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72화
제10장 지상락원(地上樂園) (4)
이시백은 우선 조심스럽게 판사한테 다가갔다.
모양새가 꼭 맹수한테 접근하는 동물원 조련사 같았다.
“판사님, 이러시면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게 됩니다. 저 같은 사람한테 무릎을 꿇으시다니요. 저는 마약을 팔고 밀주를 파는 헌터입니다. 어서 일어나주십시오.”
“물론 당신은 쓰레기 같은 작자요.”
“…….”
이시백, 2차로 혼란.
무릎 꿇은 사람한테 쓰레기라는 소리를 들어본 것은 이시백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진귀한 경험이리라.
“그렇지만 쓰레기든 뭐든 내 자식을 구해주었소. 가출 따위를 했으니 어디 나가 널브러져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새끼요외만, 그래도 부모로서 마땅히 감사를 표해야 하는 바. 재차 고맙다는 말을 드리오, 단장.”
“…….”
이시백이 슬쩍 고개를 돌려서 장나래를 쳐다보았다.
원래 이런 양반인가 하고 말없이 시선으로 물었다.
원래 그런 양반입니다 하고 장나래 역시 말없이 대답해 주었다.
판사가 펄떡 머리를 치켜들더니 자신의 딸을 향해 소리쳤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것! 네 애비가 무릎을 꿇고 있거늘 어디 딸이라는 년이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있어! 얼른 이리 와서 같이 무릎을 꿇지 못하겠느냐!”
“몇 년 만에 처음 만난 딸보고 하는 소리가 그거예요? 무릎 꿇으라고? 하나도 안 변했네요, 아버지. 진짜 진절머리가 나요.”
“어허, 당장 와서 무릎을 꿇으라니까! 생명의 은인 앞에서 뻣뻣하게 구는 꼬락서니가 딱 집안 교육 제대로 들어먹지 못한 계집처럼 보이지 않느냐! 네가 바깥에서 고꾸라지든 말든 알 바 아니다만 어디 가서 집안 이름에 먹칠하는 건 용서하지 못한다!”
장나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애비의 곁에 갔다.
그녀가 무릎을 굽히자, 장대호 판사는 기다렸다는 듯 딸내미의 뒤통수를 잡아서 꾸욱 눌렀다. 장나래는 반쯤 억지로 방바닥에 이마를 붙이게 되었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해!”
“……목숨을 구해주시어서…… 감사합니다…….”
초현실적인 풍경이 접견실에 펼쳐졌다.
부친은 어떻게든 딸아이의 머리를 낮게, 더욱 낮게 숙이려고 팔뚝에 힘을 주고 있었다.
반면에 딸아이는 어떻게든 반항하려고 목줄기에 힘을 빳빳하게 주고 있었다. 부친의 팔뚝과 딸아이의 목줄기에 모두 힘줄이 돋아났다.
“앞으로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노라고 맹세해라!”
“……평생……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단장님.”
이시백은 부모가 없었다.
아주 예전에는 그것 때문에 세상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저런 부모라면 없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서, 왜 판사댁처럼 화려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도 장나래가 가출했는지 완벽하게 이해되었다.
‘콩가루 집안이다.’
‘완전 콩가루 집안이네요.’
이시백과 윤시아의 생각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이후로도 장대호 판사는 몇 번이고 자신을 따라서 문장을 읊으라 강요했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보필하겠다’라느니, ‘발닦이 수건으로 쓰여도 여생의 영광’이라느니, 별의별 문장이 다 튀어나왔다. 장나래는 이빨을 으드득 갈아 대며 이시백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몸을, 파는 한이 있더라도, 단장님을 위해, 일, 하겠습니다……!”
눈동자에 기세가 담겨 있었다.
동공이 진심으로 살기로 번들거렸다.
솔직히 이시백으로서는 다소 억울했다. 왜 자신이 원망 어린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가. 이시백도 상대방이 이런 괴짜인 줄 알았더라면 결코 방문을 환영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여곡절의 10분이 지나고 장대호 판사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본인이 감사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 전해졌으리라 믿소.”
“아니, 예. 충분히 전달되었습니다.”
사실 조금 과하게 전달되었다.
