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68화
제9장 쓰레기통에 피어난 장미꽃 (8)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모르지 말고 확실하게 알아둬. 진짜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이시백이 차분함을 유지했다.
상대방은 완전히 정신병자를 바라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감정 표현이 상당히 다채로운 여자였다.
만일 과거에 그 보고서를 읽지 않았더라면, 이시백도 이쯤에서 사과하고 물러났으리라.
“하지만 진심입니다. 리을령 소좌님.”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무너졌을 때, 북방의 인민들은 남조선이 도와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당연합니다. 같은 핏줄을 안고 태어난 동포 아닙니까.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북방은 버려졌다…….”
리을령 용병단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거의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반도의 북방이 버림받은 땅이 된 데에는 지난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지나치게 복잡한 역사는 망각되고 단순한 결과론으로 왜곡되었다.
‘남방이 북방을 버렸다.’
이 짤막한 문장. 단 아홉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은, 50페이지짜리 역사학 논문과 500페이지짜리 역사학 서적을 월등하게 압도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선동질이라 매도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편견과 왜곡이라 경멸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바로 그것을 정치라고 정의했다.
명백하게도 이시백은 지금 정치를 하고 있었다. 결코 학문이 아니라.
“북방은 지금도 여러 세력으로 찢어져 있습니다. 평양이니 개성이니 원산이니, 굳이 도시 단위를 언급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당장 이곳 평양만 해도 열 명의 장군과 백 명의 졸개가 난립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구심점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리을령 용병단장이 가만히 이시백을 노려보았다.
상대방이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눈초리였다.
그러나 누군가를 쳐다보는 자는 또한 동시에 보이게 마련. 이시백 역시 리을령의 진심을 재고 있었다. 이시백은 그녀가 당황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여기 사람들은 절대다수가 과거 공화국 출신과 조선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머지 잔챙이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들만 하나로 모은다면. 그들의 소망과 욕심을 채워줄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북방은 안정을 되찾을 겁니다.”
“무슨 수로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데?”
좋다.
걸렸다.
이시백의 마음속에서 어떤 짐승이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수풀에 매복한 표범이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처럼, 이시백의 근육과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이시백은 잔뜩 기세를 갈무리했다. 절대로 조급함을 내풍기지 않았다.
일격.
일격필살(一擊必殺).
자신의 살기를 억누르고, 이시백이 덤덤하게 얘기했다.
“어떤 한 사람의 군인이 있습니다.”
“……?”
“조부는 몬스터 떼거지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만주에서 전사했습니다. 부친은 김 씨 일가의 핏줄을 끝까지 지키다가 원산에서 명예롭게 전사했습니다. 오로지 조국과 동포를 위하여 혈투를 벌인 이 군인가문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민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리을령 용병단장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이시백이 누구를 말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만약에 수령 동지의 후손이 살아 있었다면 보다 쉽게 나라를 재건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김 씨 일가는 멸문했습니다. 리을령 소좌님. 현 상황에서, 저는 오직 소좌님만이 구심점이 될 수 있다 믿습니다.”
“…….”
리을령 용병단장이 침묵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이시백은 당혹을 감지했다.
이시백은 그리고 왜 리을령이 당황하는지 잘 알았다.
오늘 처음 본 남자가 자신한테 별안간 국가 재건을 제안해서? 아니다.
자기가 사병집단을 거느렸지만 통치자가 되기엔 역부족이라서? 아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였으며.
지금 시점에서는 리을령을 제외하고 아무도 모르는 이유였다.
‘귀한 보물처럼 숨겨두고 있겠지, 소좌.’
이시백이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련님을 애지중지하게 숨겨두고 있을 게야.’
리을령을 당황하게 만든 문장은 다름 아니라 ‘만약에 수령 동지의 후손이 살아 있었다면’.
그렇다.
눈앞의 여자는 김 씨 일가의 마지막 후손을 품에 안고 있었다.
김일성부터 시작한 독재자의 혈통. 반백 년 전에 유실되었다고 알려진 핏줄을, 리을령 소좌의 가문은 대대로 보호하고 있었다.
다만 아무도 모를 뿐이었다.
리을령 소좌의 부하들조차.
‘괜히 단원들이 인민군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아니지.’
애시당초 리을령 소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재건을 꿈꾸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부친도, 조부도 똑같았다.
그들이 ‘강성대국’이라 불렀던 독재국가가 다시 한 번 들어서는 것.
금수산태양궁전의 꼭대기에 다시 한 번 홍람오각(紅藍五角)별기 당당하게 휘날리는 것.
이것이 리을령의 가문이 50년이 넘도록 열망해 온 숙원이었다.
‘그야말로 골수 빨갱이들이다.’
용병단은 단순히 세간의 이목을 속이는 수단에 불과했다.
붉은 처녀 용병단이 평양에서 무기밀매 사업을 독점하는 까닭은, 만약의 사태에 직면했을 때 빠르게 군대를 조직하기 위해서. 이 용병단의 단원들은 평범한 헌터가 아니라 여차할 경우 곧바로 군조직으로 변화할 ‘예비 군사’였다.
‘그만큼 전투력은 다른 조직에 비해서 압도적.’
과거에 유현도가 어떻게 이 비밀을 알아냈는지는, 이시백도 몰랐다.
단지 보고서를 읽으면서 아직도 공화국의 재건 따위를 진지하게 바라는 빨갱이들이 있었느냐며 감탄하기만 했다.
정작 붉은 처녀 용병단은 평양을 점령하자마자 유현도의 계략에 빠져서 공중분해 되어버린 것이었다.
