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달의 제국-71화 (71/142)

건달의 제국 71화

제10장 지상락원(地上樂園) (3)

“이거, 참.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이시백이 목소리에 웃음기를 흘려보냈다.

프락치가 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광역수사대와 불편한 동침을 시작했을 때부터 각오했다.

그런데 설마 대놓고 이제부터 첩자를 보내겠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알려올 줄이야…….

“식구를 소개하는 방법이 꽤 참신하군요, 차 팀장님.”

-아하하, 역시 바로 눈치채시는 겁니까.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 이시백 단장님과는 얘기가 빨리 진행되어서 편합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전화기 너머로 상대방이 물을 마시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이시백이 기억하기로 차수현 팀장은 일하면서 생수를 마시는 습관이 없었다. 아마도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입안이 건조해질 만큼 몸이 굳은 것이었다.

-저도 처음에는 몰래 빨대를 꽂아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단장님은 평양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정식 단원을 아예 채용하지 않더군요. 곤란합니다…….

차수현 팀장이 한숨을 쉬었다.

연기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한숨이었다.

-뭐, 그렇다고 개성부터 함께한 순우경 씨나 윤시아 양을 회유할 수도 없을 것 같고. 유현도 양이나 장나래 양도 목숨의 은혜를 입었으니 영 작업하기 껄끄럽지 뭡니까. 얼마 전에는 또 사업하신다기에 단원을 늘릴까 기대했더니만, 아예 점조직으로 운영하시네요? 이거 참.

“대단합니다. 개성에 계신 분이 평양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군요.”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요. 하하. 저야 10년 넘게 배워먹은 도둑질이 이거 하나뿐이니 능숙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배들 도움도 왕창 얻어먹고 있는데……. 하지만 이시백 단장님은 다르죠.

“뭐가 다르다는 말씀입니까?”

사무실에 이시백의 말소리가 적막하게 내려앉았다.

다른 간부들은 각자 맡은 업무를 뛰러 나갔다. 형광등이 꺼지고 창문으로 자연광만 슬그머니 들어왔다. 햇빛이 있다기보다 그늘이 있는 그 장소에서, 이시백은 허공을 쳐다보았다.

-이시백 단장님은 아무런 기반도 없이 출발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1년 만에 평양의 10인 위원회에 거론될 정도로 성장했다……. 어딜 어떻게 봐도 정상적인 성장세가 아닙니다. 이야아, 감탄스러울 따름이군요. 도저히 스무 살의 수완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전생에 착한 짓을 많이 한 덕분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하하핫.

그때 사무실 한편에 놓인 팩스에서 위이잉 떠는 소리가 울렸다.

이시백이 팩스기를 쳐다보는 것과 동시에 차수현 팀장이 말했다.

-저희 쪽에서 이번에 보내게 될 선수들입니다. 두 명이지요. 두 명 전부 이름이랑 사진, 태생은 보안 관계상 삭제했습니다. 살펴봐 주십시오.

이시백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팩스기 번호를 차수현 팀장에게 알려준 적이 없었다. 상대방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사무실 팩스 번호를 알아냈다.

차수현 팀장은 이시백의 수완을 칭찬했지만, 이시백은 도리어 상대를 칭찬해 주고 싶었다.

“예, 지금 받았습니다.”

이시백이 팩스로 전달된 서류를 넘겼다.

서류 곳곳이 길쭉한 김(■)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보시면 알겠지만 상당히 우수한 인력입니다. 그중 한 명은 중앙 경찰학교에서 수석으로 입학,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입니다. 물론 비공개로 돌려진 내부 자료이지만요.

“보통 수석을 비공개로 돌립니까?”

-그럴 리가요. 여러 가지 사정이 걸쳐 있습니다, 이게.

차수현 팀장이 기묘하게 웃었다.

이시백은 이게 단순한 프락치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일단 보통 순경 과정으로 입학한 친구가 아닙니다. 경찰학교에선 일반 수업만 같이 듣고 나머지 실습수업이나 훈련은 아예 따로 받는 과정이 있습니다. 여기에 들어온 친구들은 처음부터 신원을 철저히 감춰 두지요.

