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달의 제국-51화 (51/142)

건달의 제국 51화

제7장 아 다르고 어 다르다 (6)

유현도가 군침을 삼켰다.

“저, 혹시 가능하다면 그거…… 무, 문서로 남겨주실 수 있을까요?”

어찌 보면 천진난만한 발언이었다. 윤시아와 순우경이 웃었다. 장나래는 창피해져서 아예 얼굴을 푹 숙였다. 유현도는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렇지만 이시백만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좋다. 혈서를 쓰면 충분하겠지.”

“네?”

이시백이 카라반 트럭에 들어가서 필기도구를 들고 왔다. 모두가 벙찐 가운데, 심지어 제안을 한 장본인인 유현도마저 눈을 동그랗게 뜬 와중에 이시백이 굵은 펜으로 종이에 무언가를 쭉 적었다. 펜이 종이 표면에 쓱싹거리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이 정도로 할까.”

이시백이 종이를 부욱 찢었다. 그리고 단검으로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살짝 땄다. 새빨간 핏물이 흘러내렸다. 이시백은 핏물을 인주(印朱)로 삼아 지장을 찍었다. 지문의 나이테에 따라 피가 고르게 찍혔다. 서슴거리는 기색이 너무 없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아연했다.

“시아야, 네가 백산의 자문사이니 증인을 서주어야 한다.”

“……어휴. 쓸데없이 매사에 진지한 게 선배의 단점이라니까요.”

“윤시아 자문사.”

“예, 알겠습니다. 단장님.”

윤시아는 종이를 넘겨받아 서명했다. 이시백의 이름 아래 윤시아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리고 윤시아는 단검으로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그어 역시 피로 지장을 찍었다. 제법 고통이 느껴질 텐데도 눈썹 하나 까딱거리지 않았다.

“자요. 받아요.”

윤시아가 실쭉거리며 종이를 건넸다.

유현도가 두 손으로 공손하게 종이를 받았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백산(白山) 용병단의 단장 이시백(李時白)은 맹세한다.

어떠한 불상사, 어떠한 사태가 발생해도 이시백은 평양을 사수한다.

평양을 사수한다는 문장의 의미는 전적으로 단원 유현도가 결정한다.

맹세가 어겨질 경우, 단원 유현도는 단장 이시백을 살해해도 무방하다.

유현도 이외에 누구도 이 살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자문사 윤시아 및 단원 장나래를 위 계약의 증인으로 삼는다.

단장 이시백 李時白

자문사 윤시아 尹詩兒』

유현도가 할 말을 잃었다.

단지 던져 본 말이었다. 설마 혈서까지 쓰리라고는, 게다가 이렇게 과격한 내용이 작성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만에 하나 이시백이 맹세를 어기더라도 유현도는 그를 살해할 생각이 없었다. 그때 가서는 자기 안목이 부족했다고 자책해야 옳겠지.

“이시백 단장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유현도가 이의를 제기하려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그녀는 이시백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우물처럼 새카만 눈동자를 보고서 유현도는 무심코 말문이 막혔다.

‘아…….’

진지했다.

속임수나 장난이 눈곱만큼도 섞이지 않고 오로지 올곧았다.

유현도는 입이 벌어진 채로 닫히지 않았다.

‘나를 저렇게…….’

동료가 느끼는 우정도, 이성이 느끼는 두근거림도 아니었다.

단지 순수하게 ‘자기 자신이 완전히 인정받았다는 느낌’에서 오는 환희.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주었을 때 가슴 저 밑구멍에서 솟아오르는 충만감.

‘저렇게나, 나를 원하고 있구나.’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이시백은 유현도를 노렸다.

이대로 살인멸구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확실해졌다. 유현도는 자기 스스로 이시백의 정체를 폭로하지 않았다. 그녀가 폭로하도록 이시백이 교묘하게 ‘유도’했다.

“저기요, 단장님.”

유현도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왔다. 어조가 너무나 차분했다. 유현도 본인에게도 의외였다. 하지만 결코 당혹스럽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지 모르게 가슴이 채워진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이 기분이 만약 착각이 아니라면.

“저는 경력도 형편없고 등급도 C급인 헌터예요. 머리도 약간 이상하고요. 그런 저를, 왜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해 주시는 건가요. 저는 이만한 가치가 없는걸요.”

“흐.”

