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52화
제8장 빌어먹게 아름다운 도시(1)
1
“정말 20살이라고!?”
백산 용병단은 유현도의 비명으로 시작했다.
유현도는 윤시아와 함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들 대충 끼니만 때우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메뉴는 간단한 샌드위치.
“말도 안 돼. 난 아무리 어려도 25살이라고 생각했는데!”
“왜요. 우리 선배가 동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노안도 아니잖아요.”
“분위기란 게 있잖아, 분위기. 말투도 그렇고. 세상에. 한참 연상인 줄 알았어. 난 단장님이 삼십 대 후반이라 해도 믿을 수 있는걸.”
“선배가 삼십 대 후반이면 자그마치 스무 살이나 어린 여자애랑 사귀는 게 되는데요?”
윤시아가 샌드위치에 햄을 넣으며 웃었다.
“세상에 어떤 변태가 그러겠어요. 적어도 선배는 변태가 아닐걸요.”
“……시아야, 너 설마 단장님이랑 사귀고 있니?”
“어라. 제가 혹시 어젯밤에 말씀 안 드렸나요? 네, 맞아요.”
윤시아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니까 행여라도 선배를 가로챌 생각하지 마세요, 현도 언니. 제가 침을 발라도 아주 여기저기에 발랐으니까요.”
“가, 가로채다니.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했어.”
“에이, 거짓말한다. 보나마나 딱 봐도 첫눈에 반했는데.”
윤시아가 음흉한 아저씨처럼 능글거렸다.
“선배가 워낙 잘 생겼으니까 제가 너그럽게 이해해 드릴게요.”
“……응?”
“솔직히 여자라면 누구나 다 한눈에 뿅 가버리는 게 정상이니까요. 선배가 잘못하면 잘못했지, 언니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죠.”
유현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조금 이상했다.
확실히 유현도는 이시백 용병단장에게 어떤 이성적인 끌림을 느꼈다. 하지만 결코 이시백 단장이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선이 훤칠하게 굵직했지만, 오직 외모만으로 여성의 심장을 바운스 시킬 수준은 아니었다. 이시백 단장의 매력은 그 듬직함에 있었다.
“선배가 그래 봬도 정말 팔불출이라서요. 밤만 되면 짐승처럼 달려들지 뭐예요. 가끔 보면 그냥 덩치 큰 고릴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막 저를 깔아뭉개면서 거칠게 숨 쉬는 모습이 섹시하기도 하고.”
“어? 아, 응. 그렇구나.”
“하여간 반칙적으로 잘생겼어요. 그거 때문에 제가 다 봐주는 거죠. 예엡.”
윤시아가 신나서 이시백의 밤 기술에 대해 떠들었다.
유현도는 기묘한 느낌의 정체를 파악했다.
‘이 아이, 진심으로 단장님이 연예인급으로 잘생겼다고 믿고 있어!?’
심지어 주관적인 취향이 아니라 객관적인 진실인 양 확신하고 있었다.
유현도는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잡지만 마흔 권에 이르렀다. 그중에는 패션 잡지도 많은 지분을 차지했다.
당연하게도 유현도는 미남의 기준이 무엇인지 상당히 정확하게 알았으며, 이시백이 거기에 미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는 사실도 알았다.
“선배는 참 어쩔 수가 없다니까요. 아하핫.”
“…….”
“아무리 그래도 선배를 함부로 넘보는 건 금지예요. 원나잇 파트너까진 괜찮아도 그 이상은 절대로 안 돼요. 알겠어요, 언니?”
“그, 그래.”
유현도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팔불출은 이시백 용병단장이 아니란다, 시아야.
바로 네가 어마어마한 팔불출이야…….
식사 준비가 다 끝날 때까지 유현도는 윤시아의 애인 자랑을 강제로 들어야만 했다. 22살이 될 때까지 남자 한 명 사귀어보지 못한 것도 억울했는데, 16살짜리 여자애한테 온갖 잡다한 연애지사까지 청취했다. 인생이 절망적이었다.
“수고하셨수다.”
순우경이 유현도에게 인사했다. 유현도는 파김치가 되어 흐느적거리며 식탁에 앉았다. 그녀는 저편에서 나란히 앉아 밥을 먹는 이시백과 윤시아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원래부터 저래요?”
