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63화
제9장 쓰레기통에 피어난 장미꽃 (3)
3
인간이 무언가에 대해 변명할 여유가 있는가, 없는가.
이것이 시대가 얼마나 진흙탕에 떨어졌는지 가늠하는 기준이었다.
“광수대에서 대체 무슨 변명을 입에 담을지…….”
“아직 선거가 멀긴 해도 선전용 행사가 아닐까.”
이날, 평양의 브리핑 룸에는 마흔 명이 넘는 기자가 모였다.
이미 문명은 쇠퇴하고 있었다.
조금 더 냉소적인 사람이라면 ‘인류가 쇠퇴했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
냉정하게 말해서 현 인류는 더 이상 지구를 지배하지 않았다. 새로운 만물의 영장은 몬스터였다. 이제 슬슬 인류는 자신이 구시대의 산물이란 걸 인정하고 후발 주자한테 바통을 넘겨줄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처럼 자조 섞인 비웃음이 공공연하게 흘렀다…….
“선거용은 아니야. 사전에 계획되지 않은 습격이라고.”
“계획도 없이 일개 광수대가 평양을 흔들어? 으이구, 말이나 되냐.”
달리 말하면, 농담을 입에 담을 정도로 인류는 여유로웠다.
아직은 입꼬리를 비틀어 인류와 정부를 비아냥거릴 힘이 있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브리핑룸에 기자들이 모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천연덕스럽게도 사람들은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은 알 권리를 가진다’라거나, ‘민주주의의 성패는 얼마나 정확한 정보가 유권자에게 전달되느냐에 달렸다’라거나, 꽤 거창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당장 브리핑실에서 벗어나 반경 1㎞만 살펴봐도, 13살짜리 여자애가 화대를 받으며 몸을 팔고 있었다. 더불어서 시민권도 없는 고아였다. 이런 시대에도 유권자란 개념이 통용된다는 사실에 지긋지긋함을 느끼는 기자들도 분명 있으리라.
“아니, 정말이라니까. 생각해 봐. 아직까지 정부 측 발표가 없어. 광수대가 먼저 발표를 내기까지 기다리겠다는 거잖아. 이게 정부 쪽 프로파간다라면 왜 공로든 책임이든 전부 광수대한테 떠넘기는 연극을 펼쳐?”
“……글쎄. 과일은 정부가 먹고 매는 광수대한테 떠넘기는 걸 수도 있지.”
“그렇게 뻔한 속임수에 평양의 용병단들이 넘어가 준다고? 하, 정부의 두개골에 똥덩어리가 가득 차지 않은 이상에야 설마 그런 기대를 할까.”
기자들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막은 모르겠어도 여하간 특종은 특종이었다.
성질 급한 기자는 벌써부터 「중앙정부, 범죄의 세계에 드디어 선전포고하다!」와 같은 기사 제목을 메모장에 써두었다. 만일 이번 광수대의 습격이 선전포고를 의미하면 오늘 밤 TV를 점령할 주제는 이미 정해졌다.
광역수사대의 차수현 팀장이 브리핑룸에 걸어 들어왔다.
“어이, 온다.”
“드디어 행차하시는 거냐. 보무도 당당하군 그래.”
기자들이 잔말을 뱉어냈다. 그러면서도 셔터 찬스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사진기를 꺼내었다. 창백한 빛이 동시에 마구 터졌다. 차수현 팀장은 빛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수사 결과의 발표가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부산 지방 경찰청 광역 범죄 수사 계장, 차수현 경정입니다. 지금부터 평산에서 있었던 일련의 납치극에 대하여 경찰 수사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랜만에 특종을 잡았나 하고 전국에서 몰려온 기자들은 실망했다.
차수현 팀장이 발표하는 내용은 너무나 시시했다. 결국에는 단순한 납치극에 불과했다. 성공한 납치극은 좋은 뉴스였으나, 실패한 납치극만큼 하품이 나오는 소재도 없었다. 시청자들은, 구독자들은 조금 더 자극적인 걸 원했다.
“납치범의 배후에 어떤 세력이 없습니까? 공범 조직에 대한 수사가 벌써 끝났습니까?”
발표가 끝나자마자 질문이 거세게 튀어나왔다.
‘악의 제국’이라든지. 옛날에 멸망한 줄 알았던 북한식 공산주의자가 현 정부에 복수하기 위해서 고위 공무원의 납치를 시도했다든지. 하여튼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문구가 한 문장이라도 필요했다. 기자들은 회사 돈을 써 가며 평양까지 왔다. 밥값은 해야 할 거 아닌가!
“발표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번 사건의 배후 세력은 공손범을 위시한 일단의 용병단입니다. 이들은 수사 초기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부산일보입니다! 평양의 용병단들은 자체적으로 10인 위원회를 운영하며 파벌 간의 연계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단 한 군데의 용병단만이 범죄에 연루되었다고 단언하는 증거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일부러 부산일보라고 소속을 밝혔다.
기자들도 멍청이가 아니었다. 게으름뱅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경찰들이 발표를 준비하는 동안, 기자들은 평양에서 난동을 피운 장본인이 과연 누구인지 빠르게 조사했다.
