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47화
제7장 아 다르고 어 다르다(2)
이시백이 순우경의 자리에서 서둘러 지도를 꺼내었다.
몬스터가 횡행할수록 되레 경기가 좋아지는 산업이 몇 개 있었다. 지도가 대표적인 분야였다. 몬스터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헌터들은 매 계절 지도 제작자들의 상술에 바득바득 이를 갈면서도, 비싼 가격에 지도를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반복합니다. 현재 위치…….
이시백이 황해도 전용의 지도집을 펼쳐서 B번 지도를 살펴보았다. 가까웠다. 이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몬스터 군락지는 언진산맥에서 멸악산맥으로 이어지는 고지대. 현재 SOS를 발송하고 있는 사람의 위치는 남쪽. 재령군의 아양리 근처였다.
30분 거리.
승산이 충분했다.
“여기는 개성의 백산 용병단. 쓰리 바이 쓰리. 모빌에서 교신 중.”
이시백이 무전 채널을 9번으로 돌렸다.
“본 용병단은 귀하와 30분 거리에 있다. 최대 스무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차량이 있다. 전력은 세 명으로 도움이 되지 않지만 탈출을 돕는 것이라면 가능하다. 이상.”
-꺄아아아! 부처님 알라님 하느님 염라대왕님 감사합니다!
이시백이 움찔거렸다. 여태껏 침착하게 SOS 신호를 보내던 양반이 갑자기 고음으로 환호성을 때려 버린 것이었다.
이시백은 과거 이 무선의 주인이 조울증을 겪었으며 항우울증 약을 상시 복용하고 있었다는 걸 떠올리며-몬스터 사냥을 2년 이상 지속하면 누구나 정신병 세 개쯤은 걸치게 되었다-침착하게 상대방의 교신을 기다렸다.
-참! 쓰리 바이 쓰리. 모빌에서 교신 중. 사망자 1명. 부상자 2명. 부상자까지 다 합쳐서 4명이 있다. 현재 진흙 멧돼지 스무 마리에 쫓기는 중. 고물 트럭으로 도망치고 있지만 20분 이내에 기름이 바닥난다. 중간지점에서 합류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급하게 떠벌렸다. 말하는 속도가 빠른데도 발음이 정확했다. 어투에 이상한 버릇도 없었다. 분명히 한국어인데도 마치 중국어나 영어처럼 자연스럽게 단어에 강약이 들어가서 거의 노래처럼 들렸다.
-아, 그리고 우리는 평양의 <의용단 용병단>입니다. 이상.
“…….”
이시백은 자기 예상이 맞았다고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윤시아와 순우경을 아득하게 초월하여 지옥불과 같은 이름 센스를 가진 상대에게 딴죽을 걸어야 할지, 아주 잠시 고민했다. 상대방의 괴악하기 그지없는 네이밍 센스는 전생에도 유명했다.
“수신 완료. 우리 백산 용병단은 개성에서 오늘 아침 11시경 출발했다. 반복한다. 우리 백산 용병단은 개성에서 오늘 아침 11시경 출발했다. 대표자의 이름은 이시백.”
이시백이 품 안에서 쪽지를 꺼냈다. 모든 용병단은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할 때, 혹은 도시에서 던전으로 원정을 떠날 때, 반드시 해당 도시의 헌터 청사에 신고해야만 했다. 이때 청사에서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용병단한테 코드를 발부했다.
“코드는 브라보, 찰리, 노벰버, 둘팔공하나. 반복한다. 코드는 브라보, 찰리, 노벰버, 둘팔공하나. 이상.”
-수신 완료. 귀하는 백산 용병단이며 오늘 아침 11시 개성에서 출발. 대표자 성함은 이시백. 코드는 B, C, N, 2801. 맞는지 확인해 주세요. 이상.
“아홉 시 뉴스 앵커가 부러워할 정도의 정확성이다, 의용단. 이상.”
무전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망자가 한 명 발생한 데다 몬스터 무리에 쫓겼다. 그런데도 구조를 요청하면서 웃음을 잃지 않는 여유가 있었다. 이시백은 평양 사수의 현장에서 누군가가 마지막까지 당당하게 미소를 짓던 장면을 기억했다.
-전부 카피되었습니다. 우리 의용단 용병단은 평양에서 이틀 전 아침 8시경에 출발했습니다. 우리 의용단 용병단은 평양에서 이틀 전 아침 8시경에 출발했습니다. 코드는 알파, 찰리, 찰리, 구구공칠. 코드는 알파, 찰리, 찰리, 구구공칠…….
스피커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폭발음이 연달아 터졌으며, 차바퀴가 끼이이익 브레이크를 거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도 이시백은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뒤, 무전기에서 상대방이 말했다.
