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73화
제10장 지상락원(地上樂園) (5)
6
저번 생의 어느 기억.
그날따라, 유독 원서 단장은 불쾌해 보였다.
조용히 서류만 내려다보는 단장님을 향해서 이시백이 말했다.
“단장님, 방금 회의에서 장태성 자문사님을 너무 심하게 질책하셨습니다.”
“너무 심하게 질책했다고? 시백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예,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용병단장이 서류에서 눈을 떼고 이시백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쳐도 이쪽을 바라보는 느낌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설령 바라보는 느낌이 들더라도 기껏해야 얼굴이나 눈동자를 향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반면에, 용병단장은 눈길로 이쪽의 심장을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나한테는 친부가 있어. 평생 연락하지 않고 살던 양반인데 말이야.”
“친부, 입니까.”
“그래, 마음대로 씨를 뿌려놓고 이쪽에 신경도 안 쓰는 남자였어.”
단장이 한숨을 쉬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서울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연락을 해왔지 뭐야. 무언가 권력의 부스러기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겠지. 이십 년 넘도록 연락 한 번 안 했으면서 이제 와서 핏줄을 운운하다니……. 웃기지도 않아.”
단장의 의자가 빙그르르 돌아갔다.
그녀는 등을 돌려서 유리창과 마주했다.
착각인지도 몰랐지만, 이시백에겐 단장의 목덜미가 유난히 쓸쓸하고 처연하게 비추었다.
“…….”
이시백은 이럴 때 어떻게 위로해 주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가만히 내버려 두기도 싫었다.
반쯤 무의식적으로, 이시백은 단장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낮게 속삭였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어? 뭐라고?”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제가 단장님의 생부를 처리하겠습니다.”
단장이 고개를 돌려서 이시백을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잠시 뒤, 그녀가 배를 붙잡고 웃었다. 진심으로 튀어나오는 웃음. 입이 아니라 허파로 웃는 소리였다. 이시백은 자기가 말을 잘못 선택했나 싶어서 당혹스러웠다.
단장이 어처구니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시백아, 너 정말로 걸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친딸 앞에서 당신의 아비를 죽이겠노라고 말해? 그걸 또 내가 명령하고?”
“아.”
그제야 이시백은 엄청난 말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속에서 저절로 말이 새어 나가는 바람에 그게 무슨 의미인지 미리 검토하지 못했다. 제3자의 눈으로 보자면 감히 단장님에게 패륜을 권유한 꼴이었다.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미처.”
“아니야.”
단장이 이시백의 투박한 오른손을 잡았다.
그녀는 입가에 연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시백을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아니야, 시백아.”
변명하지 않아도 좋다.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말을 했고, 지금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어떠한 과장도 왜곡도 없이 나한테 전달되었다. 안심해도 괜찮다……. 그런 의미가 시선에 담겨 있었다.
이시백은 잠깐이지만 숨이 멎었다.
“…….”
아까 전의 눈길이 심장을 찔렀다면, 지금 눈길은 심장을 쓰다듬었다.
용병단장은 말수가 적었으며 말을 할 때는 꼭 여백을 두었다. ‘아니야’라는, 보잘것없는 한마디가 강하게 진동하는 까닭도 그 주변에 하얗게 빈 공간이 자리하기 때문이었다.
한 인간의 매력이란 얼마나 넓은 여백을 남겨둘 줄 아느냐에 달렸음을, 이시백은 그녀를 보면서 배웠다.
“나는 친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 지금까지 계속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다행입니다, 단장님.”
“어디서 태어나서 어떻게 자랐느냐는 우리한테 중요하지 않아. 그렇지?”
이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오른손에 겹쳐진 손바닥이 기분 좋게 서늘했다.
이시백은 이 부드러운 서늘함을 언제까지고 지키고 싶었다.
7
“단장님, 괜찮으세요?”
원서가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이시백은 단지 멍하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단장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술에 너무 취했습니다.”
