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달의 제국-58화 (58/142)

건달의 제국 58화

제8장 빌어먹게 아름다운 도시(7)

6

사채업자 박상현은 뜻밖에도 빨리 장나래를 찾았다.

“상현 형님, 찾았습니다.”

쉰 명에 가까운 조직원이 동원되어서 평양을 이 잡듯이 돌아다녔다. 정작 장나래는 자기가 자주 들리는 술집에 틀어박혀 있었고, 탐색은 시작한 지 15분 만에 끝났다. 박상현은 부하의 보고를 듣고 곧장 술집으로 향했다.

아직 대낮이었기에 술집은 썰렁했다. 장나래만이 구석에 앉아서 맥주를 연거푸 들이마셨다. 마시는 속도를 보아하니 박상현이 오기 전에 이미 적어도 여덟 잔쯤은 비운 것 같았다.

“이봐, 술고래 아가씨.”

“…….”

장나래가 흘낏 박상현을 노려보았다.

박상현은 허락을 받지 않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맥주를 시켜서 한동안 묵묵하게 술만 마셨다.

솔직히, 박상현은 연기에 서툴러서 이런 종류의 수작을 잘해낼 자신이 없었다. 알코올의 힘이라도 빌려야지.

“방금 소식을 들었어.”

“뭐?”

“개성에 팔려 간다면서.”

장나래가 침묵했다.

“너희 아지트에 갔더니 웬 남자가 이억을 떡하니 넘겨주던데. 나야 돈놀이하는 놈이니까 그 돈이 어디서 왔는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그런데 유현도의 상태가…….”

“닥쳐.”

장나래가 중얼거렸다. 취했군 하고 박상현이 생각했다. 장나래는 채권자인 자신에게 거칠게 군 적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즉, 박상현은 더 이상 채권자가 아니게 된 것이었다. 거기서 묘한 서운함을 느꼈다.

‘돈 장사가 다 이렇지 뭐, 어휴.’

돈을 빌려주었을 때는 사람들이 얼마나 친절하게 대접해 주는지, 그만 절친한 친구라고 착각할 만했다. 하지만 돈을 다 갚고 난 다음에는 태도가 돌변하여 박상현을 원수 정도로 취급했다. 실제로 박상현은 면전에서 상대방이 침을 뱉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유현도는…….’

유현도는 다를 것이었다.

채권자든 아니든, 빚이 있든 없든, 똑같은 태도로 자신을 대하리라. 왠지 모르게 박상현은 그런 확신이 있었다. 그런 확신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가 유현도에게 있었다.

세간에서는 그걸 조금 모자란 사차원 머저리라고 부르겠지만.

“장나래, 내 얘기를 잘 들어봐. 난 네 신경이나 긁으려고 찾아온 게 아니야. 지금 막 보스와 담판을 짓고 오는 길이라고.”

“보스? 아저씨한테 무슨 보스가 있는데.”

“공손범(公孫範).”

평양에서 제일가는 사채업자의 이름이 등장하자 장나래가 멈칫했다.

단순히 사업만 거대한 사채업자가 아니었다. 도시의 자치 위원회에서 11명의 의원 중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건 평양에서 제일 잘난 인간을 순서대로 뽑았을 때 공손범의 이름이 아무리 못해도 15명 안에 들어간다는 걸 의미했다.

반도에서 부산이 겉면의 수도라면 평양은 어두운 면의 중심지.

공손범의 이름은 함부로 혓바닥에 올려도 될 물건이 아니었다.

“대단한 뒷배를 가지고 있네, 아저씨.”

장나래가 빈정거렸다.

“그리 대단한 분께서 나에게는 무슨 볼일이래.”

“그러니까 내 얘기를 잘 들어보라는 거야. 솔직히 나는 너희 의용단이 빚을 갚으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어. 양조장이 망하고 나서 아예 기대를 접어버렸지. 내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빚을 갚으려 들어야 하지 않겠어?”

박상현이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서 얘기했다.

