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49화
제7장 아 다르고 어 다르다(4)
4
“모두 고생이 많았다.”
이시백이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었다.
이시백은 직접 사람들에게 캔맥주를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재활용이 가능한 병맥주가 아니라는 점에서-맥주든 콜라든 병에다 몇 번이고 갈아 마시는 것이 기본이었다-소소한 사치를 선물한 것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희가 살았어요.”
유현도가 환하게 웃으면서 캔맥주를 받았다. 장나래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병맥주에 비해 캔맥주에는 안쪽에다 무언가 약을 탔을 확률이 낮았으니 조금이나마 더 안심할 수 있었다.
“솔직히 구조 요청에 응답해 주실지 몰랐어요. 그, 제 말은, 용병단이 다른 용병단을 도와주는 건 그닥 평범한 일이 아니잖아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평범한 용병단이 아니다. 운이 좋았어.”
이시백이 맥주캔을 땄다. 하얀 거품이 넘쳤다.
“백산 용병단에서 단장을 맡고 있는 이시백이다.”
“네! 부족한 몸이지만 의용단을 이끄는 유현도입니다.”
이시백이 맥주를 내밀자, 유현도는 양손으로 공손히 건배에 응했다. 거의 황공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나머지 단원들도 저마다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햐아 하고 유현도가 단숨에 원샷했다.
“와아, 진짜 제대로 만들어진 밀맥주네요.”
유현도가 감탄하며 맥주캔 표면의 글씨들을 확인했다.
이시백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왜 B급 몬스터를 건드렸는가? 섣불리 자살할 양반들로는 안 보인다만.”
“……제 실수였어요.”
유현도가 쓴웃음을 지었다.
“새로 발견된 던전을 탐색하겠다고 멸악산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죠. 2차 보고서에 나온 지역은 아니었지만, 1차 보고서가 세 번 이상 올라왔어요. 탐험가들은 보고서에서 모두 B급 이상의 몬스터가 서식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고요.”
“교차 검증이 이루어졌다고 판단했군.”
유현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들은 각자가 주력하는 직업이 천차만별이었다. 순우경처럼 창관 일에 종사하는 헌터도 있었고, 위험한 지역을 탐사하며 보고서를 작성하는 헌터도 있었다. 탐험가 내지 모험가는 후자의 헌터를 가리켰다.
“약간 제 변명을 곁들이자면, 저는 세 번째 보고서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어요. 평범한 용병단이었다면 두 번째 보고서가 등장한 시점에서 이미 원정을 떠났을 거예요. 하지만 저희는 완전히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 때까지…….”
“하지만 B급 몬스터가 나온 건가.”
“네.”
이시백이 상황을 이해했다.
헌터는 언제나 안정적인 사냥터를 확보하고자 했다. 특히 ‘별로 강하지 않은데 재료의 값어치가 높은 몬스터’를 선호했다.
이런 몬스터가 서식하는 장소에선 항상 용병단들끼리 경쟁했고, 당연하게도 대형 용병단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이미 다 알려진 사냥터에 소규모 용병단이 들어갈 구석은 전무.
따라서 유현도는 대형 용병단보다 한 발자국 빠르게 ‘블루 오션’을 차지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
“1분 30초도 안 되어서 길잡이가 사망했어요. 우리는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부상자가 두 명 발생했습니다. 사실 길잡이가 죽어준 덕분에 저희가 살았죠. 진흙 멧돼지들이 길잡이의 시체를 뜯어먹느라 신경을 팔았으니까요.”
유현도가 자조했다.
처참하게 실패한 용병단장.
지금 유현도는 자기 자신을 그리 평가하고 있었다.
“저희 용병단은 벌써 두 번이나 경고를 받았습니다. 이젠 길잡이까지 죽여 버렸네요. 길잡이를 희생양으로 바치고 도망치는 용병단을 누가 믿어주겠어요? 아마 평양으로 돌아가면 꼼짝없이 신용 등급이 파란색으로 내려갈 거예요…….”
“우리들 잘못이 아니었어!”
장나래가 별안간 버럭 소리쳤다.
“언니도 알잖아. 우리 일부러 물 먹이려고 용병단들이 짜고 친 거! 올해 봄에도 업자 바꾸게 만들어서 상품들 질 떨어지게 했고, 저번 가을에도……!”
“그리고 오늘 우리는 길잡이가 죽도록 내버려 뒀어.”
유현도가 차갑게 말을 끊었다.