차수현(車洙弦).
새파란 나이인데도 벌써 광역수사대 팀장이었다.
아직은 경정(제5급)에 불과했지만 보나마나 총경(제4급)에 오르겠지. 잘만 하면 경찰의 꽃이라 불리는 경무관(제3급)을 노려볼 법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인맥이 거의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부산일보는 지역신문이었다. 지역의 유지들이 언제나 이용하는 창구와 비슷했다. 부산일보에서 안 좋은 얘기를 흘리면 곧바로 유지들한테 전달되었다. ‘나중에 승진 꼬이기 싫으면 어서 기삿거리를 내놓아라!’ 기자는 그렇게 협박하고 있었다.
“예, 시간입니다.”
-물론.
차수현 팀장은 그런 협박에 코웃음이라도 치면 다행일 위인이었다.
“시간이라니요?”
“공손범 일당이 정보를 접수하고 움직이기까지 17시간이 걸렸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히 짧은 시간입니다만, 실제로 조직원이 소집된 것은 더합니다. 정보를 입수하고서 고작 3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공손범 일당은 범행에 필요한 인원을 모두 구했습니다.”
차수현 팀장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피곤에 지친 직장인의 미소 같기도 했고, 우둔한 상대한테 날리는 비웃음 같기도 했다.
“단적으로 말씀드려서 3시간 이내 평양의 다른 용병단들과 협력 체계를 갖추기란 불가능합니다. 연락이나 주고받았을지 의문입니다. 수사 도중에는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본관을 비롯하여 수사팀 전원은 이번 범행이 공손범의 단독 지시로 이루어졌다고 확신합니다.”
“확신이라니…….”
기자들이 술렁거렸다.
본래 수사 발표자는 무엇이든 확정해서 말하지 않았다.
단독 범행임을 확신한다고 발표해 봐라. 나중에 재수사가 들어갔더니 공범이 발견되었다. 이래서야 어머나, 죄송합니다 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승진길이 막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찰이라는 조직 전체에 먹칠을 해버렸다.
세상에는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직업이 두 개 있었다. 바로 중학생과 정치인이었다. 다행히도 차수현 팀장은 중학생도 정치인도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사회인답게 확언을 삼가야 했다.
그런데도 ‘불가능’이라느니 ‘확신’이라느니 요란한 단어를 바겐세일로 퍼부었다.
‘역시 정치적인 사건이로군!’
‘젠장, 윗선이 어디야. 어디까지 사건이 걸린 거냐?’
정답은 간단.
이번 납치극은 <진실 따위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사건>이었다.
나중에 진실이 어떻게 밝혀져도 상관없었다. 공범이 있든 없든, 역시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상부에서 공범이 없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결정 사항. 이건 이미 범죄 수사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적인 영역으로 넘어갔다.
‘설마 부산과 평양이 사전에 미리 약속해 둔 연극?’
‘의회 쪽이냐, 아니면 검찰 쪽이냐. 판단할 재료가 아예 없군…….’
‘아니, 고위 공무원의 자제가 평양에 있었다는 것부터 의심스럽다. 애초부터 짜고 친 고스톱일 가능성이 높아. 그런가. 공손범은 희생양인가.’
사회부 기자들과 정치부 기자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몇몇 사람 머릿속에서 사건은 정치인과 용병단장 사이의 더러운 거래로 발전했다. 중앙 정부는 평양의 용병단 하나를 잡아서 체면을 살린다. 평양은 뒷거래로 이권을 챙긴다. 여기에 법원과 경찰이 들러리까지 서주면 금상첨화.
“쯧, 강하게 나오는 데 다 이유가 있었군.”
무심코 어느 기자가 신음을 뱉었다.
“이 구렁이가 어디까지 이어졌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워버리는 꼴이 될 수 있겠어…….”
주변에서 다른 기자들이 성대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먹음직스러운 기사 하나 얻겠답시고 빈대를 건드렸다가는 권력자들의 미움을 살지도 몰랐다. 이렇게 현황을 인식하고 나니,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진실들이 있었다.
왜 하필 다른 고위 공무원이 아니라 판사의 자제가 납치될 뻔했는가? 그건 이 사건에 경찰뿐만이 아니라 법원마저 협력하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요컨대 언론에 대한 위협사격이었다.
“정치인, 법원, 경찰까지 한꺼번에 상대하라고? 웃긴 농담이야…….”
“거기에다 용병단들까지 끼었지. 나는 여기서 포기하겠어.”
“암, 목숨이 한 다발로 있어도 모자랄걸.”
이 순간, 언론사 전체가 사건을 포기했다.
일부 눈치 없는 신입들이 차수현 팀장한테 질문 공세를 펼쳤다. 베테랑들은 혈기왕성한 신입들을 불쌍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사회부나 정치부에서 조금이라도 경력을 쌓았다면 방금 차수현 팀장이 얼마나 강경하게 위협했는지 이해했으리라.