진실을 9할로 내버려 두고 거짓을 1할만 섞는다는 원칙에 박상현은 충실했다.

“너희 대신에 빚을 갚아줄 사람이 어디 있나 없나 찾아봤지. 2억이 누구 개 이름도 아니고 쉽게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말이야. 장나래, 너 판사댁 따님이라면서.”

“…….”

장나래가 불쾌한 기색을 풀풀 내풍겼다. 가문을 들먹이는 것은 장나래의 역린을 건드리는 짓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박상현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해 나갔다.

“마침 우리 보스가 부산에 인맥을 만들고 싶어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거든. 그래서 내가 막후 협상을 진행했어. 나래 네가 보스의 용병단에 입단하는 조건으로 모든 빚을 탕감해 주기로.”

“하, 사전에 나랑 상의하지도 않고?”

“어디까지나 너희가 빚을 갚는 데 실패했을 경우.”

박상현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런 경우에만 도움이 되라고 구멍을 만들어둔 거야. 그리고 봐라. 실제로 빚을 갚는 데 실패했잖아. 개성이니 뭐니 이상한 동네에서 시정잡배를 끌어들여서는…… 쯧쯧. 그게 뭐냐?”

“보아하니 내 속을 긁으러 온 게 맞네.”

“내가 도와주마.”

박상현이 술잔을 옆으로 치우고 진지하게 장나래를 바라보았다.

“너희를 사겠다고 나선 용병단이 어떤 놈들인지 난 몰라. 조사할 겨를도 없었으니까. 유곽 일을 하는지, 사냥에 종사하는지, 장기밀매를 하는지, 전혀 모른다고. 하지만 그 남자가 유현도를 다루는 모습을 봤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이다…….”

“…….”

“그놈은 쓰레기 자식이야. 장나래. 너, 그런 쓰레기한테 정말로 팔려가도 괜찮아? 평양은? 너희 여기서 성공하고 싶어서 2년 동안 지지리 박고 난리 친 거 아니냐. 인제 와서 개성으로 팔려 가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억울하지도 않아?”

장나래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박상현을 노려봤다.

“지금 뭘 어쩌자고 이러는 건데?”

“내가 원하는 건 단 한마디야. ‘마음에 안 든다’라고 말해. 개성에 가는 게 싫다고 솔직하게 말해주라고. 그러면 전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어.”

박상현이 맥주로 목구멍을 축였다.

말이 잘 나오고 있었다.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잘해낼 수 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평양에서 개성으로 넘어갈 때 그 잘난 남자의 카라반을 덮치겠어. 나 혼자 끼어드는 일이 아니야. 보스 공손범이 손을 빌려줄 거다. 서른 명 정도가 한꺼번에 덮치면 당해낼 수가 없을걸.”

“사채업자 주제에 착한 일을 하는 것처럼 씨불이기는.”

장나래가 싸늘하게 비웃었다.

“공짜로 흑기사 역할을 맡아줄 리가 없지. 대가가 뭐야?”

“네가 보스 공손범의 휘하에 들어가는 거.”

요컨대 희생양이 되는 것이었다.

“정말로 그거뿐이야. 유현도는 명목상 내 아래로 들어오겠지만, 난 유현도를 노리개로 써먹을 생각이 없어. 설마 나를 ‘그런 인간말종’으로 보고 있지는 않겠지.”

“…….”

“물론 언니와 헤어져서 다른 조직에 간다는 게 마음에 안 들 거야.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공손범의 조직에 들어가서 차근차근 입지를 만들어놔. 시기가 무르익었다 싶으면 다시 유현도랑 결합할 수도 있어. 조금 더러운 지름길을 가로지를 뿐이야. 나도 너희를 옆에서 배려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장나래는 한동안 말없이 맥주를 들이마셨다.

느낌상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라고 박상현이 마음을 놓았을 때였다.

“난 언제든지 지름길을 선택할 수 있었어. 사채업자.”

놀랍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장나래의 입에서 나왔다.

