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달의 제국-46화 (46/142)

건달의 제국 46화

제7장 아 다르고 어 다르다(1)

1

“저 많이 예뻤어요?”

윤시아가 이시백의 품에 안겨서 속삭였다.

두 사람은 소파에 누워 있었다. 이 카라반 트럭의 소파는 침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제법 널찍한 덕분에 사람 두 명이 잠을 자도 괜찮았다. 다만 지금처럼 서로 껴안은 자세여야 했지만.

“글쎄, 옷이 날개라는 말이 참말이더군.”

“선배 애인이 개성서 제일 잘난 미인으로 뽑혔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내 안목이 적어도 저질은 아니라는 점에서 뿌듯했다.”

“냠.”

윤시아가 이시백의 귓불을 장난스럽게 깨물었다. 고양이 흉내를 내려는 것 같았다. 두 사제가 소파에서 계속 꽁냥거리자 저편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단장님요. 자문사 나리요. 댁들이 떡을 치든 말든 상관이 없는데요, 제발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도중에는 좀 얌전히 있어주면 안 될까요. 운전사는 제기랄 운전에 집중해야 하거든요?”

평양-개성 고속도로를 따라 질주한 지 두 시간째.

고속도로라고 부르기에는 군데군데 길이 끊어졌다. 한참을 우회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지역이 안전하냐 위험하냐는 계절에 따라 상당히 달라졌으므로, 운전사는 항상 최신 지도를 살펴보면서 카라반을 인도했다.

요컨대 신경 쓸 곳이 많았다.

아주 많았다.

그런데 저 커플은 여봐란 듯이 운전석 뒤편에서 꽁냥거리는 것 아닌가.

“시아 동생, 우리 관계가 살짝 스무스하지 못하다는 건 인정하겠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건 곤란하지 않나.”

“왜 그러세요, 순우경 호위대장? 전 그냥 놀고 있을 뿐인걸요.”

“빌어먹을 암표범 같으니라고.”

순우경이 이를 갈며 핸들을 강하게 쥐었다.

이시백과 윤시아가 놀아나는 소리는 무척이나 생생하게 들려왔다. 살과 살이 스쳤고 땀과 땀이 부닥쳤다.

목소리가, 윤시아의 간드러진 목소리, 아니, 일부러 순우경 보고 경청하랍시고 간드러지게 내는 목소리에 순우경은 진짜 돌아버릴 뻔했다.

더 악질적인 문제점은 오직 소리만 들린다는 것.

백미러로 뒤쪽을 살펴도, 두 사람이 생방송을 찍는 모습이 전혀 안 보였다. 절묘하게 시야의 사각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순우경은 차마 운전대를 포기하지도 못하고 120분 내내 귀고문을 당했다.

“슬슬 사리원에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이시백이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며 조수석에 털썩 앉았다. 카라반 트럭에 마련된 샤워실에서 몸까지 씻은 것이었다. 순우경이 썩은 동태 눈깔로 투덜거렸다.

“형씨, 서열을 정리해도 꼭 이런 식으로 정리해야겠소?”

“나는 가만히 있어야지. 신입 들어올 때마다 내가 나서서 서열을 정리해야겠냐. 마실 거냐?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거라 시원하다.”

이시백이 생수통을 건네주었다. 통에는 물이 아니라 냉커피가 담겨 있었다. 순우경이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커피를 마시는 와중 이시백이 묵묵하게 말했다.

“서열은 간부 차원에서 저절로 정리가 되어야 한다. 용병단장이 조율하는 것은 서열에 문제가 생겼을 때뿐이지. 공격 대장이 일반 단원을 알아서 다스리지 못하고, 부단장이 공격 대장을 알아서 다스리지 못하고, 자문사가 간부를 알아서 다스리지 못하면 어차피 그 조직은 무너진다.”

“…….”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에는 언제나 위엄과 믿음이 있어야 하지. 그런 관계를 어떻게 수립할 것인지는, 이제부터 시아가 차근차근 익혀 가야 할 과제야.”

순우경은 표정이 미묘해졌다.

“형씨는 역시 이상한 사람이구만.”

“중상모략이군. 내가 아는 사람을 전부 통틀어서 가장 상식적인 인간이 나다.”

“푸웁. 형씨 인맥이 존나게 작나 보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인데. 나, 시아 동생, 김태헌 사장, 대충 다섯 명 되는 거 아니여? 거참 표본으로 쓰기 좋은 집단이네.”

