입이 두 명이나 새로 들어왔다.
사무실에서 원서와 장태성이 빳빳하게 등허리를 펴고 서 있었다.
기존 단원들이 흥미로운 눈초리로 두 신입을 품평하는 가운데, 이시백이 말했다.
“장태성과 원서다. 간부들에게 미리 알려준 대로 두 사람은 경찰 출신이다. 광수대에서 대놓고 우리를 감시하라고 보내준 감시견들이지. 경찰에서 우리를 이토록 높이 평가해 주니 개인적으로 감사할 노릇이야.”
단원들이 낄낄 웃었다.
이시백은 프락치들의 정체를 감춰 두지 않았다. 이건 간부들에게 두 사람을 조심하라고 미리 경고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로써 간부들이 행여라도 두 사람에게 기밀 자료를 건네줄 일은 사라졌다.
“하지만 부디 출신을 차별하지 말고 환영해 주기를 바란다. 경찰에서 평양까지 쫓겨 온 거면 신입들의 인생도 참으로 고달프게 꼬인 것이다. 박수로 맞이해 주도록.”
단원들이 반쯤은 형식상, 반쯤은 재미 삼아 손뼉을 쳐주었다.
장태성과 원서는 이제 선배가 된 헌터들을 향해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두 사람에게는 첫날부터 중요한 일이 배치되거나 하지 않았다. 어느 조직이든 신입은 일단 분위기를 익혀나가야 하는 법이었다. 게다가 이시백은 의도적으로 원서와 거리를 두기까지 했다.
‘내가 원서 아가씨를 총애하면 조직의 근간이 무너진다.’
이시백은 원서를 부하로 부려야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영역이었다. 아직은 감정적으로 원서에게 반말을 쓰는 것조차 불편했다.
‘일단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될 때까지 멀리하는 편이 낫다.’
그래서 이시백은 신입 교육을 단원들한테 일임했다.
결과적으로 이시백과 원서는 첫날에 아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딱 한마디를 주고받았는데, 저녁이 되어 퇴근하는 시간대에 원서가 인사하자 이시백이 무뚝뚝하게 받아준 것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후우, 이 정도면 잘한 것이겠지.’
이시백은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싶었다.
일하는 내내 얼마나 원서 아가씨의 옆얼굴을 훔쳐보고 싶었는가. 영업에 익숙해지라고 직접 도와주고 싶었던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는가. 그러나 이시백은 모든 욕망을 참아내는 데 성공했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평범한 보스와 신입 부하의 관계였다.
“나도 이만 퇴근해 보겠쓰. 어디 나갈 일 있으면 꼭 나 부르고.”
“네, 아저씨. 또 내일 봐요.”
마지막으로 호위대장인 순우경이 퇴근했다.
사무실에는 이시백과 윤시아, 두 사람만이 남았다.
슬슬 퇴근할 준비를 마치기 위해서 이시백도 책상을 정리했다. 그렇게 하루가 평범하게 끝나는가 싶을 때였다.
윤시아가 순우경을 배웅하고 나서 갑자기 이시백의 책상을 향해 걸어왔다. 발걸음에 거침이 너무 없어서, 이시백은 무심코 고개를 돌려 윤시아를 바라보았다.
“저 여자군요.”
윤시아가 다짜고짜 이시백의 넥타이를 부여잡았다.
이시백은 윤시아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미간을 좁혔다.
“무슨 소리냐?”
“새로 들어온 여자 말이에요. 오늘만 해도 42번. 여자가 앉은 책상을 향해서 선배가 고개를 돌리려고 한 횟수예요. 전부 중간에 그만뒀지만, 선배 머릿속이 저 여자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찼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어요.”
“…….”
이시백은 말문이 막혔다.
“저 여자한테 한눈에 반하기라도 했어요?”
“아니, 시아야. 그런 게 아니라…….”
“남자가 갑자기 바뀌면 여자가 생긴 거라고 향금산에서 언니들한테 배웠는데, 어쩜 이렇게 딱 들어맞을까. 나는 또 100일 기념 챙겨줬다고 해서 성격이 좀 유해졌나 생각했지 뭐예요. 세상에. 저런 여자가 취향이었어요?”
이시백은 벌써부터 목덜미에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말했지 않느냐. 그런 게 아니라…….”
“선배, 저는 괜히 싹을 내버려 뒀다가 나중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거 싫어해요. 그냥 잠깐 신경이 쓰이나보구나, 그래도 선배는 나를 좋아해 주겠지, 걱정하지 말자 하고 안심하다가 눈물 빠지기 싫다구요. 그러니까 확실히 말해둘게요.”
윤시아는 이시백의 넥타이를 강하게 붙잡은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저한테서 한눈을 팔지 말아주세요.”
“…….”
“저는 점점 더 선배가 좋아지고 있어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을 정도예요. 그리고 ‘선배도 저랑 똑같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어요. 제가 점점 더 좋아지고 있지요? 꼬맹이라고 우습게 봤는데 점점 더 여자로 보여서 곤란하죠?”
“너…….”
“그렇다면 계속해서 절 좋아하는 마음만 키워주세요.”
윤시아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어떠한 강적이 쳐들어올지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이었다.