“시아 동생은 형씨가 자기한테 푹 빠졌다고 생각하고, 형씨는 시아 동생이 자기한테 빠졌다고 생각하지.”
순우경이 햄치즈 샌드위치를 씹으며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나 혼자서 저 지랄을 관람해야 했는데 동료가 생겨서 매우 기쁘구랴. 모쪼록 잘 부탁하오, 유현도 씨.”
“다, 닭살 커플이었어요?”
“본인들은 절대 아니라고 주장하겠지만 말이야.”
본래 진정한 닭살 커플은 자기네가 닭살임을 모르는 부류였다.
지금 눈앞에서만 해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이시백의 입가에 묻은 치즈를 윤시아가 손가락으로 슬쩍 지운 것이었다. 그러자 이시백이 피식 웃었고, 윤시아는 방실방실 해맑게 웃었다.
“저딴 짓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버젓이 자행하고 있습니다만……?”
“당사자들 주장에 따르자면, 자기들은 결코 끈적끈적한 애인 관계가 아니라 건조하게 몸만 주고받는 섹스 파트너라고 하더군.”
“호위대장님 생각은 어떤데요.”
“복날에 개가 처맞으면 그런 식으로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을까 싶구만.”
유현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십분 동감했다.
“전 단장님이 여자에 있어서 좀 더 쿨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예쁜 여자들 막 아무렇게나 잡아먹고 다니고 다음 날엔 잊어버리고?”
“네, 딱 나쁜 남자 이미지잖아요.”
“신기한 일이지. 아, 뭐. 형씨는 여러모로 다 신기하지만.”
순우경이 샌드위치 빵을 거칠게 뜯어먹었다.
“저 정도는 약과에 불과하니 앞으로 마음 단단히 먹으쇼. 더 끈적거리는 꼴딱서니도 아주 많이 보게 될 거야. 참, 유현도 씨. 그나저나 나는 어때? 나도 형씨만큼은 아니어도 꽤 괜찮은 남자-”
“죄송해요. 순우경 호위대장님은 전혀 제 취향이 아니에요.”
“그래, 왠지 그럴 것 같더라. 젠장할.”
단호하기 그지없는 거부에 순우경이 세상만사 통달한 표정을 지었다.
2
평양시는 반도의 북방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였다.
인구만 따져도 110만. 이 시대에 100만이 넘어서는 도시가 드물다는 점을 고려하면 규모가 대단했다. 물론 이중 절대다수는 사회의 밑바닥에서 근근이 살아갔으며, 마피아나 다름없는 용병단들이 아예 시당국과 유착하여서 도시를 지배했다.
“와아아.”
카라반 트럭이 성문에 접근할수록 윤시아가 탄성을 흘렸다.
“이렇게 거대한 성벽은 처음 봐요.”
“부산 다음으로 거대하지.”
“의정부가 완전 꼬맹이 수준으로 보이네요…….”
높이가 20m에 이르는 성벽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도시의 성벽은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니었다. 헌터들이 사냥해 오는 몬스터의 핵을 액화(液化)시켜서 성벽 내부에 빠르게 순환시켰다.
이건 몬스터들의 감각에 착각을 심어주었다. 즉, 자신들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 몬스터’가 이곳에서 숨 쉬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시백이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성벽만큼은 압권이로군.’
평양시는 몬스터들로부터 북방을 지키는 데 매우 중요했다.
만주에는 A급 몬스터, B급 몬스터가 차고 넘쳤다. 그들이 반도로 몰려오지 않는 까닭은 오직 하나. 평양시가 압도적으로 내풍기는 위압감 때문이었다. 아마 몬스터들에게는 평양 자체가 하나의 SSS급 몬스터쯤으로 느껴질 터.
‘달리 말해, 평양이 사라지면 서울까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다.’
사리원이나 개성이 있었지만 무의미했다.
지난 삶에서도 그러했다. SS급 몬스터 두 마리가 각자 군단을 이끌고 남하했다. 일단 평양이 함락되자, 비록 사리원과 개성에도 그럭저럭 괜찮은 성벽이 마련되어 있었다 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최종적으로 서울마저 포기해야만 했다…….