“임시로 외부에서 고용한 헌터 두 명은 모두 부상을 입었고. 나래, 너랑 나만 몸이 멀쩡하지. 사람들이 이걸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하지만, 이건…… 우연이잖아! 언니는 최선을 다했어!”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자기가 우연히 죽었는지 아닌지 따위는 전혀 안 중요해. 우리는 고용주야. 길잡이를 살려서 집에 돌려보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였어. 우리는 의무를 위반했고, 이거 때문에 신용 등급이 떨어지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야.”
유현도가 조금도 버벅거리지 않고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장나래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장나래는 결국 애꿎은 캔맥주에 화풀이하면서 술을 퍼마셨다. 씨발, 쪼다 언니, 병신 하고 욕지거리가 입에서 리듬을 타고 흘러나왔다.
유현도가 멋쩍어서 미소를 지었다.
“저, 죄송해요. 저희 용병단이 요즘 사정이 많이 안 좋아서…….”
“이번 기회에 평판을 뒤집으려고 약간 위험한 길을 건넜군.”
“최악의 결과가 되어버렸지만요. 아하하. 개성의 영웅인 분 앞에서 정말 부끄럽네요.”
그 순간이었다.
트럭을 운전하는 순우경이 백미러를 힐끗거렸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던 윤시아가 아주 잠깐 멈칫했다.
이시백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개성의 영웅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용병단이 창설된 지 일주일밖에 안 됐잖아요. 그런데도 검은색 등급을 받으셨으니 분명히 대단한 업적을 이루셨겠죠. 하아, 정보지에 얘기가 하나도 안 흘러나오는 건 이상하지만요…….”
분위기가 바뀐 것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유현도는 두 번째 캔맥주를 비우면서 주저리주저리 말을 풀어놓았다.
“하긴 요새 개성이 워낙에 흉흉해서 제대로 된 정보가 공유되기 어렵기도 하죠. 벌써 대형 용병단이 세 군데나 쓸렸다면서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만약 우리 용병단이 업적 같은 것을 세웠다고 가정하지. 어떤 종류의 업적일 것이라고 짐작하나?”
“네? 그, 글쎄요.”
유현도가 고민했다.
“그것까지 깊이 생각할 여유는 없었지만, 아마도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아요. 타이밍이 절묘하니까요. 네. 그러니까, 지금 부산에서 경찰이랑 검찰을 막 군단처럼 보냈잖아요. 중앙이 이렇게 자신만만해서 개입하려면 반드시…….”
“내부 증거가 필요하지.”
“아, 네! 맞아요. 그거예요.”
유현도가 해맑게 손뼉을 쳤다.
“이쪽 업계가 엄청나게 넓은 것도 아니고, 내부 고발자가 밝혀졌으면 곧바로 퍼져요. 저도 귀 밝은 친구들이 몇 명 있어서 소식을 물어봤는데 아무도 모르더라구요. 그렇다면 개성의 장기밀매업을 고발한 사람은 아마 아주 유명한 사람은 아닐 거예요. 그리고.”
유현도가 재미있다는 듯 오른손 검지를 치켜세웠다.
이제야 공기가 이상해진 것을 깨달았는지 장나래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녀는 차례대로 이시백과 윤시아, 순우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장나래의 안색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동생이 어떤 심정에 빠지느냐와 상관없이 유현도는 신나서 떠벌렸다.
“바로 여기가 재미있는 부분이죠. 개성에는 똑똑한 용병단이 많아요. 장기밀매는 특히나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서 점조직 형태로 운영된다구요. 적당히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니면…….”
“고발 자료를 충분히 많이 모으기 힘들다.”
“예! 이상하잖아요. 점조직 형태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어요. 누군가가 배신을 때렸다면 적당히 눈치라도 챌 수 있어요. 그런데 아직도 고발자가 누구인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은.”
유현도가 왼손 검지도 세웠다. 그녀는 즐겁게 양손으로 손가락을 흔들었다.
“두 가지 중 하나죠. 첫 번째, 내부 고발로 인해서 가장 큰 손해를 입은 용병단의 간부가 오히려 밀고자인 경우. 이때 밀고자는 눈속임을 위해서 경찰한테 모든 재산을 떠넘겼을 거예요. 아마도! 저라면 그럴 거예요.”
“…….”
“재산도 털털 털리고 빈 몸으로 나가떨어지면 누구도 밀고자라고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요. 정말 대단한 거죠. 돈이나 이익을 위해서 밀고한 게 아니라, 순전히 정의감으로 나섰다는 거니까요. 뭐, 아무튼!”
분위기가 점점 더 싸늘해져 가고 있었다.
오직 이시백과 유현도만이 주변의 영향을 일절 받지 않았다. 이시백은 무심하게 맞장구를 쳐주었으며, 유현도는 신나서 떠들어 댔다.