이시백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자기는 인맥이 매우 짧았다. 다섯 명이 아니라 열다섯 명은 된다며 반박하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어쩐지 더 서글프게 보일 것 같았다…….

“내가 이상하다고 말하는 부분은 연륜이라고 할까. 경험이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 거 있잖아. 형씨는 이제 스무 살인데……. 무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오해하지 말아. 아무튼, 이제 스무 살인데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저절로 경륜이 배어 나온다는 말이지.”

“그래서 신기하다?”

“질투심이 나기도 하고. 이놈은 대체 뭔가 싶기도 하고.”

이시백이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말리며 피식 웃었다. 발가벗은 상반신이 아직 물기에 젖어 있었다. 물방울이 이시백의 단단한 잔근육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 같은 사람은 전혀 대단하지 않다. 대단한 사람들은 따로 있지.”

“오호. 의외로 겸손한 세계관을 갖고 있네. 그럼 형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양반들은 누구요? 광주의 패권을 쥐고 있는 유운표?”

이시백이 코웃음을 흘렸다. 유운표는 전라도에서 가장 직책이 높은 ‘보스’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평양이 함락되었을 때, 개성이 쑥대밭이 되었을 때, 마침내 작전상 후퇴라는 명목 아래 서울이 버려졌을 때, 어느 순간에도 끝끝내 유운표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기 집안만 챙길 줄 알고 다른 건 보지 못하고 볼 수도 없는 소인배다. 어쩌다 부산의 중앙 정부와 인맥이 끈끈하여 세력을 유지하고 있을 뿐, 그 본질은 겁쟁이에 불과하니 감히 무서워할 까닭도 외경해야 할 까닭도 없지.”

“이거 재밌군.”

순우경이 낄낄거리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대구는 물론이고 경상도 전역에 손을 뻗친 박포신은 어때? 그 인물은 형씨가 말하는 ‘대단한 사람들’에 속할 만하잖아. 부산 짜바리들이 눈을 시뻘겋게 뜨고 있는 경상도에서 세력을 일으켰다고.”

“부산이든 어디든 완전히 깨끗한 동네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어차피 더러워질 구역이라면 자기네가 마음대로 부려도 좋은 꼭두각시 보스를 만들어둘 필요가 있지. 박포신이 비록 경상도 제일의 용병단장이라고 불리지만, 중앙 정부에 꼼짝없이 사로잡힌 바지사장이다. 빨대가 꽂힌 것도 아니고 빨대 그 자체인 사람을 뭐 대단하다고 받드나.”

“…….”

광오(狂傲)하기 이를 데 없는 발언.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이시백은 현재 한반도에서 누구나 경외하는 대부들을 무시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것처럼 평온하게 읊조렸다.

“자기 세력의 밑동이 잘려나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노인이야. 조만간 수하나 부속 용병단에 배신당하여 숙청당할 것이다. 바로 그 배신자야말로 경상도의 대부가 되겠지.”

“……서울 일대를 장악한 김진하는? 자그마치 이천 명이 넘는 헌터를 사병처럼 부리는데.”

“사이가 나쁜 용병단들을 억지로 연합이다 뭐다 엮어서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게 장만했으니, 가만히 내버려 둬도 언젠가 집안싸움으로 망할 거다. 용병단장은 한 명인데 부(副)단장급 인사만 여섯 명이야. 김진하만 죽으면 저절로 사분오열되어서 승냥이들의 칵테일파티가 벌어지겠지.”

“인천의 이시영.”

순우경의 목소리에서 점점 웃음기가 지워졌다.

“한반도에서 거의 유일하게 S급. 동아시아 전체를 두고 봐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이 괴물은 ‘대단한 사람’인가?”

“이시영이 나보다 한 살 어리니 이제 열아홉 살인가.”

이시백이 어쩐지 아련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시백과 이시영은 악연을 지니고 있었다.

이름이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해서 남매처럼 지낼 수도 있었겠지만 현실은 정반대. 이시백은 삼십 줄에 가서야 B급 헌터가 되어 온갖 고생길을 지나갔다면, 이시영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재능 덕택에 10대 때 이미 S급까지 올라섰다. 하지만 훗날, 이시영은 일신의 무력만 믿고 날뛰다가 이시백이 속한 용병단에 토벌당했다…….

“나이가 어린데 너무 강한 힘을 타고났어. 웬만한 문제는 자기 혼자서 해결하니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함께 연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설령 문제가 발생해도 자기 잘못이 아니라 부하들이 못나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버리지. 아무리 좋게 봐줘도 호위대장 수준의 인물이지 절대로 보스가 될 재목은 아니야.”