“이 딸내미는 어릴 적부터 왈가닥이 따로 없어서 주변에 민폐만 끼치고 다녔다오. 성질머리 좀 죽이라고 일부러 여자 사립학교에 보내놨더니만, 원. 제 버릇 개한테 못 준다더니 딱 그 짝으로 자랐소.”
“그렇습니까…….”
“그런 거요. 단장도 딸을 키워보면 다 알게 될 것이오. 내 손으로 기저귀 갈아주면서 돌봐줘도 머리가 조금만 굵으면 알량한 자존심이나 세워대면서 빽빽거리는 꼴이…….”
“노친네가 노망이 들었으면 골방에서 담배나 피울 것이지 왜 나 일하는 곳까지 앵겨 와서 헛소리야!”
장나래가 꽥 소리를 질렀다.
크흥 하고 장대호 판사가 코를 울렸다.
“저 보시오. 또 빽빽거리지. 지 인생 부끄러운 줄을 모르니까 저래 싹수가 노래지는 거요. 판사가 될 수 있었는데도 자기는 신념이 있어서 갈 길을 선택했다, 그딴 식으로 합리화를 시키는 게지. 건방진 놈.”
“와아, 노친네. 진짜. 여기서 한판 붙어볼 거예요?”
“어른들끼리 말하는 데 끼어들지나 마라, 싸가지야.”
장대호 판사가 장나래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오늘 평양으로 내려오기 전에 족보에서 네놈 이름을 지웠다. 넌 더 이상 장 씨 집안의 독녀가 아니야. 후계는 번듯한 양자를 들여와서 이을 테니 네 원하는 대로 어디 끝까지 나가서 죽어봐라.”
“정말로 감사합니다, 족보에서 지워 주셔서! 그러게 진즉부터 내쫓았으면 사립학교 학비도 안 들고 노친네 주름살도 적게 나고 얼마나 좋았어. 하기사 노망이 난 대가리로 그런 걸 고려하기란 불가능하겠지.”
“애비가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이십 년 가까이 처먹은 것이 뭐 잘났기에 혓바닥은 청산유수로고.”
장대호 판사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 사회의 밑바닥에서 차근차근 올라가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더냐? 아주 당당해서 보기가 좋구나. 그런데, 어이구, 기껏해서 평양까지 뛰쳐나간 년이 자기보다 한 살 어린 남자의 수하로 들어가서 쫄따구 노릇이나 하고 있어?”
장대호 판사가 엄지로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선 윤시아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사태를 관람하고 있었다.
“게다가 얘기를 들어보니 저 아가씨가 조직의 2인자라는구나. 열여섯 살? 너 지금 가출해서 한다는 짓이 열여섯 살 여자애 시다바리나 드는 것이냐? 그것 참 대단하구나. 정말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으니 적어도 언행일치는 보이는구나, 딸내미야.”
“이…… 이, 겁대가리 없는 노친네가 진짜…….”
장나래가 부들부들 떨었다.
얼굴이 시뻘게져서 당장에라도 부친을 한 대 때릴 기세였으나, 여기서 주먹을 휘둘러 봤자 패배하는 것은 자기 자신임을 알았겠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분노에 휩싸이기만 했다.
“네 인생이 부끄러운 것을 알거라.”
장대호 판사가 고릴라처럼 큼직한 손으로 딸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말이 꿀밤이었지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퍽 하는 소리가 거창하게 울려 퍼졌다.
“여기 있는 이시백 단장은 고아 출신이고 저기 꼬마 아가씨도 고아 출신이다. 여기서 삼시 세끼 꼬박꼬박 받아먹은 부르주아는 네놈밖에 없다. 학교를 다니고 교육을 받은 것도 너밖에 없어. 그런데도 제일 말단으로 구르고 있으니, 네가 얼마나 쓸데없이 인생을 낭비했는지 알 만하지 않더냐.”
“…….”
“네놈이 못난 걸 알았으면 머리를 숙여라. 주제에 맞게 생활해라 이거다. 남들보다 시 한 수 더 읊을 줄 알고 남들보다 외국어 한 단어 더 외울 줄 안다고 해봤자 네놈의 싸구려 품격이 갑자기 고급스러워질 줄 아느냐. 너 따위를 낳아서 길렀다는 게 이 장대호, 오십 평생 제일 불쾌한 오점이다. 한심한 것.”