-아, 대표자 이름은 유현도. 유현도입니다. 그런데 30분보다 조금 더 빨리 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게, 참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만.
여인의 목소리가 멋쩍게 웃었다.
-방금 바퀴 하나가 터져서 얼마 못 버틸 것 같습니다. 이상.
2
“후우.”
유현도가 무전기를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의용단은 자그마한 용병단이었다. 설립된 지 1년밖에 안 되었고, 정규 단원은 4명에 불과했다. 조금 전에 1명이 사망했으니 이제 3명이 남았다.
“정말로 도와주러 온대?”
유현도가 무전기를 거두자 옆에서 우락부락한 여인이 물었다. 여자는 미국 해병대 여군처럼 머리를 뒤로 묶었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팔근육이 어마어마한 것이, 웬만한 남자가 와도 저절로 기가 죽어버릴 법했다.
“응, 지금 개성 청사에 전화 걸어서 확인해 보려고.”
“우리가 죽기까지 기다렸다가 시체를 털려는 약탈범이라는 데 전 재산을 걸겠어. 세상에 무조건 구해주고 보겠다니, 그런 헌터가 어디 있어.”
“몰라. 우리가 ‘그런 헌터’를 최초로 목격하는 발견자가 될 수도 있지.”
유현도가 재빨리 휴대전화기를 만지작거려 개성 헌터 청사에 통화했다. 유능한 용병단이라면 자기네가 활동하는 영역의 청사들 전화번호 정도는 전부 외우고 다녔다. 긴급 회선을 쓰자 통화가 곧바로 연결되었다. 유현도가 서두를 자르고 말했다.
“특수 구조 상황. 본 용병단은 평양의 의용단 용병단입니다. 긴급코드 ACC9907. 예. 개성시에서 오늘 아침 11시경에 출발한 용병단 하나를 급하게 확인해 주십시오. 이름은 백산 용병단. 긴급코드 BCN2801.”
헌터 업계에 무조건적인 신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구조를 요청하는 것도,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도, 전부 속임수일 가능성이 있었다. 거짓말로 상대편을 끌어들인 다음 약탈하고 살해한다. 그런 범죄도 일상다반사로 일어났다. 따라서 전화가 가능한 경우에는 청사에 문의하여 상대의 신원을 확인해야만 했다.
“네, 책임자 이름은 이시백입니다……. 예? 잠시만요. 혹시 이전 경력은…… 일주일이요? 아, 아뇨.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현도가 떨떠름하게 통화를 끊었다.
근육의 여인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유현도의 반응이 이상한 걸 보아하니 구원투수로 오는 용병단은 가짜인 모양이었다.
“거 봐. 기대하지 말라니까. 우린 자력으로 도망치는 수밖에 없어, 언니.”
“신용 등급이 검은색이래.”
“뭐?”
“창설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용병단 신용 등급이 벌써 검정이래.”
유현도가 멍하게 허공을 쳐다보았다.
수초가 흐르고 나서야 유현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유현도가 근육의 여자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좋은 일을 하면 일주일 만에 신용이 최고 등급으로 매겨지지? 뇌물을 아무리 먹여도 빨간색이 최선이잖아. 검은색부터는 진짜 실적이 필요하다구. 그야말로 마을 하나를 구하는 정도의 실적으로!”
“아직 만나지도 못한 작자들한테 언니의 관심사가 향했다는 건 잘 알겠어.”
근육 여자가 수류탄에서 핀을 뽑아 쓱 던졌다. 암시장 기준으로 한 개당 5만 원짜리 수류탄은 트럭에서 튀어나가 공중을 휙휙 돌더니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바로 30미터 이내에서 트럭을 추격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괴성을 질렀다.
키이이이엑!
캬악, 키야아악!
폭발음을 뚫고 멧돼지 형상의 몬스터들이 달려왔다.
멧돼지는 털 색깔이 새카맣게 변질되었고, 온몸에서 검은색 진액이 흘러나왔다. 아가리에는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송곳니가 튀어나왔다.
멧돼지 떼거지가 땅을 밟자 근처의 수풀이 급격하게 시들었다. 그리하여 멧돼지들이 지나치는 길목마다 초록색의 수풀이 불쾌한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상공에서 바라보면 푸른 평원의 한복판에 검은색 도로가 일직선으로 뚫리는 것처럼 보이리라.
“시발. 하나도 안 먹히네.”
근육 여자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왜 C급 던전에 B급 몬스터가 수십 마리 모여 있는 건데. 이런 얘기 못 들었어.”
