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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의 제국-56화 (56/142)

건달의 제국 56화

제8장 빌어먹게 아름다운 도시(5)

“저기, 의용단을 접수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말 그대로 접수했다는 뜻이지 뭐겠는가.”

이시백이 바닥에 주저앉은 유현도의 턱을 잡았다. 유현도가 작게 몸을 떨었다.

‘아니, 유현도를 무슨 성노예처럼.’

사채업자 박상현은 충격을 받았다. 유현도는 멍청한 맹순이처럼 보이긴 해도 강단이 있는 괴짜였다. 적어도 정신적으로 유현도를 굴복시키기란 한없이 어려웠다. 그런데도 저 모습은 뭔가. 마치 노예가 주인 앞에서 공포로 떨어 대는 것 같지 않은가…….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어도 의용단이 저 남자한테 단단히 약점이 잡힌 게 분명해. 젠장. 여기서 돈 받고 그냥 물러나면 뒷맛이 나쁘잖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거의 1년 동안 얼굴을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게다가 박상현은 시대에 조금 뒤떨어지긴 했어도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다. 개성의 화교들-그가 바라보기에 이시백은 영락없이 화교였다-한테 동족이 팔려나가는 장면을 순순히 지켜보는 것은, 박상현의 개인적인 자존심에도 크게 반대되었다.

물론 윗선의 명령을 달성하지 못하면 거하게 깨질 거라는 염려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기쁘기도 하면서 많이 당황스럽군요.”

여기서는 일단 후퇴하자.

박상현이 마음을 먹었다.

“설마 이억이나 되는 빚을 단번에 갚으리라곤 상상도 못했기에. 사실 오늘 계약서조차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대단히 실례가 많습니다만, 혹여 내일 점심쯤에 다시 찾아봬도 괜찮겠습니까?”

“모쪼록 그러시게.”

이시백이 장난스러운 손짓으로 유현도의 뺨을 매만졌다. 유현도는 어깨가 점점 더 크게 떨렸다. 계속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박상현은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낯으로 지인을 보겠는가.

‘이 남자…… 일부러 나를 들였어.’

박상현이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남자가 유현도와 정사를 벌이고 있었다 할지라도, 깔끔하게 뒷정리를 한 다음에 자신을 손님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잠시만 바깥에서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구태여 유현도에게 옷을 입을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길들이고 있다.’

난폭한 사냥개를 사냥꾼이 몽둥이로 잡아 패듯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유현도의 별난 정신을, 상대방은 무자비하게 조련했다.

“시간에 말미를 허락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박상현은 각을 잡아 인사하고서 빌라를 빠져나왔다.

그는 자신의 사업장에 돌아오자마자 윗선에 연락했다. 곧바로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두 번째로 거는 전화에서야 상대방이 수화기를 들었다.

-그래, 상현아. 무슨 일이냐?

휴대전화기 너머로 노곤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 지금 대동강에서 유람선 타면서 아가씨들이랑 노는 중이다. 용건만 빨리 말해.

“큰일 났습니다. 보스. 의용단에 작업이 들어간 용병단이 있습니다.”

-뭐?

박상현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유현도가 거의 노예처럼 사로잡혔다는 것.

아마도 상대편은 개성의 화교 출신 용병단이라는 것.

일패 기생을 데리고 다니고 카라반 트럭까지 몰고 다니는 것을 보면 상대 용병단은 규모가 매우 거대하며, 지금 개성에 출장 나온 인물은 적어도 부단장급의 간부라는 것.

-멍청이가!

박상현의 윗줄은 노발대발했다.

-의용단은 반드시 우리 조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장나래의 부친이 고등법원 부장판사야. 알겠냐! 앞으로 1년이나 2년만 더 있으면 이 근처의 지방 법원장으로 부임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그걸 놓쳐서 어쩌라는 거냐, 천치 자식!

“하지만 실질적으로 저희가 의용단을 묶어둘 수단은 빚밖에 없습니다. 저쪽에서 돈을 갚겠다고 나오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합니까. 보스. 저 지금 상대편에서 돈을 주겠다는 걸 마다하고 바로 오는 길입니다. 대책이 필요합니다.”