입에서 자연스럽게 존댓말이 나왔다. 뼛속까지 스며든 습관 때문이겠지.
아직 여인이라고 불리기에는 젊고 어린 아가씨가 쓴웃음을 지었다.
“말을 낮춰주세요. 경찰이 아니라 부하로 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차피 제 정보는 경찰청 데이터베이스에서도 삭제되었습니다. 이제 서류상 저는 경찰과 연이 없는 사람입니다.”
“죄송합니다.”
단장님에게 반말을 쓰라고?
이시백한테 그건 생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자그마치 7년이 넘도록 주인으로 모셨다.
물론 단장님은 자신보다 나이가 1살 어렸다. 게다가 지금은 전생이 아니라 현생. 즉, 단장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시기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시백이 존댓말을 쓸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시백은 차마 반말을 혓바닥에 올려두지 못했다.
“처음 보는 분께 반말을 쓰는 건 익숙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런가요?”
묘령의 아가씨가 눈을 깜빡거렸다.
“뭐라고 할까. 제가 생각하던 것과 이미지가 많이 다르네요. 차수현 팀장이 괴물이네 뭐네 하도 겁을 줘서 오만한 산적두목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상외로 신사 같은 분이군요.”
좋다. 차수현 팀장은 다음에 만날 때 반드시 쥐어 팬다.
그렇게 이시백이 가슴에 원한 하나를 심어두었다.
“일어서실 수 있겠어요? 일단 택시를 잡아서 빌딩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부축해 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저 혼자서도 충분히…….”
이시백이 자리에서 엉덩이를 일으켰다. 그때 눈앞이 핑글핑글 돌더니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어, 어 하는 사이에 몸뚱어리가 급격하게 아래로 쏠렸다.
당장에라도 이마가 바닥에 부닥칠 것 같았을 때, 무언가가 이시백을 강하게 잡아주었다.
“그거 보세요. 제 말이 맞잖아요.”
아가씨가 이시백의 몸을 지탱했다.
어째서인지 목소리는 미약하게나마 호의적인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취하셨지요?”
“…….”
“저한테 첫 번째 임무를 맡기는 거라고 생각해 주시길. 침실까지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이시백이 몽롱한 눈동자로 단장을…… 아니, 언젠가 자신에게 단장이었던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칠흑처럼 새카맣게 윤이 나는 머리카락. 역시 깊이를 알 수 없을 만치 검은 눈동자.
전생에서 단장님의 머리카락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해서 엉망진창으로 헐었다. 하지만 지금 원서 단장님의 머리칼은 비단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조금만 더 체중을 이쪽에 실어주세요. 그쪽이 차라리 더 편하니까요. 네, 그렇게요.”
살결도 그러했다. 몬스터를 사냥하느라 바깥의 햇볕에 바싹 탄 피부가 아니었다. 머리카락의 검은색과 대비되듯이 피부가 백자처럼 새하얬다. 팔뚝에 이리저리 나 있던 상처 자국은 온데간데없이 모조리 사라졌다.
삼십 대의 용병단장이 아니라, 열아홉 살의 원서 아가씨가 눈앞에 있었다.
이시백은 혼란스럽게 자문했다.
‘어째서, 왜 단장님이 경찰학교의 수석이라는 말인가……. 광수대의 광견? 경찰들의 프락치였다고? …… 단장님이?’
그럴 리가 없었다.
원서 용병단장은 누구보다도 헌터의 역할에 충실했다. 오로지 북방에서 남하해 오는 몬스터들을 막아내기 위해 분투했다.
헌터라는 직업에 긍지를 품은 여인, S급 몬스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 여걸, 여제라고까지 불린 사람. 백산의 원서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녀에게는 전장의 초연(硝煙)이 향수였으며, 불타고 남은 그을음이 화장이었고, 안전한 방탄복이 드레스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강철과 같은 눈빛으로 전방의 적을 노려보았다…….
‘그런 단장님이 경찰이었다고?’
무언가 착각인 것이 분명하리라.
