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70화
제10장 지상락원(地上樂園) (2)
3
새로운 술은 불티나게 팔렸다.
Weissenberg - MONSTER RUM.
이것이 매끈한 유리병에 붙은 라벨 딱지였다. 딱지를 디자인한 사람은 유현도였는데, 이시백이 상품을 보고서 질문했다.
“앞 글자는 뭐고 뒷 글자는 뭐냐?”
“앞 글자는 독일어로 하얀 산이라는 뜻이에요. 뒷 글자는 영어로 몬스터 럼이라고 읽어요. 처음에는 고블린 럼이라고 이름 붙이려고 했는데 그건 제가 싫더라구요.”
“그냥 한글로 적으면 될 것을 왜 굳이 코쟁이 놈들 언어로……. 게다가 독일어? 독일어는 왜 또.”
유현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외로 이런 곳에 센스가 없네요, 단장님. 이런 건 무조건 뭔가 있어 보이는 문자를 써줘야 돼요. 영어만 쓰면 또 싸구려 소리를 들으니까 프랑스어나 독일어를 써주면 좋다구요. 프랑스는 아무래도 와인 이미지가 강하니까 이럴 때는 독일입니다.”
“……그런 거냐?”
“그런 거예요. 제품 설명서까지 싹 다 영어로 적어야 한다니까요.”
유현도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단언했다.
현재 해상 운송은 극단적으로 제한되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기껏해야 황해와 대한해협, 동중국해, 타이완해협, 서필리핀해(남중국해)를 사수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필사적이었다.
이곳을 지켜야만 믈라카해협-안다만해-인도양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이 확보되었다.
동해는 만주가 함락되고서 포기되었으며,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과 미국도 태평양 항로를 포기했다.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이런 걸 믿을까.”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바닷길을 지키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는 이때, 영어권 국가에서 생산된 술이 들어오기란 제법 어려웠고 하물며 독일어권 술이 수입되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설령 수입된다 하더라도 값이 껑충 뛰게 마련. 약간 가격이 괜찮다 싶으면 어김없이 짝퉁이었다.
“단장님, 뭘 모르시는군요!”
유현도가 쯔쯧 하고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사람들이 술을 마실 때 알코올만 마시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은 분위기도 함께 마시는 거라구요. 단장님도 사케 드실 때 꼭 도자기잔으로 드시잖아요. 그거까지 전부 포함해서 주도(酒道) 아니겠어요?”
“음.”
“한글이 아니라 외국말로, 거기에다 영어뿐만이 아니라 웬 이상한 서양말로 적혀 있는 술병. 그 유리병을 개봉하는 설렘. 왠지 모르게 평소 마시던 소주나 맥주와는 차원이 다른 듯한, 느낌적 느낌. 여기서부터 이미 분위기는 달아오르는 겁니다!”
유현도가 열변을 토했다.
그 기세가 실로 범상치 않아 이시백조차 말문이 막혔다.
“물론 식품 위생법에 따라 한글 표시 사항이 들어가 줘야죠. 그건 스티커로 대신하는 거예요. 라벨이랑 분리해서, 마치 내가 원래는 한글은 취급하지 않는 곳에서 태어나신 양반이지만 까짓것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라준다는 느낌으로!”
“……그래, 주류 사업은 너한테 전부 맡기마.”
솔직히 이시백은 저게 당최 무슨 소리인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현도는 평양에서 오래 살기도 했거니와 비록 망하긴 했지만 밀주업을 일으켜 보았다. 아무렴 자기보다야 시장 사정에 밝겠지.
주류뿐만이 아니었다.
이시백은 마약에도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했다.
“……오크 창자에다 라블린시아를 슬라임이랑 같이 일주일 동안 절여요?”
“그다음에 햇볕에 바짝 말리고.”
“선배…… 드디어 미쳤어요?”
“일단 해보기나 해라.”
과거에 다른 용병단들이 개발해 내서 성공한 상품들.
이시백은 적어도 스무 종류의 레시피를 알고 있었고, 이중에서 다른 용병단들이 도저히 따라하지 못할 것들부터 제작했다.
어느 누가 고블린 귀지며 오크 창자와 같은 발상을 떠올릴까. 적어도 향후 2년 동안은 보안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이시백은 자신했다.
……전생에서는 고블린 귀지 럼주의 레시피가 폭로될 때까지 6년이 걸렸다.
당연하게도 동아시아 삼국의 사람들 전원이 경악했다. 판매량이 폭락할까 싶었지만, 어찌 된 노릇인지 오히려 레시피가 비밀로 감추어졌을 때보다 세 배 넘게 폭증했다.
인도와 서양에서도 맛을 보고 싶다면서 주문이 쇄도했다고 한다.
세상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선배, 이, 이건……. 마약이 아니라 예술이에요.”
“살짝 혀로만 피워도 느낌이 확 오지 않느냐.”
“오크의 창자가 대체 뭘로 이루어졌기에 이런 효과가……?”