장나래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깨가 떨리는 것이 어지간히도 분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자기가 중재해야겠다 싶어서 이시백이 나서려는 찰나, 타이밍 나쁘게도 장대호가 이시백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거대하다.’
이시백은 오랑우탄한테 어깨가 붙잡힌 줄 알았다. 어디 가서 덩치로 꿀려본 적이 없었거늘, 2m가 훌쩍 넘어가는 거한한테는 별 도리가 없었다. 일단 팔뚝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졌다. 절대로 평범한 50대 중년의 근육이 아니었다.
“단장은 나와 함께 술이나 마시러 갑시다. 내 평양에 있는 동기한테 좋은 술집을 알아봐 달라 부탁했다오.”
“그래도 오랜만에 따님을 만나신 것인데. 저와 시간을 보내셔도 괜찮으련지…….”
“어차피 평생 보지 않을 속셈으로 가출시킨 것이오. 고생길을 자처했기에 조금 나아졌나 기대했더니 아직도 얼굴에 기름기가 끼어 있는 게 딱 재수 없는 면짝이외다. 더 볼 것도 없소.”
도대체 이 집안에서는 부모자식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설마 고아인 자신에게 낯설 뿐이지, 이런 게 평범한 부모자식일까.
매우 드물게도 이시백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어서 나가서 한잔 걸칩시다.”
그 뒤, 장나래와 윤시아를 내버려 두고 두 사람은 대동강으로 향했다.
반쯤은 장대호 판사에 의해 이시백이 끌려가는 형태였다. 그나마 바깥 공기를 마시니까 이시백은 서서히 정신이 냉정한 상태로 돌아왔다. 이시백이 대로를 거닐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판사님, 경호원은 없습니까?”
“광수대에서 경호원으로 써먹으라 붙여준 친구가 두 명은 있더구먼.”
장대호 판사가 또다시 코끝을 크흥 울렸다. 버릇인 것 같았다.
“그거 가까이 붙어 다니면 내가 숨이 막혀서 견디지를 못하오. 어디 멀리서 눈에 띄지 않게 따라오라고만 말해뒀으니 알아서들 잘하겠지. 경호원이 없으면 신변이 위험해지는 도시라니. 그게 도시라고 할 수는 있는가 모르겠소.”
“그렇군요.”
과연.
이시백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경찰의 엘리트들께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얼핏 보아서는 알아차릴 수 없도록 위장을 했으리라. 최소한의 경호 인력이 있다면 이시백으로서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5
“이곳이 그래도 진짜 술다운 술을 판매하는 곳이라는군.”
장대호 판사가 안내한 장소는 보통 술집이 아니었다.
평양 시내에 유유하게 흘러가는 대동강. 이 한복판에는 매일 저녁마다 초호화 유람선이 운항했다. 아파트 높이로 20쯤 되는 이 유람선은 명목상 중국 상해시에 소속되어 있었고, 따라서 배 안은 중국의 사법제도가 통용되는 중국 영토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꼼수’는 경찰의 단속을 원천봉쇄하기 위함이었다. 평양에서 제일가는 카지노와 창관은 이 유람선 안쪽에 들어섰다. 한국계 자본이 석권한 평양에서 거의 유일하게 서양 쪽 유곽을 접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판사님, 조금 더 편안한 장소를 가셔도 저는 좋습니다.”
“미리 자리를 예약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장대호 판사와 이시백은 간단한 보안 절차를 거쳐서 유람선에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아름다운 여인들이 맨살을 드러낸 채 교태로운 눈길을 보내왔다. 퇴폐와 향락이 당연하다는 듯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장대호 판사는 여인들의 살결에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주점으로 향했다.
아직 초저녁인지라 주점은 조용했다. 일본풍과 중국풍이 묘하게 섞인 가게로, 메뉴에도 일본술과 중국술만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시백은 전생에 자기가 즐기던 술의 이름이 몇 개 보여서 그것을 주문했다.
“호오. 아직 젊은데 술맛을 좀 볼 줄 아는구려.”
“우연히 입맛에 맞았을 뿐입니다.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판사님.”
“말을 낮추고 말고는 내가 결정하오.”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인지 무시하는 것인지 가늠이 안 되는 어투였다.