“과연. 404 경비단, 광역수사대 예비 광견(狂犬)들입니까.”

-……이시백 단장님은 모르는 게 없군요. 이래 봬도 간부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은어인데 말입니다. 정식 부대 명칭은 없습니다, 저거?

차수현 팀장은 다소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였다.

장대호 부장 판사가 지방 법원장으로 내정되었다는 걸 아는 것도 그렇거니와, 이 젊은 친구는 검찰과 경찰의 내부 사정에 너무나 빠삭했다.

대단하다, 놀랍다 라는 수준이 아니었다. 조금 달랐다. 차수현 팀장은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래서 수석 졸업생이나 되는 엘리트를 왜 이쪽에 보냅니까? 저희를 높이 평가해 주시는 거야 매번 감사드릴 일입니다만.”

-아. 그게, 말씀드린 대로 사정이 복잡해서요. 제가 보니까 평범한 프락치를 뿌려도 이시백 단장님은 바로 눈치채고 뽑아버릴 것 같거든요. 뽑히는 것까지야 뭐 인력을 낭비했다며 시말서를 쓰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단장님이 빨대들을 역으로 이용해 버릴 경우죠. 참. 그건 진짜로 골치가 아파집니다.

“…….”

-그렇다고 제가 매일 프락치들을 일대일로 관리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단장님 덕택에 업무가 폭증하고 있는데요. 앗싸리 그냥, 저도 감당할 수 없고 단장님도 감당할 수 없는 요원을 보내버리자 하고 결정한 겁니다.

“오늘따라 매우 솔직하시군요.”

-어유, 저 이제 단장님이랑 정치 싸움 안 하렵니다. 수사 대장까지 올라가면 됐지, 뭐 저 같은 놈이 여기서 더 광명을 찾겠다고 욕심을 부려요.

거짓말이었다.

이시백은 차수현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전생에서 이시백이 호위대장으로 활약했을 때, 차수현은 이미 다른 곳으로 승진하고 후임자에게 직책을 물려주었다. 다만 어느 지방경찰청에서 차장을 맡았다는 것 정도는 어렴풋하게 기억이 났다.

지방경찰청 차장이면 경무관(제3급). 그야말로 ‘경찰의 별’이라 불리는 최고 간부였다. 개인적인 야망이 없으면 올라가기가 불가능한 직위이겠지. 이시백은 상대방의 천연덕스러운 겸손이 약간 우스웠다.

“서류를 보아하니 이미 현장에서 몇 번 뛰어본 사람이군요. 경찰학교 수석, 훈련 실적, 현지 경찰의 추천, 정보관의 신변 조사, 제2차 조사까지. 전부 훌륭한 기량을 뽐내고 있습니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 아닙니까. 음, 어디에 문제가 있습니까?”

서류는 완벽에 가까웠다.

솔직히 한낱 프락치로 소모하기에는 아까울 정도였다.

잠입 임무, 라고 표현하면 듣기야 거창해도 여차할 경우 꼬리가 잘리는 역할에 불과했다. 임무는 어렵고 보상은 적었다. 반면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도맡아야 했다.

경찰의 엘리트로 출셋길이 보장되었나 싶었는데 별안간 헌터의 프락치 노릇이나 하라니. 말이 안 되었다. 이건 이미 인사국이 잘못되었다고 불평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현역 국회의원의 사생아입니다.

“…….”

차수현 팀장이 뇌까린 한마디로, 모든 사정이 이해되었다.

-조부를 포함해서 벌써 3대째 경남 등지에서 국회의원직을 세습하고 있습니다. 장대호 판사집의 집안도 만만치 않게 명문가입니다만, 이쪽은 더합니다. 물론 명문가에서 사생아 한두 명쯤 나오는 거야 이상한 일이 아니긴 해도…….

“너무 눈에 띄는군요.”

-바로 그겁니다.