“생명의 신비이지.”
“생명의 난센스예요…….”
유현도에서 이어서 윤시아마저 세계의 불합리함에 좌절.
마약사업은 전직 마약상의 심복이었던 그녀가 담당하게 되었다.
아울러, 판촉 사업은 순우경이 맡았다.
순우경은 용병단에서 그나마 나이가 제일 많았다. 창관의 지배인으로서 각계각층의 손님을 다뤄본 경험 또한 있었다. 판매처를 뚫고 광고를 퍼드리는 데 딱 제격인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백산 용병단은 창설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업무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총책: 용병단장 이시백.
-마약 부문 생산 지휘책: 자문사 윤시아.
-주류 부문 생산 지휘책: 선전 대장 유현도.
-현장 지휘책: 호위대장 순우경.
-운반 지휘책: 정식 단원 장나래.
물론 이외에도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이시백은 정식 단원을 모집하는 대신, 다른 소규모 용병단들에 일감을 맡기거나 일용직 헌터들을 고용했다.
이유는 단 하나. 점조직 형태로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였다.
생산의 효율은 떨어지지만 여차하면 얼마든지 도마뱀 꼬리 작전을 쓸 수가 있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불상사가 일어났다. 아무리 경찰들이랑 인맥을 쌓아둬도, 경찰 역시 공무원인지라 윗선의 압박을 강하게 받으면 실적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그때 점조직의 일부분을 선심 쓰듯 선물해 주는 것이었다.
“선배.”
그리고.
“돈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요…….”
이시백이 꺼내 든 레시피들은 여지없이 성공했다.
첫 달부터 순이익으로 4억 원이 들어온 것이었다.
마약 사업이나 주류 사업이나 빠르게 성공하기에 어려운 분야였다.
구매층은 이미 기존의 상품들에 익숙해져 있었고, 판매자들은 성공이 보장된 품목만을 유통했다.
괜히 상품의 종류를 늘리겠답시고 새로운 라인을 뚫었다가 경찰에 뒷목을 붙잡히면 골치가 아팠다.
무조건 라인을 늘리기보다는 믿음직스러운 라인을 두 곳에서 다섯 곳쯤 확보해 둘 것.
만약에 집중 단속이 떠서 라인들이 전부 날아가 버릴 경우를 대비해서, 2차 예비 라인을 두 곳 정도 알아둘 것. 이것이 마약상과 밀주상의 기본 정책이었다.
이 같은 라인들이 저절로 암묵적인 카르텔을 형성했다. 즉, 마약과 주류에서 새로운 업자가 상품을 널리 공급하기란 매우 까다로웠다. 2년, 3년에 걸쳐서 이쪽 업계의 신뢰를 쌓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수금권을 미끼로 쓰길 잘했군.’
이 점에 있어서도 이시백은 지름길을 이용했다.
이시백은 자그마치 450억 원어치의 수금권을 거대 용병단들에 뿌렸다. 당연하게도 이 용병단들은 휘하에 수많은 업소와 업자들을 두고 있었다.
이시백은 그들과 담판을 지었다. 수금권을 건네주는 대신에 ‘수금권의 1/20에 해당하는 상품을 매입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예컨대 붉은 처녀 용병단은 백산 용병단으로부터 300억 원 상당의 수금권을 받았다.
고로, 붉은 처녀 용병단은 300억 원의 1/20인 15억 원을 백산 용병단에게 반드시 써줘야만 했다. 이걸 물량으로 따지면 ‘몬스터 럼’을 무려 수만 병이나 매입해야 하는 것.
‘그만한 물량을 자기들끼리 감당할 수 없을 테니 당연히 하위 조직들한테 떠넘겼을 테고.’
백산 용병단에서 거대 용병단들로.
거대 용병단들에서 다시 중소 규모 용병단들로.
중소 규모 용병단들은 각자 자신들이 소유한 업소로.
평양의 모든 가게와 업소로.
술집으로.
창관으로.
노래방으로.
마약상으로.
유람선으로.
레스토랑으로.
갑작스럽게, 평양의 온갖 업소에서 백산 용병단이 생산해 낸 상품이 진열된 것이었다.
이건 꼼수에 불과했다. 당장 사업의 초기 난관을 극복하고 시원하게 출발했지만, 어차피 거대 용병단들이 뒤를 봐주는 것은 여기까지.
바로 다음 달부터는 거대 용병단들을 통해서 판매처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시백은 확신이 있었다.
‘일단 한 번 맛을 보면 반드시 다시 찾게 된다.’
상품이 먹혀들 것이라는 확신이.
요컨대 이시백의 생각은 ‘뭣 하러 힘들고 어렵게 수년에 걸쳐서 판매처를 뚫느냐’였다.
일단 손님들이 물품을 찾으면, 판매상들은 귀찮더라도 이쪽을 찾아오게 되어 있었다.
자고로 생산이란 판매상들이 알아서 고개를 숙여줘야 장사하는 맛을 느끼는 법.