확실히, 원서 용병단장은 경찰과 협력하는 경우가 많기는 많았다. 예컨대 전생에서 순우경의 밀고를 받아들여 동태상을 처리하려고 했을 때, 단장님은 시청이 아니라 경찰과 협조했다. 부산의 광역수사대와 공조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시백은 마음속으로 단호하게 반론을 펼쳤다.
‘경찰과 협력할 때보다 충돌할 때가 압도적으로 더 많았다.’
애당초 원서 단장님이 왜 목숨을 잃어야만 했는가.
바로 서울의 한강 북부 지역을 끝끝내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땅의 정부는, 경찰을 포함해서, 한강 이북을 통째로 방기하고자 했다. 더는 몬스터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말이다.
원서 단장님은 거기에 반대했다. 격렬하게 반항했다. 평양이 함락된 이때 서울마저 포기한다면 반도는 물러설 곳이 없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때까지 관청에 심어둔 인맥, 경찰과 쌓아올린 라인을 전부 버려 가면서까지, 원서 용병단장은 저항했다.
이시백이 혼란을 떨쳐 내고 확신했다.
‘단장님은 절대로 경찰의 앞잡이가 아니야. 어디까지나 자신의 긍지와 신념을 지키다 돌아가신 분이다.’
당장 이시백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경위로 원서 아가씨가 광수대에 몸을 담고 있었고, 국회의원의 사생아라는 것은 또 무엇인지, 전혀 내막을 알지 못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틀림없이 여기서 흔들렸겠지.
그러나 이시백은 달랐다.
‘무언가를 비밀로 남겨두셨다면, 구태여 알릴 필요가 없어서 그러신 거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에 티끌들이 녹아 없어지듯, 이시백의 믿음은 굳건하여 모든 의심을 불태우고도 남았다. 극에 달한 충성심이 그곳에 있었다. 이시백은 일단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음, 이제사 나왔구만. 어서 가세.”
이시백이 원서에게 부축을 받으며 술집을 나왔다.
술집 입구에는 장대호 판사 그리고 또 다른 경호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판사님. 제가 모셔야 하는데 술이 덜 깨어……. 면목이 없습니다.”
“괜찮소, 괜찮아. 내가 붙잡고 마시자고 한 술자리인데 뭘 사과하나.”
“내일, 제가 확실하게 다시 한 번 모시고 싶습니다. 부디…….”
판사한테 양해를 구하려고 이시백이 힘겹게 머리를 들었다.
이 시점에서 이시백은 오늘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이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단장과 재회하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고개를 든 직후, 이시백은 자기 생각이 딱 절반만 맞아떨어졌음을 깨달았다.
“…….”
“음? 아아. 이쪽이 차수현 팀장이 보내준 다른 한 명이라오.”
장대호 판사가 몸을 돌리면서 경호원을 가리켰다. 원서와 달리 그 경호원은 신장이 큰 남자였다.
그리고 이시백은 원서 아가씨를 보았을 때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경호원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단장님.”
분명히 이시백에게 있어 오늘은 가장 혼란스러운 날이었다.
다만, 그건 염원해 마지않았던 단장님과의 재회 때문이 아니었다.
“저는 장태성이라고 합니다.”
“…….”
어째서 전생에서 단장님이 죽었는지.
어째서 원서 단장님이 탈주하는 도중에 자문사인 장태성한테 배신당했는지.
그 이유를 전부 단번에 깨닫게 되었기에 이시백에게 오늘은 제일 충격적인 하루가 되고 말았다.
‘원서 단장님만이 아니야. 장태성 자문사마저 프락치였다.’
이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이시백의 머릿속에서 기억이 좌르르 펼쳐졌다.
마치 파노라마처럼.
‘형님, 얘가 끝까지 입을 다물어버리는데요.’
‘거 머저리 같은 놈. 네가 네 입으로 자신 있다면서.’
이시백이 죽임을 당한 날.
동태상의 부하들은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다.