과거의 망령.
혈통을 확보했을 뿐, 그 병력은 백 명도 안 되는 사병집단.
‘자아. 반응을 보여라, 리을령.’
하지만 이시백은 눈앞의 여자에게 이용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리을령 용병단장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어, 애송이.”
“이해해 주신 것입니까.”
“그래, 네놈이 얼빠진 정신병자라는 걸 아주 잘 이해했지.”
리을령 용병단장이 입가를 이죽거렸다.
“공화국을 재건해? 이 평양에서? 미친놈. 우리가 인민군처럼 돌아다니는 건 일종의 정치적인 제스처야. 멍청한 인민들은 우리 복장을 보고 좋아해 준다고. 단지 옛날에 이 지역을 점령했던 국가의 군복이랑 똑같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
리을령은 지금 거짓말하고 있었다. 목적은 하나뿐이겠지. 이시백의 진심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시백은 침착하게 반론을 준비했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야. 김일성 이름도 모르는 애새끼들이 태반인데, 푸하핫. 재건은 무슨. 물론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공화국의 열성당원이었지. 거기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있어. 덕분에 내가 그 이름값으로 먹고살고 있으니까.”
“…….”
“뭔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니 확실하게 말해줄게. 신입 또라이 양반. 나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주체사상인가 뭔가 하는 골동품에도 관심이 없어. 국가 따위에는 더더욱 흥미가 없고. 미안하지만 집주소를 잘못 짚었어요.”
리을령 용병단장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확실히 리을령의 연기는 괜찮았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이시백에게 있어, 리을령 용병단장의 반응은 다소 어눌한 즉흥연기로밖에 비추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엉?”
“정치적인 제스처. 그걸로 충분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이시백은 지금이 기세를 몰아 공격할 때임을 직감했다.
“저는 고아원 출신입니다. 초등학교도 안 다녔습니다. 일본어도 중국어도 한마디 못합니다. 모험자들의 보고서를 제외하고는 읽은 책도 없습니다. 무식한 새끼이죠. 당연히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릅니다.”
“하아? 그런데 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소좌님. 바로 조금 전에 소좌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멍청한 인민들은 군복만 똑같아도 지지를 보낸다’라고. 제가 바로 그 멍청한 인민에 속하고, 제가 꿈꾸는 나라도 바로 그 멍청한 인민들이 주인이 되는 국가입니다.”
“…….”
“이데올로기는 고루한 사상가들한테나 맡겨 주십시오. 저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순수성 같은 것은 개먹이로 던져 주라지요. 이 미친 듯이 분열된 북방에 하나의 구심점이 마련될 수만 있다면, 나라가 진짜 공산주의 국가이냐 아니냐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이시백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열변을 토했다.
“소좌님,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스무 살짜리 애송이의 미친 소리라고 넘겨들어도 좋습니다! 앞으로 저를 영원히 안 보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십시오. 지금처럼 평양이 악의 소굴로 남아도 소좌님은 괜찮습니까?”
“…….”
“고아들이 몸을 팔고, 아이들이 마약에 빠져 살고, 사람들이 하루 일당을 전부 담배와 술에 쏟아붓고, 하루하루 단지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지금 이 풍경이 소좌님께는 만족스럽습니까.”
이시백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손님인 이시백이 주인인 리을령한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자리를 박찼다. 대단히 큰 실례였다. 하지만 분위기가 과열된 이 접견실에서, 이시백의 행동은 무례가 아니라 도리어 정당한 항의처럼 비추었다.
“만일 그렇다면, 소좌님과 저는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될 수 있겠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쪽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결단코 다시없을 것입니다.”
“…….”
“저는 부산 경찰에 끈이 있습니다. 이 자그마한 끈을 만들기 위해서 몇 년 동안이나 개고생을 했습니다. 아직 미약합니다만, 부산 광수대의 헌터 범죄 수사팀 정도는 제어할 수 있습니다. 소좌님께만 말씀드리자면, 개성에서 장기밀매 사태를 일으킨 내부 고발자도 저입니다.”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였다.
사람들은 전제가 진실이면 결론도 진실이라 믿는 경향이 있었다.
하나의 거짓말을 성립시키는 데 가장 유효한 방법이 하나의 진실을 제시하는 것. 이시백은 이걸 경험상 숙지하고 있었다.
“의정부의 마약상을 고발한 사람도 저입니다. 소좌님 정도 되는 분이라면 경찰과 검찰에 따로 인맥을 갖고 계시겠지요. 얼마든지 확인해 보시길 부탁드립니다. 단, 마약상 건은 경찰도 검찰도 자료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의정부 청사에 직접 알아보는 편이 확실하겠지요.”
“……그런 걸 나한테 전부 알려주는 이유는 뭐야?”
“제가 단순한 스무 살짜리 애송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주십시오.”
이시백이 포도주와 사케가 든 선물봉투를 집어 들었다.
“저는 중앙 정부의 경찰과 커넥션을 만들기 위해 수년이나 공을 들였습니다. 이번 평양 사건은 첫 번째 열매가 열린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광역수사대는 저를 든든한 아군으로, 정확하게는 호구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호구의 다른 말은 이중간첩이지요.”
“…….”
“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이제 온전히 소좌님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리고 이시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접견실을 나갔다.
이시백을 제지하거나 나무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접견실에 홀로 남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연초를 피우는 여인만이 남았을 뿐.
“…….”
잿빛 연기가 천천히 방 안의 천장을 향해 올라갔다.
그 후, 리을령 소좌는 한 시간이나 꼼짝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