아마도 저 신입들은 어딘가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적히겠지. 심하면 뒷조사가 들어갈 수도 있었다.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 질문은 이만하고 물러나겠습니다. 다음 차례로 민간 협력 단체의 대변인께서 이번 납치극에 대해 회견을 밝혀 주시겠습니다.”
차수현 팀장이 형식적으로 인사를 끝내고 걸어 나갔다.
민간 협력 단체, 라고 말해 본들 기자들은 어떠한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정부에서 고용한 용역이겠지.”
“보나마나 사회 정의니 뭐니 그럴듯한 얘기만 떠들걸. 내기해도 좋아.”
기자들의 불성실한 조롱 속에서, 브리핑 룸에 한 여인이 걸어왔다.
기자들은 잠시 대변인의 외모에 눈길이 빼앗겼다. 아름답게 염색된 백금발이 눈에 띄었다. 웬만해서는 소화할 수 없는 색깔의 머리카락을, 여인은 간단하게 소화했다. 혹시 외모로 대변인을 뽑았나 싶을 정도였다.
여인이 바로 섰다.
“백산 용병단의 선전대장 유현도입니다.”
여인이 입술을 열었을 때, 기자들은 더 감탄했다.
단순히 예쁜 게 아니라 아름다웠다. 눈동자가 맑았고 옷차림이 단정했다. 목소리에도 뻐기는 느낌이 없었으며, 발음이 무척 또박또박했다. 기자들은 뜻하지 않게 눈호강을 즐기는 한편 동시에 ‘역시 정부 쪽에서 사람을 준비했구나’라고 다시금 확신했다.
“경찰의 수사는 오늘로 마무리되고, 지금 이 시각을 기해서 본 사건은 저희 백산 용병단이 인계를 받습니다. 단지 범죄. 그것도 범인이 토벌된 범죄에 왜 추가적인 인계가 필요한지, 그것도 왜 하필 민간 조직이 인계를 받아야 하는지 의아스러울 분이 많을 것입니다.”
유현도가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때 기자들은 그녀의 두 손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여인은 지금 준비된 대본 없이 입장을 밝혀 나가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 범죄에는 범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현도가 기자들의 얼굴을 천천히, 한 명씩 쳐다보았다.
“범죄 제보가 있기 전에 어떠한 치안 조직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습니다. 납치와 폭력, 심지어 살인이 일상화된 이곳 평양에서 지역의 경찰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납치극은 첫 번째로 헌터의 잘못이고, 두 번째로 용병단의 잘못이나, 세 번째로 치안 조직의 잘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점에서 ‘평양이라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범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렇기에 이 범죄의 수사에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끝을 고하는 것은 평양 전체가 새로운 도시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백산 용병단은 천 리도 한 걸음부터, 라는 오래된 격언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첫 번째 잘못. 즉, 헌터의 잘못부터 시정해 나갈 것입니다.”
기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유현도는 목소리가 진지했다. 정반대로 기자들의 표정은 한없이 가벼웠다.
거 봐라. 또 틀에 박힌 정의 운운이다.
평양을 새로운 도시로 만들겠다니, 뻔뻔한 말에도 정도가 있었다. 그런 이상론은 일곱 살 꼬맹이도 믿지 않았다. 기자들은 유현도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즐겼지만 그 내용은 무시하기로 합의했다.
어차피 기사에도 써먹지 못할 이야기.
“백산 용병단은 헌터의 이미지를 쇄신할 것입니다. 앞으로 백산은 일개 용병단이 아니라 하나의 브랜드로서. 새로운 헌터들을 대표하는 집단의 명칭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그 끝에 평양이 있습니다. 우리는 백산 용병단이 평양에 봉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평양 자체가 달라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기이한 광경이라고 해야겠지.
본디 사회를 위해 일해야 할 기자들은 있지도 않은 정치적 허상에 잠겨서 주판을 튕기고 있었다. 반면에, 큰소리로 사회를 울부짖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밑바닥 중에서도 밑바닥인 헌터였다.
“오늘은 그러므로 평양의 범죄에 대한 ‘무제한적인 선전포고’의 날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민들이 정부의 도움 없이도 자력으로 범죄를 자정할 수 있다는 각오이자 결단의 날이기도 합니다. 시민 여러분, 부디 이날을 기억해 주십시오. 저희 백산 용병단은 내일의 신뢰를 위해 오늘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겠습니다.”
유현도가 머리를 깊이.
그야말로 깊이 숙였다.
그녀가 밤을 새워서 작성한 연설문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안타깝게도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박수도 없었다. 호응도 없었다. 기자들은 기껏해야 동료 기자들과 두런두런 잡담을 나눌 뿐이었다.
유현도는 반응에 실망하지 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브리핑실을 떠났다.
이날 민간 협력 단체 백산 용병단의 회견문은 아예 기록되지도 못했다.
마흔 명 넘게 모여든 기자 중에 누구도 타자기를 두들기지 않은 것이었다.
역사에도 남지 않은 말.
온갖 정치적인 역학 관계와 변명이 진창처럼 들이찬 그 속에서 백산 용병단은 처음으로 공식적인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조용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