“최소한 마을 하나를 구한 영웅이 우리를 도와주러 오고 있다고! 세상에. 어쩌면 미래에 어마어마한 거물이 될지도 몰라. 어쩌지. 이제부터 잘 보여야 하는데!”
“그거 알아? 나 가끔씩 언니가 엄청나게 한심해.”
근육 여자가 창을 잡아서 던졌다. 창은 괴력과 함께 날아가서 멧돼지의 정수리에 박혔다. 멧돼지 몬스터는 잠깐 주춤거렸지만 코웃음을 치며 재차 돌격했다. 근육 여자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빌어먹을 B급 몬스터.”
“지금까지 이시백이라는 이름의 헌터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신문에도 인터넷 신문에도 언급되지 않았다구. 난 매일 <오늘의 헌터>랑 <사냥론>, <당신을 위한 로망>을 챙겨보는데 말이야!”
“빌어먹을 쪼다 언니.”
“이건 뉴스야, 나래야!”
유현도가 동생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유현도는 두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근육 여자, C급 헌터 장나래는 그 반짝거림을 지켜보며 매우 좋지 않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용병단이 창설되자마자 최고 등급을 매겨 줄 정도로 거대한 공을 세웠는데 어디에서도, 하다못해 찌라시에서도 언급이 안 돼. 무슨 뜻인지 알아? 적어도 시(市) 차원에서 정보를 틀어막았다는 이야기야!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아니, 한반도의 어느 누구도 모르는 곳에서 비밀스러운 서사시가 펼쳐졌다고. 그리고,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 서사시의 주인공이 지금 우리를 도와주러 오고 있다니까.”
“언니, 들어봐. 나도 어마어마한 뉴스를 하나 갖고 있어.”
장나래가 유현도를 쳐다보면서 등 뒤로 수류탄을 던졌다. 퍼엉 하고 폭발음이 요란하게 울렸건만 트럭 뒤 칸에 타 있는 두 사람은 일절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뭔데? 얼른 말해보렴.”
“우리는 아양리로 C급 던전을 탐사하러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B급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곳이었고, 습격을 받은 지 2분 만에 길잡이가 죽어버렸어. 임시로 고용한 헌터까지 심각한 부상을 입어 현재 앞 칸에서 끙끙거리고 있고, 우리에겐 B급 몬스터에 대항할 수단이 전무해. 설상가상으로 트럭의 기름이 떨어지기 직전인 데다 타이어에 빵꾸까지 났어. 따라서, 매우 논리적인 귀결에 따라, 지금 우리는 아주 좆됐어.”
“나래야, 나 화장을 해야 할까?”
“그리고 내 언니는 돌머리에다 맛탱가리가 가버렸지, 시발.”
장나래가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영웅이든 돈키호테든 아무나 좋으니까 제발 날 이 악몽에서 꺼내 줬으면.”
“이럴 수가. 깜빡하고 손거울이랑 빗을 안 갖고 왔어……!”
“당장 뛰어내려, 이 웬수야!”
트럭이 덜컹거렸다.
덩치가 3미터에 달하는 멧돼지들이 달리는 와중에, 두 여자의 말싸움이 계속되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을 말싸움이라 불러도 좋다면 말이다.
3
순우경이 소변을 누고 돌아오자마자 카라반 트럭은 질주했다.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울퉁불퉁한 대지를 돌파하건만, 트럭의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애당초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위해 만들어진 트럭이었다. 거대한 타이어가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맹렬하게 나아갔다.
“청사에 확인 완료했어요.”
윤시아가 휴대전화기를 접었다. 그녀는 샤워실에서 막 뛰쳐나와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렇지만 복장은 이미 완벽하게 전투용으로 갖춰 입었다.
“의용단 용병단은 이틀 전 아침 여덟 시에 나갔어요. 코드도 ACC9907로 확실하구요. 그런데 문제는 용병단의 신용 등급이에요. 파랑은 아니지만, 벌써 경고가 두 번이나 들어간 초록색이에요.”
“초록색?”
핸들을 잡은 순우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헌터 청사에서는 상시적으로 용병단들의 신용을 평가했다. 검은색이 제일 높았고, 빨간색이 다음으로 높았으며, 노란색이 중간, 초록색이 하급, 파란색이 최하급을 뜻했다.
“경고까지 먹었으면 완전 문제아라는 소리인데. 형씨, 이거 도와주러 가도 괜찮겠어? 시체털이범들 아니야?”
“나를 믿고 끝까지 가 봐라. 잘만 하면 대어를 건져 올릴 수도 있다.”
그때 창문 너머로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시백이 소리의 방향을 확인하고 미소를 머금었다.
“빠르게도 입질이 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