상사가 화났을 때는 자기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박상현은 2억 원을 받지 않은 것을 은근히 자기 공적으로 내세우며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했다.

-……개성의 화교 출신이라고.

박상현의 전술이 먹혔는지 보스가 분노를 억눌렀다.

의용단, 더 정확하게 말해 장나래는 지난 1년 동안 착실하게 공을 들여 온 사냥감이었다.

이쪽 세계에서 단지 대규모 용병단이 아니라 도시를 점유할 정도의 초거대 용병단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중앙 정부와의 인맥이 필수적이었다.

장나래는 ‘단돈 2억’으로 인맥을, 그것도 향후 5년이 보장되는 금맥. 여기서 얌전히 놓쳐 줄 수는 없었다.

-제길. 이럴까 봐 돈을 더 빌려주라고 지시하지 않았냐. 빚이 2억이 아니라 5억 정도 되었으면 저쪽에서도 물러섰을지 모른다!

박상현이 뜨끔했다.

괜히 의용단의 여자애들이 불쌍해서 대출 상한선을 오천만 원으로 고정시킨 장본인이 다름 아니라 박상현이었다. 과연 보스였다. 부하의 약점을 찾아내는 데 천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오천만 원 이상을 빌려주면 정말로 의용단이 사업에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럼 말짱 도루묵이지요. 아니, 애당초 보스께서도 동의하신 내용이지 않았습니까. 그것보다 우선 대책을 마련해 주십시오! 당장 내일 뭔 수작인들 부리지 않으면 홀라당 다 뺏기게 생겼습니다.”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전화기 너머로 여자들이 꺄아꺄아 하고 아양을 부리는 소리가 전달되었다. 보나마나 평양 기생들을 열 명쯤 고용해 놓고 질펀하게 파티를 즐기고 있었겠지.

‘이놈이나 저놈이나.’

방금 전에는 유현도를 노예처럼 부리는 남자한테 화가 났으나, 이번에는 자신의 보스에게도 화가 치밀었다.

어찌 된 게 돈이 많은 헌터들은 꼭 인성이 썩었다. 통장 잔고가 20억이 넘어가면 너도나도 아지트에다 비밀 지하실을 만들어서 성노예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가끔 박상현은 자기가 썩어빠진 늪에 다리를 담고 있는 것 같아 구역질이 느껴졌다.

‘그래도 화교한테 팔려가는 것보다야 이쪽이 낫겠지. 오십보백보일까. 시발, 처음부터 왜 괜히 새파란 여자애들을 정치 싸움에 이용해 먹겠다고…….’

그때 결심이 선 것인지 보스가 말했다.

-상현아, 상대 조직이 개성에서 왔다고?

“예, 보스.”

-십중팔구 창관을 경영하는 용병단이겠군. 유현도는 여차하면 창녀로 팔아먹을 속셈이겠고. 그걸 가지고 장나래를 협박하는 걸 테고. 안 그러냐?

“아마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야, 돌탱아리야. 그럼 시발, 장나래가 존나게 불만을 품고 있을 거잖아. 거, 그거, 우리가 잘만 꼬드기면 단번에 우리한테로 넘어올 수 있는 거 아니야?

“……아.”

사채업자 박상현은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확실히 그랬다!

상대 조직이 자선 사업가도 아닌 이상에야 의용단을 자유로운 몸으로 풀어줄 리 없었다. 2억 원이라는 빚은 박상현에게서 고스란히 상대 조직으로 넘어갔겠지. 즉, 의용단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은 여전히 빚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유현도가 뭔지 모를 약점까지 잡혀서 노예처럼 무자비하게 다뤄지고 있었다.

언니에 대한 충성심이 보통이 아닌 장나래가 이걸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과연 상대 조직에 순순히 따르려고 할까?

아니면 기회만 생기면 그들에게 총알을 쑤셔 박으려고 할까.

“……보스 말이 맞습니다. 장나래의 불만이 장난이 아니겠는데요. 더군다나 두 사람은 뼈 빠지게 고생하면서 겨우 평양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대로 생뚱맞게 개성으로 끌려가는 건 싫겠지요.”

-그래. 상황이 오히려 잘 풀린 걸 수도 있다 이거야.

