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50화
제7장 아 다르고 어 다르다(5)
“우선 몸이라도 씻고 오는 게 어떠한가.”
이시백이 트럭 뒤쪽을 가리켰다.
“이틀 내내 몬스터와 소꿉놀이를 벌이느라 몰골이 말이 아니다. 뜨거운 물로 샤워라도 하고 나면 피로가 풀리겠지. 옷은 이쪽에 적당한 게 있으니 일단 그걸 입도록.”
“저희 보고 알아서 무장을 해제하라고요?”
장나래가 공손하게, 그러나 경계심이 서린 눈동자로 이시백을 살폈다. 몬스터에게 쫓기느라 온몸이 지쳤을 텐데 기세만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걸요.”
“우리는 자네들을 무력화시킬 기회가 세 번 있었네. 첫 번째, 자네가 혼자 넘어왔을 때 인질로 잡아서 협박할 수 있었지. 두 번째, 부상자가 이쪽에 덩그러니 남았을 때 역시 협박하여 인질로 써먹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시백이 오른손에 들린 맥주캔을 흔들었다.
“수면제가 들어간 캔맥주를 대령할 수도 있었지.”
“……밀주업자한테 일부러 똑같이 생긴 물건을.”
“정확하게 지적하자면 우리 단원이 방금 자네들한테 새로 나눠준 맥주에는 전부 수면제가 들어 있다. 조금 과하게 들어 있지.”
장나래가 눈썹을 찡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거기선 윤시아가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현도의 입에서 ‘개성의 영웅’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윤시아는 냉장고에서 수면제가 혼합된 캔맥주를 꺼내 서빙했다.
“선배도 참. 그걸 알려주면 어떡해요?”
“귀한 손님한테 실례를 범해서야 쓰겠나.”
“우리 시아 동생이 진짜 무서운 여자라니까. 싱글벙글하면서 할 건 다 하고 다녀요.”
윤시아와 순우경이 작게 웃었다. 이시백도 입꼬리가 약간 올라갔다.
이들은 전혀 긴장하고 있지 않았다. 방심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도리어 정반대였다. 장나래는 세 사람의 무장을 확인하면서 침을 삼켰다. 입안이 바싹 타올랐다.
‘여자애는 가슴팍에 권총을 숨기고 있어. 운전수는 양쪽 주머니에. 눈앞의 남자는……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보나마나 뭔가를 갖고 있겠지. 죽는 걸 각오하면 한판 붙어도 괜찮은데…….’
장나래가 곁눈질로 유현도의 상태를 살폈다.
평소에는 어리바리해도 위기상황에선 또 빠릿빠릿한 언니였다. 어쩌면 이미 비장하게 각오를 끝마쳤을지도 몰랐다…….
“어버버버버.”
이년은 글렀다.
유현도는 절찬리에 어깨를 떨고 있었다.
‘하아.’
장나래는 또다시 한숨이 목구멍으로 몰려오는 것 같았다. 자기가 저지른 짓의 여파로 인해 정신이 나갔다. 운전사도 쓸모가 없었다. 결국 3:1로 싸움에 뛰어들어야만 했는데, 아무리 장나래가 싸움질에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이건 지나치게 불리했다.
“알겠습니다. 이미 저희의 목숨을 한 번 구해주셨지요. 이쪽을 어떻게 요리하시든, 이시백 단장님의 재량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나래가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탄창을 분리했다. 그리고 이시백의 발을 향해 던졌다. 이시백이 나지막하게 요구했다.
“나머지 권총과 단검도 건네주면 좋겠군.”
“…….”
장나래가 허리춤에 숨겨둔 권총과 허벅지에 부착해 놓은 단검을 빼냈다. 장나래는 이시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꼭 바늘이 전부 뽑혀 나간 고슴도치가 천적을 맹렬하게 노려보는 것 같았다.
“어떻게 무기가 더 있는 걸 아셨어요?”
“정말로 있는 줄은 몰랐네. 그냥 한 번 찔러봤지.”
“시발…….”
이시백은 장나래가 던진 권총을 쥐고 내보였다.
“자책하지 말게. 뛰어난 헌터라면 숨겨둔 무기 두 개쯤은 지니고 다니는 것이 당연하니 말일세. 이로써 자네가 뛰어난 헌터라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았는가.”
“죄송하지만, 이시백 단장님. 혹시 헌터 등급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도 될까요?”
“D급이다.”
“……D급에게 뛰어난 헌터의 기준을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세상천지에 처리해야 할 몬스터보다 인간이 더 많더군. 바쁜 시간을 보내느라 정작 몬스터는 잡지 못했다. 나는 지금까지 인간을 사냥하는 재주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방금 진흙 멧돼지를 처리한 걸 보니 몬스터 사냥에도 재능이 있었지 뭔가.”
요컨대 까불지 말라는 경고였다.
장나래가 완벽한 패배감을 맛보며 탄식하는 동안, 유현도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 선생님에게 질문하려는 중학교 모범생처럼. 사람들의 시선이 유현도한테 집중되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가운데 유현도가 말했다.