“차수현한테서 시백 단장의 얘기를 많이 들었소. 그래, 내 딸을 구하는 조건으로 평양에 공사를 들어갔다고.”
“예, 판사님께서는 제게 감사를 표시하셨습니다만, 저야말로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 처지입니다. 따님이 아니었더라면 제가 평양에 자리를 잡기까지 최소한 1년. 아마도 2년이 걸렸겠지요. 저희 용병단을 성공시켜 준 사람은 다름 아니라 장나래 단원입니다.”
“…….”
장대호 판사가 가만히 이시백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솔직하군.”
“예?”
“겸양을 표하는 것 같지만 내용이 솔직하오. 흐음. 괜히 아부만 떨었다면 내가 질색했을 터이고, 지나치게 솔직했다면 내가 경멸을 드러냈을 것이오. 벌써 이쪽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서 접대를 하다니…….”
장대호 판사가 물컵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그의 손바닥에 들리니 물컵이 소주잔처럼 초라하게 보였다.
“차수현 그놈은 경찰에서 작정하고 키우는 엘리트 중 하나요. 법원에도 잘 부탁드린다면서 몇 번이고 인사를 시켰지. 그런 아해가 고작 스무 살짜리한테 쩔쩔맨다고 들어서 어떤 남자인가 싶었는데……. 흐음, 특이하군.”
특이하다?
이시백은 장대호 판사의 표현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주점 직원이 술을 날랐다. 이시백과 장대호는 말없이 서로에게 술을 따랐다. 한동안 상대를 탐색하는 공기, 어딘지 모르게 긴장된 공기가 이어졌다.
이럴 때는 누가 더 다혈질이냐로 승부가 갈렸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장대호 판사였다. 이 석기시대의 유인원 같은 남자는 마음이 불편한 듯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때때로 재능이 넘치는 젊은이들이 있소. 그들은 축복받은 종자이지. 타고난 매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자신의 신념을 저절로 상대방한테 전염시키오. 나는 차수현이의 말을 듣고 이시백 단장이 그런 부류인 줄 알았소. 아니라면 20살에 그런 성공을 거두기란 요원하니까.”
하지만, 하고 장대호 판사가 말했다.
“막상 만나보니 전혀 아니로군. 천성적인 매력으로 경험의 부족을 메우는 부류가 아니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감추고 상대방의 성격에 맞춰서 대응하는 성격이구려.”
“과찬이십니다. 가진 매력이란 게 없으니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말이 못 견디게 특이하다는 거외다. 너무 어른스러워.”
장대호 판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꼭 하마가 제때 먹이를 먹지 못해서 불만스러워하는 표정 같았다.
“단순히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니라 이쪽의 성격에 따라서 겸손을 떠는 것이지 않소. 그런 건 젊은이들의 태도가 아니야. 젊은이와 늙은이를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사회생활이란 걸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상대방에 맞추는 것’으로 이해하느냐, 이거 하나에 달렸소. 이시백 단장. 당신은 나이에 비해 너무 능숙하오…….”
“…….”
“아마도 차수현이를 대할 때와 나를 대할 때의 태도가 천차만별이겠지. 내 딸내미를 대할 때는 더더욱 그렇고. 직접 보지 않아도 빤히 알겠소.”
장대호 판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그렇게 되었느냐.
장대호 판사는 그것을 질문하고 있었다.
“젊은이가 조금 더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소? 야망이 있을 터인데.”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야망은 저 자신을 위한 야망이 아닙니다.”
“음……?”
장대호 판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시백은 이 괴팍한 성질의 남자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일까. 평소라면 말하지 않았을 속내의 일부분을 얼핏 보여 주었다.
“세상에는 저 따위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 인생을 바치는 것이 제 야망이고 보람입니다.”
“……마약을 팔고 밀주를 파는 인간이 입에 담을 말은 아니요외만.”
“너무 맑은 물에서는 물고기들이 살 수 없습니다. 판사님, 죄송하지만, 저는 제 한 몸 깨끗한 것에는 관심이 없는 종자입니다.”
“허어.”
장대호 판사의 표정이 탁 풀렸다.
판사는 오묘한 시선으로 이시백을 찬찬히 살폈다.