보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음모를 꾸미는 목소리였다.

-우리가 의용단을 구해주면 장나래가 충성을 바칠 가능성이 커. 원래 계획대로 갔으면 충성심은커녕 반감밖에 안 샀을 거다. 이건 기회다, 상현아.

“당장 장나래가 어디 있는지 애들을 풀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끌끌. 이제야 이야기가 좀 통하는군.

보스가 괴팍하게 웃었다.

-화교 출신이라니 더 잘됐다. 야, 인마. 반도인이 반도인이랑 같이 놀아야지 어디 되놈 물을 먹으려 들어. 장나래한테 그렇게 말해. 동포 좋다는 게 뭐냐. 위험할 때 같이 돕고 사는 게 동포이지.

“알겠습니다.”

이런 뻔뻔함에는 박상현도 질릴 수밖에 없었다. 보스는 자기가 의용단을 빚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범인이라는 사실을 벌써 잊어버린 듯했다.

-너희 애들 말고 내 부하들도 같이 풀어주마. 공격 대장들한테 연락 돌려. 내가 미리 협력하라고 말해둘 테니까. 상현아.

“예, 보스.”

-네가 유현도 그 아가씨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거 다 알고 있다.

“…….”

박상현의 표정이 굳었다.

부하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다 상상이 된다는 듯, 보스는 즐거운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걱정하지 마. 뭐라 잔소리하려는 게 아니야. 뭐, 나이 차이가 조금 나긴 하지만 보기 좋은 커플 아니냐. 내가 그놈의 대출 한도 좀 늘리라고 그렇게 구박을 했는데도 네 좆대로 거부해 버리고. 그거 다 유현도한테 마음 있어서 그런 거지.

“보, 보스. 저는…….”

-아, 잔소리하는 게 아니래도 그러네. 내 말은 행여나 딴 마음 품지 말라는 거야.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나한테는 유현도가 필요 없어. 장나래만 있으면 돼. 이번 일만 잘 풀리면, 상현아. 유현도는 네가 따먹어도 된다.

“…….”

-끌끌. 내가 이렇게 부하를 잘 챙겨주는 양반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유현도 그 아가씨도 짱개한테 몸이 더럽혀지느니 너한테 깔리는 게 좋지 않겠냐. 우리 상현이가 나이도 그만하면 꽤 젊지, 사업 수완도 나쁘지 않지, 무엇보다도 인성이 아름답잖아. 그런 남자가 요새 드물거든.

박상현이 입술을 꽉 물었다.

전화기에서 천박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잘해. 오늘 저녁까지 시나리오 짜서 찾아와라. 장나래랑 얘기 잘 맞춰 두고. 시발, 뭐 개성? 어디서 촌구석에서 왕초 노릇이나 하는 잡것들이 기어 와서 감히 평양을 깔짝거려. 보나마나 뻔하지. 판사 집안을 편으로 만들어서 요새 난리 나는 걸 무마하려는 모양인데……. 대갈통에 구멍을 하나 더 만들어줘야 주제를 알 거다.

그리고 통화가 멋대로 끊어졌다.

휴대전화기에서 뚜우, 뚜우 하고 무기질적인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박상현은 한동안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그 소리를 들었다.

잠시 뒤, 그가 발길질로 책상을 찼다.

“젠장!”

발길질 소리가 워낙에 커서 사무실에서 바둑을 두던 조직원들이 깜짝 놀랐다. 조직원들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자, 박상현은 심장이 더더욱 분노로 물들었다.

이 도시는 천박했다. 지나치게 천박해서 상식이니 예의니 하는 것들이 간단하게 값이 매겨졌다. 그것들의 시세는 0원이었다. 무엇보다도 박상현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자신 또한 시세를 형성하는 담합자 무리에 끼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박상현이 이를 갈았다.

그는 부하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장나래를 찾아! 도시를, 골목을, 거지굴까지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 시간 안에 장나래를 찾아내! 못 찾는 새끼들은 내 손으로 박살을 내버릴 테다!”

“예, 형님!”

평양의 사채업을 총괄하는 거대 용병단.

그 육중한 공룡의 일단(一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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