차수현 팀장이 한숨을 쉬었다.

분위기가 묵직해졌다.

-조용히 살면 가문에서 평생 밥줄 끊기지 않게 지원해 줄 텐데, 이 아이는…… 실례했습니다. 이 사람은 검정고시로 최저 학력을 통과한 다음 순식간에 경찰학교 과정을 돌파했습니다. 차석도 난감한데 수석입니다. 신분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가문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이시백 단장님이라면 충분히 짐작하실 겁니다.

“잠깐 담배 좀 피우겠습니다.”

-예에, 얼마든지.

이시백이 주머니에서 연초를 꺼내 불을 지폈다.

명문가의 사생아 주제에 얌전히 지내기는커녕 유능함을 드러냈다. 경찰 입장에서도 곤란하겠지. 이런 인재를 품에 안으면 저절로 현역 국회의원과 척을 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내쫓을 명분도 부족했다. 이시백이 담배 연기를 흘렸다.

“그래서 우리 용병단에 프락치로 보내는 것입니까?”

-잠입 요원은 임무가 끝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신분을 위장합니다. 당연하지만 국회의원의 자식이라는 신분도 말소됩니다. 자연스럽게 신분을 세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용병단 프락치만큼 유용한 통로도 없지요.

“어른들의 더러운 정치놀음이군요.”

이시백이 비웃었다.

“저한테 기대하시는 게 뭡니까?”

-없습니다. 맡아만 주십시오. 여차하면 몰래 처리해도 좋습니다.

“경찰학교 수석의 인재를, 그것도 훈련된 사냥개를 버림패로 쓰겠다라. 언제부터 그런 인재를 낭비해도 괜찮을 정도로 이 나라의 경찰이 풍족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아하하. 저한테 불평하셔도 난감할 뿐입니다. 상관들이 책임지기 싫다고 저한테까지 내려온 인사인걸요. 저도 겨우 월급이나 받아먹고 사는 공무원 나부랭이입니다, 단장님.

“…….”

이시백이 머릿속에서 계산을 굴렸다.

이건 척 봐도 양날의 검이었다.

이시백 입장에서는 언제든지 프락치의 정체를 폭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프락치를 통해서 조직의 정보가 새어 나갈 위험이 생긴다. 이시백과 차수현, 두 사람이 서로의 목줄을 함께 잡는 형세였다.

위험한 동맹.

하지만 확실한 신뢰관계를 쌓아둔다는 측면에선…… 나쁘지 않았다.

“일단 사람을 좀 보고 결정해도 되겠습니까?”

-예에, 당연하지요. 좋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입 요원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

프락치라는 걸 알기만 하면 오히려 여러모로 써먹을 수 있었다. 요컨대 써먹기 쉬운 성격인가 아닌가, 이것만이 중요했다. 직접 사람 얼굴을 봐야만 판단이 서는 문제였다.

“하지만 차 팀장님. 이번 건은 빚으로 남겨두겠습니다. 저희 백산 용병단은 언제든 경찰에 협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료로 봉사를 제공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나중에 제값에 빚을 되돌려 받기를 기대하겠습니다.”

-하하. 물론이고말고요. 저도 이시백 단장님과는 오랜 인연을 이어나가고자 고대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잘 지켜봐 주십시오. 그 사람, 약간 애송이 티가 나긴 해도 인격이 아주 제대로 되어 있습니다.

“예, 그럼 이만.”

통화는 거기에서 끊어졌다.

이시백이 재떨이에 담배를 툭툭 털어내며 상념에 잠겼다.

용병단의 구성이 묘하게 되었다. 장나래는 부장 판사의 집안에서 가출한 딸내미였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빨대는 국회의원 집안의 미운 오리 새끼였다.

도대체 어찌 된 노릇일까. 백산 용병단이 무슨 엇나간 명문가의 자식들이 모여드는 피난처라도 되는가.

이시백은 높으신 양반들의 취향을 알다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세상사란 참으로 요 지경이었다…….