이시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유현도의 고백이 어지간히도 우스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진지하게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어서, 유현도는 그 비웃음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느꼈다.

비웃음이 목표로 삼은 곳은 유현도가 아니라 세상 전체.

유현도에게 저런 말을 내뱉게 만든, 나머지 모든 사람이었다.

“자네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여자다. 하지만, 그래. 내가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쉽사리 믿기지 않겠지. 나도 한때 그랬어. 이해하네.”

유현도가 멍하게 이시백을 올려다보았다.

만약 이 기분이 착각이 아니라면.

“그러니 자네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만큼, 내가 자네를 믿어주겠네.”

눈앞의 남자한테 충성을 바칠 수 있노라고.

유현도는 진심으로 확신했다.

“…….”

유현도는 윤시아한테 단검을 빌려서 엄지손을 땄다. 검붉은 피가 종이에 뚝뚝 떨어졌다. 여태껏 흥분하거나 당황하기만 한 유현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다만 차갑게 무표정한 얼굴로, 손끝에 굳센 의지를 담았다.

꾸욱.

『 단원 유현도 劉玄道 』

장나래도 종이를 넘겨받았다. 언니와 달리, 장나래는 이시백에게 어떤 직감과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유현도가 따라가는데 자기 홀로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저 이시백의 진지한 태도에 한 가닥 믿음을 걸어볼 수밖에.

까득 하고 장나래가 자신의 손가락을 이로 물어뜯었다.

『 단원 장나래 張나래 』

백산 용병단은 이날 두 명의 단원을 새로이 받아들였다.

패밀리가 불어난 것을 축하하며, 이시백 일행은 밤새도록 술 파티를 벌였다.

5

재령평야에 고즈넉하게 달이 떠올랐다.

여름과 가을의 한중간. 술로 뜨거워진 살결을 공기에 식히려는 것인지, 유현도와 윤시아는 반쯤 옷을 헐벗은 채 돗자리에 널브러졌다. 두 사람은 뜻밖에도 빠르게 의기투합했다. 사실 영악한 윤시아가 순진한 유현도를 놀려먹은 것에 가까웠다.

“…….”

장나래는 카라반 트럭 위에 올라타 있었다. 도시의 성벽이 바로 지척에 있다지만 혹시라도 몬스터가 돌아다닐지 몰랐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누군가가 불침번을 설 필요가 있었다. 기껏해야 슬라임이나 얼씬거릴 테지만…….

“혼자 술을 마시고 있나.”

장나래가 고개를 돌렸다. 이시백이 트럭 자체에 부착된 사다리를 타고 트럭 천장에 올라왔다. 장나래가 오른손에 술병을 들고 흔들거렸다. 상당히 큼직한 와인병이었는데도 장나래의 덩치가 워낙 커서 장난감처럼 보였다.

“덕분에 즐기고 있습니다.”

“잠시 같이 즐겨도 될까.”

“저는 이미 달과 그림자를 술친구로 맞이했습니다만.”

이시백이 장나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는 샴페인을 들고 있었다.

“이태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인가. 그림자 대신에 내가 끼어도 괜찮겠지.”

“……한시도 읽으십니까, 단장님?”

“이태백과 내 이름이 비슷하지 않은가. 그 사람 것만 몇 개 읽어보았지.”

장나래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눈앞의 용병단장은 지루한 한시를 읊을 위인으로 도저히 안 보이기 때문이었다.

장나래는 우락부락한 생김새와 달리 어릴 적에는 고등 교육을 받았고, 각종 예술 분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장나래는 알게 모르게 ‘헌터들은 지나치게 무식하다’라는 감상을 품었다. 유현도가 지능이 뛰어나다면 장나래는 지식이 뛰어난 편이었다.

“단장님, 혹시 이날 밤을 위해 시 하나 읊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건 장나래가 심술을 부린 것이었다.

조금 전에 장나래는 이시백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들었다. 윤시아가 취해서 제멋대로 떠들어준 덕분이었다. 듣자 하니 고아원 출신에 일자무식이라. 어차피 시 하나 외우지 못할 인생이라며 깔보았다.

“그건 조금 재미가 없군.”

“재미가 없어요?”

“내가 한 줄 부르면 자네가 한 줄 이어받게. 그래야 공평하지 않을까.”

장나래가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 시대, 고학력자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의무 교육이 폐지되고 모든 학교가 사립으로 운영되는 세상이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부산의 명문 사립을 다닌 장나래는 비록 수학과 과학에 전혀 자신이 없었으나 문학만은 꿀리지 않았다.