“저기, 혹시 저도 권총을 꺼내야 할까요? 한 자루 있는데.”
“샤워하고 오겠습니다…….”
장나래가 유현도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어갔다.
바닥에 끌리면서도 유현도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유현도는 자기 옷을 스스로 풀어내며 단검 세 개와 권총을 던졌다.
“전 안전해요! 전 정말로 아무한테도 위험하지 않은, 무해한 쪼다 병신에 나약해 빠진 노처녀에다 한 달마다 구독하는 잡지 숫자만 마흔 권이고,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시백 단장님이 검찰과 경찰에 어마어마한 파이프라인을 갖고 있다는 사실 따윈 전혀 모르는 멍청이-”
하고 소리쳤다. 안타깝게도 유현도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장나래가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갈겼기 때문이다.
삼십 분 뒤.
부상자가 사리원(沙里院)시로 이송되었다. 부상자들은 마취제로 정신이 몽롱했으므로 이야기가 유출될 가능성은 없었다. 문제는 유현도, 장나래, 운전사. 이 세 명이었다.
“정식으로 소개하마.”
이시백 일행은 사리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도시의 하얀 성벽이 보이는 평야에 카라반 트럭을 세웠다. 유현도, 장나래, 운전사가 나란히 돗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시백은 땅바닥에 간이 의자를 세워 앉았다.
“이쪽은 순우경. 개성에서 향금산 유곽의 지배인을 하고 있었다. 밀고에 필요한 정보를 전부 모아주었다. 이번 개성 사태는 사실상 순우경이 터뜨린 거라 봐도 좋다. 나는 그저 등을 살짝 떠밀었을 뿐이고.”
“내가 밀고자요. 지금은 백산 용병단의 호위대장 겸 운전사를 맡고 있지.”
순우경이 실실거렸다.
“아, 안녕하세요.”
유현도가 고개를 꾸벅였다. 장나래가 뒤통수를 한 번 더 치자 그제야 유현도가 얌전해졌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전원이 슬슬 유현도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쪼다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다만 몸에 때를 벗긴 유현도는 거의 변신한 수준으로 아름다웠다.
스물두 살 정도 되었을까. 옅은 금발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물기에 젖어 매끄러웠다. 입술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는데도 연하게 빛났는데 아마도 샤워하고 얼굴을 꼼꼼하게 닦고 나오는 것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평소부터 주기적으로 외모를 관리했다는 느낌이 확연하게 풍겼다.
“그리고 이쪽은 윤시아. 장기밀매업에서 꽤나 잘나가던 보스의 모가지를 따버린 아이지. 내 생각에는 이 아이가 모든 인간의 목줄을 따버릴 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제외하고.”
“윤시아입니다. 백산에서 자문사를 맡고 있어요.”
윤시아가 귀엽게 손을 흔들었다. 오른손에 단검이 들려 있지만 않았으면 더 귀여웠을 것이다. 유현도는 윤시아에게 마주 웃어주었지만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걸 주체할 수는 없었다.
“간단하게 두 가지 선택을 보여 주마.”
“가, 감사합니다. 저희한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 좋네요!”
“첫 번째 선택지는 한반도의 검찰과 경찰을 위해서, 아울러 우리 용병단의 안위를 위하여 자네들이 이 자리에서 모두 죽어주는 것일세.”
“……제가 생각하던 ‘선택’과는 의미가 좀 상당히 많이 다르네요?”
유현도가 땀을 뻘뻘 흘렸다.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다. 겉모습만 남았고 자치도시로 갈가리 찢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국가는 국가지. 애국심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무, 물론 저는 언제나 국가에 충성하려고 노력했지만 혹시 가능하다면 두 번째 선택지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어디까지나 혹시나 해서 말이죠.”
“내 수하가 되어주게.”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요…….”
유현도가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잡았다.
잠시간 유현도가 끙끙거리는 소리만이 주위에 울렸다. 그녀는 자꾸 장나래를 쳐다보았다. 어떤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으나 유현도가 무언가를 주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희는 아직 창설된 지 2년밖에 안 됐어요. 저는 고아원 출신이고, 나래는 부산의 양갓집 규수였죠. 서로 완전히 다른 출신을 갖고 있었지만 목적이 같아서 함께 뛰쳐나왔어요. 저기, 이시백 단장님은 정말로 제 타입이에요. 아니, 타입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멋진 분이라고 생각해요.”
유현도가 난감해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단장님의 목표가 저희 목표와 어울리지 못한다면, 죄송해요. 저희는 단장님을 따를 수 없어요.”
“무엇이 목표인지 물어도 될까.”
“……웃지 않으실 거죠?”
“나를 농담으로 웃긴다면 자네는 당장 연예계로 진출해도 대성할 거야.”
유현도가 숨을 들이마셨다.
각오를 단단히 정한 얼굴이었다.
“이 나라를 지키는 거요.”