‘상판 튀김. 아니, 이시백. 너희 두목이 뒈졌다는데.’
‘그쪽 용병단에서 자문사가 배신을 때렸어. 장태성이. 알지?’
‘너희들 보스가 어디로 도망치는지 전부 알려 준 덕분에 쉽게 잡았다고 그러네. 야아, 너네 조직도 의외로 개판이구나.’
자문사인 장태성이 배신했다.
충신이었을 터인 장태성이 배신했다는 말을, 이시백은 처음에 믿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원서 단장님이 처음부터 경찰이었다면.
만일 장태성 자문사 또한 처음부터 경찰이었다면.
그건 경찰이 같은 경찰을 숙청했다는 얘기가 되어버렸다.
어째서?
‘저기, 시백아.’
‘우리 용병단은 짜바리들이랑 어느 정도 거리를…….’
왜냐하면 원서 단장님이 경찰에 반항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긍심 높은 철혈의 여제가, 정부의 명령과 경찰의 지령에도 수긍하지 않은 채, 최후의 순간까지 서울을 지키겠노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원서 단장님과 경찰, 양측은 돌이킬 수 없는 사이로 갈라졌겠지.
경찰에서는 ‘더 이상 말을 들어 먹지 않는 배신자’를 계속해서 품고 있느니, 차라리 대신에 조금 더 고분고분한 사람을 비즈니스 파트너로 삼았을 거다.
조금 더 고분고분한 사람.
쓸데없이 정의심을 앞세우지 않고 오직 순수하게 이익만을 노리고 움직이는 남자.
‘훌륭한 사냥개는 언제나 환영받게 마련이네.’
동태상(董太相).
원서를 대신해서 서울을 관리할 수 있고.
철저한 이기주의자이기에 정부와 경찰 입장에선 오히려 더 관리하기 쉬운 자.
‘하지만 한 끼 사료비로 십억이 들면 그게 어디 사냥개인가.’
‘사냥개는 주인을 지켜야지, 주인이 사냥개를 지키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네.’
아아 하고.
이시백의 가슴 저 깊은 구렁텅이에서 한탄이 울려 퍼졌다.
어찌하여 깨닫지 못했을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 말은, 호위대장인 자신에게 건넨 말이 아니었다.
용병단장인 원서에게 우회적으로 건넨 비꼼이었다. 경찰의 프락치, 정부의 사냥개로 숨어 지내던 원서한테 넌지시 경고한 것이었다.
주인에게 반항하는 사냥개 따위 아무런 가치도 없노라고.
‘제기랄. 저번 달에 순우경이 몰래 정보를 전했어.’
‘동태상 그 노친네, 쓸모가 사라진 기생들을 아주 대놓고 해부해서 통나무로 팔아버린다고.’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지. 부산 쪽 짜바리들을 끌고 와서 어떻게 쇼부를 보겠다고……. 젠장, 일주일만 더 있었으면 됐는데.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거야…….’
경찰의 협력.
원서의 반항.
충돌.
정보의 누수.
장태성의 배신.
마지막으로, 동태상이 서울의 권좌에 오른 것.
“…….”
비로소 이시백은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단장님을 죽음으로 몰아세운 건 단순히 동태상뿐만이 아니었다.
서울시를 버리기로 결정했던 이 나라의 정부가, 거기에 따른 경찰이, 반도의 정치가들과 권세가들이 철저히 계획적으로 그녀를 숙청했다.
문자 그대로 모든 권력자가.
그녀의 죽음에 대한 공범자였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장태성이 화사하게 웃으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철천지원수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이시백이 담담하게 생각했다.
‘……그런가. 그랬는가.’
이제 취기는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지나친 혼란이 머리를 강타하자 의식이 도리어 냉정해졌다.
‘단장님의 적은. 내가 복수해야 할 원수는, 고작해야 동태상 한 명이 아니라.’
이시백은 입안이 바싹 말랐다.
지금 느끼는 쓴맛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이 나라의 모든 권력자, 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