4

나흘 뒤, 장나래의 부친이 용병단 아지트를 찾았다.

괜히 잘나가는 집안이 아니었는지 부산에서 평양까지 비행기를 타고 왔다.

석유가 금값인 시대에 비행기는 극소수의 상위층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이시백도 현생과 전생을 통틀어서 비행기를 타본 경험이 없었다.

“수년 만에 아버지를 뵙는 것인데 긴장되지 않는가.”

“평생 보지 않을 생각으로 가출했습니다. 긴장할 것도 없습니다, 단장님.”

장나래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접견실에는 이시백과 장나래만이 자리해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당초 공항까지 마중을 나가려 했으나, 장대호 판사가 이를 거부했다. 자신이 손님이니 직접 찾아가겠다는 것이었다.

상당히 교양 있는 답변.

하지만 이시백은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았다.

‘하긴 헌터와 만나는 모습이 외부에 발각되면 골치가 아프겠지.’

장대호 판사는 얼마 안 있어서 지방 법원장으로 발령이 날 양반이었다.

출세가 코앞에 놓여 있는 만큼 떨어지는 잎새에도 조심해야만 했다. 언제 경쟁자들이 자기를 모함할지 몰랐으므로. 장대호 판사와 이시백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자리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싫어하는가?”

“싫어하냐 좋아하냐로 물으시면……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장나래가 눈썹을 찌푸렸다.

“고집불통 같은 분입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 말해도 좀처럼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학식은 뛰어나서 말싸움으로 이길 수도 없습니다. 제 아버지이지만, 정말 상대하기 힘든 부류입니다.”

“으음. 판사가 곤조가 있는 건 좋은 일이지.”

“곤조를 뛰어넘어서 꼴통이라는 느낌입니다……. 뭐, 단장님도 보시면 바로 알 겁니다. 사실 안 만나는 편이 가장 좋지만요.”

장나래가 석연치 않은 기색을 내풍기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누군가가 접견실 방문을 두들겼다. 안내역을 맡은 윤시아의 목소리가 방문 너머로 들려왔다.

“단장님,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바로 안쪽으로 모셔라.”

그러자 문이 열리고 처음 보는 중년 남자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남자의 첫인상은 단순히 거대하다는 것이었다.

신장이 2m는 되었다. 검은색의 정중한 정장조차 남자가 지닌 근육을 미처 가려주지 못했다. 잿빛으로 센 머리카락은 사자의 갈기처럼 선이 굵었다. 이시백은 과연 장나래의 부친이구나 싶었다.

“흐흡.”

남자가 접견실을 힐끗 둘러보았다.

마치 석기시대의 전사가 사냥감을 찾는 듯한 눈초리였다.

이시백이 상반신을 반쯤 숙이며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판사님. 제가 부족하나마 영애를 맡고 있는 이시백…….”

그때였다.

중년 남성은 이시백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별안간 방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어찌나 무릎 꿇는 소리가 거대하게 났는지, 카펫이 깔렸는데도 쿠웅 하고 바닥이 울렸다.

이시백이 미처 당황하기도 전에 장대호 판사가 야만인처럼 울부짖었다.

“내 못난 자식새끼를 구해줘서 고마아압소, 단장!”

고막이 울렸다.

아니, 천장이 울렸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였다.

“……판사님? 이게 대체 무슨.”

“경찰놈들한테 자초지종을 다 들었소. 이 장대호, 자식을 구해준 은인보다 높은 곳에 설 만큼 후안무치한 놈이 아니외다. 내 감사의 표시를 부디 받아주시오!”

그러더니 50대 초반의 남자가 머리를 아래로 숙이는 것 아니겠는가.

천하의 이시백마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몸이 굳었다. 방문 너머에서 손님을 안내해 온 윤시아도 얼굴이 벙쪘다. 모두가 예상외의 사태에 당황하는 가운데, 접견실 한편에 서 있던 장나래만이 한숨을 쉬었다.

“이럴 거 같아서 만나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씀드렸는데…….”

장나래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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