“나라를 지켜?”
이시백이 짐짓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어투로 반문했다. 그 목소리에 비웃음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까. 유현도는 실망했는지 낯빛이 어두워졌다.
“비루한 헌터가 무슨 수로 감히 나라를 지키는가.”
“예, 예에. 뭐. 당연히 그렇지만요……. 아니, 아니에요. 저는 바로 그 인식부터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인식?”
“비루한 헌터.”
유현도의 목소리가 점점 더 빨라졌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현재 헌터들은 놀랍도록 심각하게 차별받고 있어요. 이런 차별이 실제로 구별을 만들어내죠. 분명히 본래 헌터란 몬스터를 사냥하는 직업이었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사냥은 뒷전에 치워두고 온갖 불법적인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지금 와서는 오히려 사냥에만 치중하는 헌터가 희귀하죠. 저도 밀주업에 손대고 있는걸요!”
“언니.”
“하지만 이건 절대로 정상적인 게 아니에요!”
유현도가 얼굴이 붉어졌다.
“중앙 정부는 지방 도시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어요. 그리고 도시들은 세금을 얼마나 내느냐에 따라 시민들을 차별하죠. D급 헌터까진 아예 투표권은커녕 시민권도 없구요. 매년 고아원에서 배출하는 아이들이 자그마치 오만 명에다 이것도 통계상 잡지 못한 수치에 불과하죠. 얘들이 사회에 나가서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전무해요! 도시에서 아예 시민으로 인정해 주지 않으니까!”
“언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건 완전 지랄 맞은 일이라구요! 언제부터 우리들이 이 땅을 절대 ‘우리나라’라고 부르지 않고 ‘반도’라고 부르는 데 더 익숙해졌죠!? 언제부터 헌터들을 이 나라의 구성원이 아니라 음식물 쓰레기나 청소하는 천민으로 취급하는 게 당연하게 됐죠? 언제부터 시민에 등급을 나눠서 어떤 사람에게는 투표권을 주고 어떤 사람에겐 투표권을 안 주는 게 상식이 되었죠? 이 땅 전체에 정말 병신 같은 풍조가 만연해서 그냥 총체적 병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구요!”
장나래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조금 불쌍하게 보였다.
“이 땅의 권력자들은 의도적으로 헌터를 천민 계층으로 내버려 두고 있어요. 그래야 여차하면 뭐든지 헌터들 잘못으로 돌릴 수 있으니까요. 창관업이 만연하는 것도 헌터 잘못, 밀주들이 쏟아지는 것도 헌터 잘못, 몬스터들이 융성하는 것도 헌터 잘못……. 엿이나 처먹으라고 해요! 당신들이 고아들한테 항문에 난 털만큼도 신경을 안 쓰니까 여자애들이 전부 창관으로 나가는 거고, 당신들이 관리를 하나도 안 하니까 밀주든 뭐든 쏘다니는 거고, 당신들이 남쪽 지방만 지키려 드니까 북쪽이 엉망진창이 되는 거잖아!”
“그래, 마음대로 떠벌려라, 웬수 년아…….”
“이 땅의 사람들이 다시 신뢰를 회복해야 해요.”
유현도가 이시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헌터들 중에도 쓰레기만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도 뭐가 옳은지 알아요. 우리도 안다구요. 그러니까 저는 언젠가 거대한 용병단을 만들어서.”
“만들어서?”
“보여 줄 거예요. 저도 무언가를 위해 희생할 줄 안다는 사실을요.”
이시백이 물끄러미 유현도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이시백은 머릿속에서 과거에, 아니 언젠가 미래에 유현도가 남길 연설을 떠올렸다.
“내일의 신뢰를 위하여 오늘의 목숨을 바친다라.”
“네! 바로 그거예요! ……어라?”
자기도 모르게 맞장구를 치고서 유현도가 한 발자국 늦게 눈썹을 찡그렸다.
“표현이 되게 마음에 드네요. 제가 나중에 그거 써먹어도 될까요?”
“자네한테 저작권이 있으니 마음껏 써먹게나.”
이시백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으로 이시백의 미소를 본 유현도는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나는 자네의 목표와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네. 그런 걸 논하기에는 내 머리가 너무 굳었어. 배우지도 못했고. 시민이니 뭐니 말해도 솔직히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어려워.”
“아…….”
“그래도 약속하지. 만약 우리 용병단이 평양을 주름잡는 위치까지 올라서게 된다면,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도시를 버리지 않겠다. 설령 몬스터들이 해일처럼 밀어닥쳐서 모두가 죽을 위기에 처하더라도.”
이시백이 확신을 담아 한 단어씩 끊어서 발음했다.
거기에는 묘한 설득력이 담겨 있었다.
“절대로 도시를 버리지 않겠다.”
“…….”
유현도가 눈을 깜빡였다.
“그,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뭔가 되게 믿어지고 싶네요.”
“믿어도 좋다.”
이시백이 말했다.
“우리는 의리가 있는 인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