“부산에서 사립학교를 나와서 명문대학교에 들어간 다음, 아버지 밑에서 일하면서 천천히 경력을 쌓을 수 있었지. 판사가 되어서 가문의 명성을 이어도 좋았고, 아무 사업이나 해서 성공할 수도 있었어. 하지만 난 이 빌어먹을 동네에 기어들어 왔지. 무슨 뜻인지 알아? 지름길 같은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구역질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다고, 돈쟁이 양반.”

장나래가 맥주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언니는 사업에 재능이 없지. 비즈니스 감각이 없는 여자야.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리 재정이 어려워져도, 언니는 단 한 번도 나에게 가문의 이름을 써먹자는 말을 눈곱만치도 꺼내 들지 않았어.”

“…….”

“귓구멍 닦고 잘 들어. 바로 그런 게 ‘배려’한다는 거야. 네 좆대로 착한 짓을 벌인다고 해서 내가 감사할 줄 알아? 지름길을 마련해 줘서 고맙습니다, 하고 말할 줄 알아? 내 면전에서 착한 척 좀 그만해.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으니까.”

박상현이 묵묵히 장나래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확실히, 자신이 내던진 제안은 오직 유현도를 위할 뿐이었다. 장나래의 사정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세상사란 그렇게 굴러가게 마련 아닌가.

모두를 구하는 방법 따위는 없었다.

예컨대 박상현은 자기 지갑을 털어서 의용단의 빚을 인수할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중소규모의 사채업장을 운용하는 박상현에게 2억은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으나 반대로 말해 아예 지출하지 못할 거금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어.’

자신의 보스가 장나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상현이 의용단을 인수해 버리면, 보스는 즉각 박상현을 배신자로 간주하겠지. 항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박상현은 보스와 항쟁해서 승리할 자신이 전혀 없었다…….

한계가 있었다.

박상현은 자신의 한계가 여기까지임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뼈저리게 절감했다.

“네가 희생양이 되는 건 나도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유현도는? 이대로 개성으로 팔려 가면 유현도는 어쩔 건데.”

“…….”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고. 장나래. 네가 희생양이 되어라. 하지만 유현도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책임지고 보호하마. 난 여기까지밖에 말하지 못해. 선택은 네 몫이야.”

장나래가 머리를 숙이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장나래가 이를 씹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거래를 받아들이겠어.”

박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느니 잘 선택했다느니 하는 말은 건네지 않았다. 그것이 박상현의 배려였다. 박상현은 다만 조금 뒤에 다시 연락하겠다면서 술집을 나섰다.

박상현은 거리로 나오자마자 보스한테 연락했다. 이번에는 보스도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한 번에 전화를 받았다.

“보스, 잘되었습니다.”

-좋아. 깔끔한 일처리가 마음에 든다, 상현아.

“장나래가 넘어왔으니 위험하게 유현도한테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놈들이 개성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덮치도록 하지요. B급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은 것처럼 위장하면 감쪽같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상현이가 다 컸어. 뭐, 그래. 그렇게 하자고. 네가 보기에 인력은 얼마나 차출하면 되겠냐?

“장나래에겐 전투 의사가 없고, 유현도도 지금 정신 차리고 누구와 싸울 처지가 못 됩니다. 정보원의 말에 따르면 적은 인원이 기껏해야 3명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중 한 명은 기생이고요.”

-음. 10명만 끌고 가도 떡을 치겠구만.

“몬스터를 끌고 와야 하는 일도 있으니 20명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보스. 이번 일,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깨끗하게 처리할 자신이 있습니다.”

-어쭈. 유현도를 보상으로 주겠다니까 아주 의욕이 펄펄 날뛰는군. 이래서 내가 부하들 연애 사업을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매번 느낀다니까. 끌끌.

수화기 너머로 보스가 묵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좋아. 네가 처리해라, 상현아. 20명 붙여줄 테니까 어디 실력을 보여 봐. 감히 평양에 침을 묻히려고 한 개성 되놈 새끼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라. 한 명도 남겨두지 말고.

“예, 보스.”

박상현이 어두운 눈동자로 대답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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