그리고 이시백의 계산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선배, 오늘도 점심에 청어람 용병단과 약속이…….”
“대동강구역 마약상 연합이라는 곳에서 뵙자고 하는데요.”
“호화 유람선 초대권이 와버렸어요. 거기서 뵙자고…….”
만남 약속이 쇄도했다.
손님들의 열렬한 반응을 접하고 판매상들은 귀신처럼 돈 냄새를 맡았다. 여기에 유통업자들도 가세했다. 백산 용병단은 평양에 새로이 등장한 신성이었고, 이는 아직 사업 파트너가 부재한다는 뜻이었다.
“이시백 단장님, 이건 기회입니다. 저희와 손을 잡으면 떼돈을 벌 수 있습니다.”
“단장님, 여기저기서 많은 얘기를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평양이 믿음직스러운 동네가 아닙니다. 반면에 저희가 지금까지 쌓아온 실적을 보시면…….”
“계약만 해주십시오! 어떤 일이든 진행할 때마다 단장님의 허가를 받겠습니다. 연락과 허락이야말로 저희의 기본 정책입니다.”
수많은 러브콜이 쏟아졌다.
3층에 마련된 접견실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니, 1시간이 멀다 하고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폭발적으로 늘어난 스케줄 때문에 자문사이자 이시백의 비서였던 윤시아만 눈이 팽글팽글 돌았다.
“서, 선배. 웬만한 인재 아니고서는 정식 단원으로 안 들이는 선배의 성격을 알고는 있는데, 어떻게 비서만이라도 새로 들여 주시면 안 될까요……? 저 오크 창자도 관리해야 해서 정말로 바쁜데.”
“상황 봐서.”
“꼭이에요. 꼭 신입 한 명 뽑아주세요. 요즘은 선배랑 쿵짝거릴 기력도 없다구요…….”
아무래도 열여섯 살 소녀에게는 너무 터프한 업무량이었다.
웬만하면 애인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이시백이었지만, 솔직히 누구를 써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이시백이 평양에서 거둬들이고자 마음먹었던 인재는 유현도와 장나래가 전부였다. 이외에도 유능한 인재는 많았으나 결정적으로 ‘인격’이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써버려서는 사자의 심장에 벌레를 내버려 두는 꼴.
“흐으음.”
이시백이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품속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었다. 이시백은 휴대전화를 네 대씩 가지고 다녔다. 이번에 울린 휴대전화를 보면서 이시백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이시백이 헛기침을 몇 번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전화를 받았다.
“이거, 차수현 팀장님. 아니. 이제 대장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합니까?”
이 휴대전화기는 오직 광역수사대에만 통하는 도구였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기 너머로 묘하게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 아직은 진급 예정자에 불과합니다. 대장이라니요. 당치도 않죠.
“하지만 반쯤 확실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리 축하의 말씀을 전달하는 기쁨을 저에게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전히 이시백 단장님께서는 능숙하시군요. 칭찬을 하셔도 솔직하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귀중한 재능이지요, 그거. 저도 배우고 싶습니다.
의례적인 덕담이 오갔다.
이시백이든 차수현이든 고수였다. 서로의 카드패가 빤히 보이는 상태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느낌이라, 솔직히 이시백으로서는 약간 재밌기까지 했다.
“여러모로 바쁘실 광수대 팀장님께서 무슨 일이신지?”
-저번에 장대호 판사의 따님을 구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판사님께서 개인적으로 용병단장님을 찾아뵈어서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장나래의 부친을 뜻했다.
이건 이시백도 의외였다. 부장 판사나 되는 양반이 일부러 부산에서 평양까지 올라오려 하다니.
설마 헌터를 인간으로 취급해 주는 성인일 리는 없으니, 아마도 가출해서 뛰쳐나간 딸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것이리라.
문제는 얼마나 부장 판사의 안전이 확보되느냐였다.
평양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고위 공무원이 마음 놓고 돌아다닐 동네가 아니었다. 이걸 빌미로 잡혀서 부장 판사가 행여라도 납치당하면, 괜히 이시백이 독박을 뒤집어쓸 수 있었다.
이시백은 퇴로를 확보해 두자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저야 물론 환영합니다. 다만 이쪽 동네의 치안이 좋지 않아서 걱정이군요.”
-아, 당연하죠. 그래서 호위는 저희 쪽에서 붙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이시백이 잠깐의 침묵을 거쳐서 반응했다.
그는 왜 갑작스럽게 부장 판사가 평양까지 내려오는지. 또 왜 차수현이 일부러 호위까지 붙였다고 고지했는지 감이 잡혔다.
-예에, 모쪼록 저희 호위를 잘 살펴주십시오. 하하. 앞으로는 이시백 단장님의 연락책을 그 아이가 담당할 예정입니다.
호위를 명목으로 이쪽에 첩자를 심어두려는 것.
이시백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프락치로군.’
드디어 올 것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