‘내가 후달릴 줄 알고 지르는 거네.’

장나래가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확실히 그게 더 재밌겠군요.”

“그럼 내가 첫수를 말해보겠다.”

이시백이 샴페인을 치켜들어 조용히 달을 가리켰다.

“내 마음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장나래가 눈썹을 찡그렸다.

상당히 유명한 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우고 다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 흉흉한 세상에 헌터가 풍류를 즐길 리 없지 않은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장나래가 다음 구절을 이었다.

“동시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장나래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이시백이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어투로 말해나갔다.

“서정주는 고수 중의 고수이다. 달에 대해 말하면서도 정작 달이라는 낱말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아. 자기는 여기까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보이지 않는가? 오만함이라면 오만함이지만, 실력이 뒤받쳐 주는 오만함은 또 매력이 있는 법이지.”

“……그렇죠.”

장나래는 갑자기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지금 이시백은 빙 돌려서 장나래의 오만방자함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제야 장나래는 자기가 얼마나 창피하고 유치한 짓거리를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었다. 자기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쥐구멍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말이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제가 아직 진심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서…….”

“운전사는 죽였네.”

장나래가 멈칫했다.

지금 술자리에는 순우경과 운전사가 없었다. 순우경이 운전사를 사리원으로 데려가 준다면서 자리를 비웠다. 물론, 운전사는 오늘 들은 얘기를 평생 비밀에 부친다고 서약을 했다.

“……예?”

“비밀이 유지될 리 없지 않은가. 순우경에게 처리하라 명령했다. 조용히 시체를 유기할 테니 들킬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아.”

장나래는 뭐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시백의 표정이 섬뜩했다. 이시백은 아까 전 동천(冬天)을 읊을 때나 지금 한 사람의 목숨이 사라졌다고 알릴 때나 얼굴이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단지 무심했다. 장나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장나래가 이를 씹었다.

“어떻게, 사람 목숨을 그렇게 간단하게……!”

“나는 자네와 닮은 점이 많다.”

이시백이 장나래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어쩐지 아늑한 눈길이 있었다. 자신의 범죄에 동의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용서를 비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투명하게 장나래를 비추었다.

“장나래. 자네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야. 아마 현아가 무엇을 선택해도, 설령 신념을 잃어버리고 발걸음을 잘못 삐끗해도, 자네는 끝까지 현아를 보좌하겠지. 그녀를 지키는 것에서 의미를 찾고 그녀와 함께하는 것에서 기쁨을 구한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자네가 부상자들을 죽였다 하더라도 나는 책망하지 않네.”

그 순간.

장나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굳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장나래가 입술을 움직였다. 그조차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전혀.”

“우리가 자네들을 구하러 갔을 때. 자네는 자꾸만 부상자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건 단순히 부상자를 걱정하는 눈빛이 아니었어. 무언가 다른 생각에 잠긴 시선이었지.”

장나래는 입을 뻥긋거렸다.

뭐라고 반박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혀가 일절 움직이지 않았다. 오로지 이시백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소리만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자네는 여차하면 부상자들을 떨어뜨려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 진흙 멧돼지들이 부상자한테 정신이 팔린 사이, 조금이라도 더 멀리 도망치기 위해서. 진흙 멧돼지들은 인육에 환장하니 어찌어찌 시간을 벌 수 있겠지.”

“저, 저는…… 저는…….”

“변명하지 말게.”

이시백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힘이 담겼다.

“자네에게는 단지 세상의 어떤 인간보다 유현도가 소중할 뿐이야. 그녀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윤리관도, 타인의 목숨도. 심지어 자신의 목숨조차 얼마든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 유현도는 자네에게 그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

“그 마음을 부정하지 마라.”

자네는 본래 그러한 인간이라고.

이시백이 조용히 고했다.

“오늘 불침번은 내가 서겠다. 자네는 ‘잠깐 고개를 숙여도’ 괜찮네.”

그리고 이시백은 사다리를 타고 트럭을 내려갔다.

카라반 트럭 위쪽에는 이제 장나래만 남았다.

창백한 달이 구름에 가려졌다. 이윽고 구름이 흘러가고 다시 달빛이 내리쬐었을 때, 장나래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이시백의 말대로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만 것이었다.

미약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밤공기에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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