‘거점방어는 양날의 검이야.’
잔챙이들은 감히 도시를 넘보지 못한다.
그러나 침공해 오면 반드시 ‘거물’이 달려들었다.
중국과 같은 나라는 아예 현대판 만리장성을 만들어서 도시뿐만 아니라 지역 전체를 선(線)적으로 방어했다. 그처럼 미친 스케일을 보여 주지 못하는 이상에야 거점방어가 최선임은 분명했다.
‘역시 용병단들이 사냥에 전념하는 게 옳다.’
북방에 만연한 A급 몬스터들을 용병단들이 주기적으로 청소해 준다.
그렇다면 설령 S급 몬스터가 군단을 이끌고 남하하더라도, 몬스터 군단의 질이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본래 이것이야말로 정석.
도시는 잔챙이를 막아주고, 그동안 용병단이 위험한 상급 몬스터를 토벌한다.
바로 이런 정석이 통용되는 도시를 만들어내기 위해 지난 삶에서 이시백은, 원서는, 유현도는 목숨을 바쳐 노력했다.
딱히 대단히 훌륭한 이상을 바란 게 아니었다. ‘헌터가 몬스터를 잡는다.’ 이 단순한 문장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만을 바랐다.
“……선배.”
윤시아가 창밖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마침 카라반 트럭이 평양의 남문을 통과했다.
“도시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데요.”
“뭐가 이상하냐.”
“저거요, 저거. 사람들이 다 약에 찌든 얼굴이잖아요.”
새하얀 성벽을 지나치자 그곳은 악(惡)의 도시였다.
콘크리트 대로는 지어진 지 수십 년이 지났겠지. 도로 곳곳이 갈라졌다. 가뭄에 메마른 논밭처럼 파인 정도가 심했는데도 아무런 보수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라반 트럭이 덜컹거리며 시내를 가로질렀다.
“도시의 공권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판가름하는 부분이 있다.”
이시백이 윤시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시내 풍경을 가리켰다.
“가로등과 도로다. 저기 봐라. 이제 오전 11시가 되었는데도 가로등이 켜져 있다. 귀중한 전기를 낭비하는 게지. 도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증거야.”
“하아.”
“도로도 마찬가지다. 대로는 공공의 물건이다. 그런데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는 건…….”
“사람들이 죄다 자기 앞가림하는 데만 관심 있고 시정(市政)은 하나도 안 돌아간다는 거네요.”
이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낮인데도 길가에는 신문지를 덮고 자는 노숙자가 즐비했다. 숙소를 구하지 못해 길바닥을 전전하는 최하급 헌터들이었다. 술병이 굴러다니는데 치우는 청소부 한 명 없었고,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벽이 다 허물어진 건물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똑똑히 눈에 담아라.”
이곳이 북방 최대의 도시.
“용병단들이 도시를 지배하게 된 결과가 눈앞의 광경이다.”
평양특별자치시(平壤特別自治市).
시장에서 말단 경찰에 이르기까지 용병단의 뇌물을 먹지 아니한 자가 없고.
불법으로 제조된 마약과 술이 공공연하게 나돌아 다니며.
하루하루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들어, 고아원에서 아이들한테 도리어 도둑질을 해오라며 지시하는 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이 상상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거대한 부가 쌓였다.
도시 한구석에는 사치스러운 저택들이 들어섰다. 대동강 한복판에서는 호화 유람선이 매일 떠다니며 카지노 도박판이 벌어졌다.
개성보다도 휘황찬란한 창관의 거리가 붉은색 연분홍색으로 빛나며 영원한 불야성을 이루었다.
“썩어빠진 냄새가 사방에서 풍기지.”
“흐응, 그런데 선배는 왠지 기뻐 보이는데요?”
기뻐 보인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야 이시백은 자기가 입꼬리를 비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렇다. 기쁨이었다. 과거에는 감히 평양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삶은 어떠한가. 눈앞의 모든 풍경을 갈아치울 정보와 시간이 손아귀에 들어왔다…….
윤시아가 이시백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 끔찍한 도시를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선배?”
“…….”
이시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윤시아의 부드러운 앞머리를 쓰다듬을 뿐.
8월 14일.
이시백, 평양 입성(入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