한편 장나래는 안색이 핼쑥해졌다. 얼굴에 핏기가 없고 파리했다.
“어, 언니.”
“두 번째 가능성은 밀고자의 신분이 애매모호한 경우예요. 예컨대, 밀고자가 단순히 장기밀매업에만 관여되어 있지 않았다면? 장기밀매업에도 어느 정도 손이 뻗어 있었지만 오히려 밀주업이나 창관업이 본직이었다면? 그러니까 밀고자의 본직이 따로 있고 그 본직으로 더 유명하다면…….”
“눈속임이 이루어지겠지.”
“네!”
유현도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어지간히도 기쁜 모양이었다.
“이시백 단장님 정말로 대단하네요!”
“개성의 업자들은 고발자가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해, 먼저 장기밀매 쪽 인물들부터 샅샅이 뒤질 거다. 이쪽이 제1순위. 다른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인물들은 제2순위나 제3순위에 불과할 테고. 그리고 제2순위까지 탐색할 무렵에 이르면.”
“이미 검찰이랑 경찰에서 가짜 범인, 아니, 가짜 밀고자를 만들어냈겠죠!”
유현도는 또다시 손뼉을 쳤다.
그녀는 명백히 흥분하고 있었다. 술기운 탓인지 몰라도 볼이 붉게 물들었으며, 이시백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초롱초롱 반짝거렸다.
“밀고자의 신분이 완벽하게 가려지는 거예요.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흠집 하나 없는 쾌거? 깔끔한 시나리오? 밀고자는 이익과 명성에 눈이 팔리지 않았고, 경찰과 검찰도 거악(巨惡)을 퇴치하는 데만 주력했어요. 이거죠. 어떤 도시를 정리한다는 건 모름지기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죠!”
“언니, 제발.”
뒤쪽에 앉은 장나래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유현도의 달아오른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물론 두 가지 경우 전부 해당할 수도 있어요. 가장 완전무결한 경우인데요. 밀고자가 장기밀매업 이외에 다른 본직을 가지고 있고, 게다가 수사에 의해 가장 무참하게 박살이 난 경우, 사람들은 진짜 아무도 밀고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없어요. 뭐! 이 정도로 완벽한 경우는 불가능하겠지만요.”
“매우 흥미로운 추론이다.”
“아하하.”
유현도가 부끄러워서 머리를 긁적였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해요. 사람들은 정말 바보라서 제가 이런 말을 하면 헛소리로 취급하거든요. 제 동생도 만날 쉰소리 좀 그만하라고 구박하지 뭐예요. 진지하게 들어주신 건 이시백 용병단장님이 처음이에요.”
“마지막으로 질문해도 될까?”
“네, 얼마든지!”
윤시아가 사람들에게 캔맥주를 한 번 더 나누어주었다.
이시백이 캔을 받아들며 말했다.
“만일 밀고자가 실제로 있다고 치면 지금쯤 뭘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으음, 그건 또 제법 흥미로운 가정이네요.”
유현도가 턱을 짚고 미간을 좁혔다.
“아마도 다른 도시로 도망치겠죠?”
“그럴 가능성이 크지.”
“자기가 몰락했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 새로운 용병단에 들어갈 테고요. 아주 초라한 용병단이요. 이제 막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조직. 그런 곳에 들어가면 ‘아, 저 사람이 진짜 몰락할 대로 몰락했구나’ 하고 주변 사람들이 멋대로 착각해 줄 거고요. 연막에 또 연막을 뿌리는 느낌이죠.”
“그것도 훌륭한 방법이다.”
“네, 그러니까 꼭 이시백 용병단장님처럼…….”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잠시의 정적.
“어? 어라? 네, 그러니까 이시백 용병단장님처럼……?”
이시백이 지그시 유현도를 바라보았다.
유현도가 눈을 껌뻑거렸다.
“창설된 지 이제 일주일?”
“그렇다.”
“개성에서 평양으로 이동하고 있고?”
“정확하다.”
“……이유는 몰라도 어째서인지 신용등급이 검정?”
끼이이익.
카라반 트럭이 멈추었다.
순우경이 운전석에서 일어나 뒤편으로 걸어왔다. 어느새 윤시아도 이시백의 옆에 서 있었다. 왼쪽에 윤시아, 오른쪽에 순우경을 거느리고 이시백이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
“…….”
두 용병단장 사이에 침묵이 오갔다.
유현도가 잔뜩 굳은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옆머리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저…… 혹시 방금 사고를 저질렀나요?”
“어쩌면.”
“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올해 들은 농담 중에 제일 재밌는 농담이로군.”
다시 정적.
장나래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중얼거렸다.
“내가 저년 때문에 못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