“위험천만한 길을 걸으려는 젊은이군. 손이 더러우면 손때가 묻은 물건도 따라서 더러워지는 법. 악독한 수단을 써서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는 없소.”
“결과를 취하는 것이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괜찮습니다.”
“그렇지. 말이야 그렇게 성립하지……. 하지만 시백 단장. 이제부터 수십 년을 돈더미에 앉아서 살 텐데 과연 취하지 않을 자신이 있소외까? 나는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을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소…….”
이시백은 옅게 미소를 지었을 뿐이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서 뭐라고 대답한들 상대방한테 믿음을 주기란 어려웠다. 오직 행동으로 증명해야 할 부분이었으므로. 장대호 판사는 이시백이 침묵한 까닭을 알아채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두 남자는 밤새도록 술잔을 나누었다.
더 이상 별다른 이야기가 오가지는 않았다. 원체 두 사람 다 말수가 적은 성격이었다.
다만 삼십 분마다 한 번씩,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장대호 판사가 무언가를 질문했다.
그러면 이시백이 대답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장대호 판사는 ‘호오’, ‘으음’, 하고 짧게 침음을 흘렸다. 그게 전부였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온 무렵, 두 사람은 만취했다.
특히나 이시백이 만취했다. 판사와 검사만큼 술이 강한 직업이 따로 없었다. 그중에서도 장대호는 술고래로 이름난 남자였다. 이시백은 좋은 대결을 벌였지만 결국에 패배하고 말았다.
“허허. 젊은이가 술도 잘 마시는구먼.”
장대호가 이시백의 어깨를 두들겼다. 술집에 들어왔을 때와 비교해서 태도가 퍽 친근해졌다. 이시백은 오랜만에 술에 잔뜩 취하여서 머릿속이 먹먹했다.
“……으음, 죄송합니다……. 제가 숙소에 모셔 드려야 하는데…….”
“아니요. 신경 쓰지 마시오. 어차피 나는 경호원도 있거늘 뭘 걱정하나. 내 경호원이 두 명 있으니 한 명을 빌려드리겠소.”
“감사합니다…….”
“거기, 자네들!”
장대호 판사가 고개를 치켜들고 소리쳤다.
아마 그쪽에 경호원들이 위장하고 있었나보다 하고 이시백이 막연하게 생각했다.
“여기 와서 이 친구 좀 부축하게나. 자네 말고. 자네가 가면 내가 새파랗게 어린 처자랑 함께 가야 하지 않나. 그래, 자네. 이시백 단장을 잘 모시게나.”
“알겠습니다.”
바로 그때.
순간적으로.
이시백은 두개골에 진득하게 배인 술기운이 단 한 번에 날아갔다.
“어차피 자네는 쭉 이시백 단장을 모실 처지라고 하니 알아서 잘 처신하게. 상관이 될 남자야. 뭣하면 몸으로 잡아버려도 좋겠지. 내 안목을 걸고 자신하는데 나쁘지 않은 남자다.”
“죄송합니다. 근무 규정상 사적인 명령에는 따르지 않겠습니다.”
술기운이 날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한, 이 목소리를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농담일세. 허, 무슨 어린 처자가 그리 딱딱한가?”
“그것이 규정이므로.”
차갑고 단단한 목소리.
감히 다른 사람이 함부로 접근하는 것을 단칼에 끊어내는 듯한 어조.
이시백은 천천히, 거의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눈이 마주쳤다.
이시백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젊은 그녀가.
아니, 젊다기보다 차라리 어리다고 표현해야 할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이시백의 머리에 전류가 흘렀다.
“조금 더 몸에서 힘을 빼주십시오. 이시백 단장님, 제가 부축하려면 협조가 필수적입니다.”
여자는 이시백을 내려다보면서 담담하게 얘기했다.
어디까지나 사무적인 어조였다.
이시백은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흐느끼듯 말했다.
“……원…… 서…….”
“예?”
“원서…… 아가씨……?”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여자.
죽어서라도. 죽은 다음에라도 지키고자 다짐한 사람.
“예, 제가 원서입니다. 차수현 팀장님이 미리 말씀을 드린 모양이군요.”
백산의 유일무이한 용병단장 원서.
이시백이 인정한 주인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시백 단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