“양다리는 딱 질색이니까. 저처럼 어디 가서 구하기 어려운 여자를 잃기 싫으면, 제대로 마음이랑 하반신을 관리하라구요.”
윤시아는 이시백을 오른손으로 밀쳤다.
이시백은 의자째로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넘겼다.
그런 이시백을 바라보며 윤시아가 히죽 웃었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선배랑 각방을 쓸 거예요.”
“뭐?”
“감히 조금이라도 한눈을 판 벌이에요. 일주일 동안 외롭게 베개랑만 지내보세요.”
하고 윤시아는 서류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총총 걸어 나갔다.
그녀가 한 말은 정말이었다. 이시백은 정확히 일주일 동안 윤시아를 침실에서 전혀 볼 수 없었다. 팔자에도 없는 각방을 쓰게 된 것이었다.
이시백은 자기가 정말로 위험한 여자와 사귀게 되었음을 절절히 깨달았다…….
2
금수산태양궁전.
극소수의 성공한 헌터들만이 들어설 수 있는 이곳에서 위원회가 열렸다.
그중에서도 일본계 자본을 총괄하는 야쿠자, 하세가와 노부유키(長谷川 信行)가 안면근육을 비틀었다.
“당장 그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들을 도시에서 추방해야 한다.”
다른 용병단장들이 침묵했다.
하세가와 노부유키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다른 단장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이래서 조센징은 하고 속으로 뇌까리며 하세가와 노부유키가 말했다.
“저번 달에는 주류. 이번 달에는 마약. 게다가 다음 달에 들어서는 아예 상품을 확대한다더군. 내 정보원이 알아본 결과, 주류에서만 신상품을 두 개 동시에 유통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이건 명백히 사업 방해야!”
하세가와 노부유키가 이를 까득였다.
“평양의 주류 사업은 우리 도천(?川)이 맡고 있다. 그런데도 놈들은 우리 관할에 들어오지 않고 제멋대로 술을 팔고 있어. 다들 뭐가 잘났다고 입을 닥치고 앉았나. 이럴 때 사태를 중재하는 게 위원회의 일이지 않느냐!”
“그래서 백산 용병단을 아예 추방시키자고?”
리을령 소좌가 비웃었다.
그녀는 야쿠자의 맞은편에 앉아 담배를 뻐끔거렸다.
“주류 판매는 우리 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허가한 거야. 겨우 두 달밖에 안 된 일인데, 하긴. 네 원숭이 같은 대갈통으로 기억해 내기엔 좀 버거울 수도 있지. 이 누나가 다 이해한단다. 인간세상에서 원숭이로 사는 게 많이 힘들지?”
“빨갱이 년……. 그 안건의 통과도 네년이 주도했겠다.”
하세가와 노부유키가 리을령을 노려보았다.
“주류 허가도, 마약 허가도, 유통 허가도, 모조리 네년이 내놓은 안건이었지.”
“아, 기름칠을 받아먹었으니까 위장에 처넣은 만큼 토해내야지. 걔들이 나한테 넘겨준 돈만 300억이야. 100억에 안건 하나. 아주 깔쌈하게 좋은 거래 아니야?”
“덕분에 우리 용병단은 일주일마다 수익이 수억씩 떨어지고 있다. 책임을 져라, 빨갱이!”
“으음. 책임이라. 책임이라…….”
리을령 소좌가 담배 연기를 흘리며 문득 눈썹을 찌푸렸다.
“야, 내가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말이야. 왜놈 새끼들 국기가 존나게 빨갱이스럽지 않냐? 뭔 놈의 국기가 시뻘겋게 빨간 점탱이 하나 찍어두고 끝이야. 시발, 내가 모르긴 몰라도 열도 놈들 집을 뒤지면 세 집마다 한 놈이 빨갱이일 거야, 진짜로. 쪽바리 대표 하세가와 씨. 우리 같은 빨갱이들끼리 너무 이빨 세우지 맙시다. 예에?”
“……조센징이랑 대화로 풀어나가려고 한 내가 멍청했지.”
하세가와 노부유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검은색 기모노를 입은 야쿠자는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을 한마디씩 끊어서 발음했다.
“나는 손해를 입어도 좋게 좋게 넘어가는 호구 자식이 아니다! 저 빨갱이 년이 애송이들을 싸움개로 만들어서 분탕을 치고 있다는 것쯤은 다 알아. 위원회에서 이걸 중재할 의지가 없다면 내가 해결할 수밖에.”
“그래서? 전쟁을 치르시겠다?”
“필요하다면.”
하세가와 노부유키가 차갑게 단언했다.
그는 마지막에 한국어가 아니라 일본어로 경고했다.
“네년의 머릿속만큼이나 창자도 시뻘겋기를 기도해라, 조센징. 오늘부터 이틀을 주겠다. 이틀이 지나도 네년의 사냥개들이 내게 사과하러 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전쟁이다. 잘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양해를 구하지 않고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리을령 소좌는 일본어는 물론이고 중국어도 할 줄 알았다. 약간이지만 러시아어까지 가능한 여자였다. 그러나 리을령 소좌는 뻔뻔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거, 쪽바리 새끼. 조센징 빼고 뭔 소리를 지껄이는지 하나도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