“허, S급 헌터가 겨우 호위대장이라고…….”

“죽어버리면 S급이든 E급이든 다 똑같은 시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자기 목숨도 챙기지 못하는 인간을 경계할 이유가 없다. 그런 의미였다.

순우경이 서서히 트럭을 멈추었다.

낡아빠진 아스팔트 도로 한가운데 카라반 트럭이 덩그러니 섰다. 순우경이 이시백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몹시 진지한 눈동자였다.

“그럼 대체 형씨가 대단하다 여기는 인물이 누구요?”

“서울 강남의 동태상. 평양의 유현도.”

그리고 서울 강북의 원서.

이시백이 낱말 그대로 목숨을 바쳐서 충성할 용병단장.

이시백은 그러나 원서의 이름을 목구멍에 집어넣었다. 아직 그분의 이름을 누군가에게 꺼내놓기 싫었다.

“……두 사람 다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다행이군. 앞으로 50년 동안 그 이름만 듣고 살 테니. 아직 지겹지 않을 때 외워둬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명심하도록 하지, 형씨.”

순우경이 운전석에서 일어나 트럭 밖으로 나갔다. 순우경은 트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변을 보았다.

이시백이 조수석에 몸을 파묻었다.

‘유현도는 아직 평양에서 자그마한 밀주(密酒) 용병단이나 꾸리고 있을 거다. 우리랑 규모가 비슷하겠지. 세 명, 아니면 네 명……. 그들을 이번 기회에 흡수하면 좋을 텐데.’

미래에 이름을 떨칠 헌터들을 미리 수집한다.

유현도는 한 번 신뢰를 주면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인간이었다. 과거에 유현도가 맞이한 죽음이 그걸 증명했다. 모든 용병단, 더군다나 중앙정부조차 북방을 포기하고 후퇴할 때조차 유현도는 마지막까지 평양에 남았다.

수만 마리의 몬스터가 몰려오는 평양에서 유현도는 텔레비전 연설을 송신했다. 전설로 길이 남을 <평양 사수> 연설이었다.

-한 번 물러선 자는 영원히 물러서고.

-한 번 물러서지 않은 자는 영원히 물러서지 않습니다.

-시민을 버리고 물러선 자는 결코 다시는 시민을 되찾지 못하며, 도시를 버리고 물러선 자는 결코 다시는 도시를 되찾지 못합니다. 그리고 저는 시민이 없고 도시가 없는 정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평양 시민과 평양을 내버려 두고 도망치는 것은 비단 한반도의 일부분을 포기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뢰의 파멸이자 국가의 붕괴입니다.

-저는 아직 여러분께 신뢰로 맺어진 관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갈가리 찢겨 나간 한반도에 다시 만인의 계약에 근거한 국가가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시민 여러분. 저는 내일의 신뢰를 위하여 오늘의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연설이 끝난 직후, 유현도는 그녀를 따르는 삼백 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텔레비전 방송은 그 장면들까지 담아냈다. 삼백 명에는 헌터뿐만이 아니라 종군 기자 여섯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자들은 몬스터의 파도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핏물이 튀기는 현장에서 마이크를 붙잡고 카메라를 돌렸다. 그리고 삼백 명이 몬스터의 이빨에 찢어지는 광경이 이어졌다…….

‘평양을 잃으면 개성을. 개성을 잃으면 서울을 잃는다.’

결국 유현도가 옳았다.

이시백은 그녀의 사상에 공감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안목에 동감했다. 그렇다면 유현도와 굳이 대립각을 세울 필요가 없었다.

부하로 삼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였고, 하다못해 든든한 아군이 되어주면 고마웠다. 이시백은 평양에서 처음으로 착수할 작업의 목표를 유현도로 잡았다.

그리고.

-구조 요청. 구조를 요청합니다.

그 기회는 이시백의 계획보다 훨씬 더 빨리 왔다.

운전석에 부착된 라디오에 희미한 잡음이 흘러나왔다. 황해도 지역의 모든 헌터가 공용으로 쓰는 채널이었다. 목적은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했을 때 주변의 다른 헌터들한테 SOS를 보내는 것.

-현재 위치 B332, A561. 구조를 요청합니다. 반복합니다. 현재 위치…….

이시백이 미소를 지었다.

라디오의 목소리는 그에게 무척이나 익숙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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