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45화
제6장 양손에 악의 꽃 (5)
이시백 일행은 보름 동안 개성에 머물렀다.
보름이라는 공백이 생겨나자 일행은 각자 자기의 관심사에 매달렸는데, 이때 첫 번째 관심이란 당연하게도 앞으로 명찰을 달게 될 용병단의 이름이었다.
윤시아와 순우경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허공누각(虛空樓閣)으로 해요.”
“아니, 천마(天魔)로 하는 편이 월등하게 좋대도.”
두 사람이 서로를 맹렬히 노려보았다.
그 기세는 바야흐로 각 학교의 일진들이 껌을 씹으며 대치하는 수준.
“하아? 천마라니? 바보 아니에요? 완전 겉멋밖에 안 들었잖아요. 마? 마왕 할 때 그 ‘마’자 말하는 거죠? 하아, 이래서 남자들이란. 괜히 천이니 마니 으리으리한 한자를 붙이면 다 멋지다고 생각하나 봐요. 아저씨는 세상이 단순하게 보여서 참 좋겠어요.”
“동생이야말로 심각하게 겉멋을 부리고 있는 것 같은데.”
순우경이 입꼬리를 부들거렸다.
“허공? 누각? 도대체 어떤 머저리가 그런 단어를 용병단에 쓰나. 적어도 천마는 다른 사람들한테 위압감을 주는 울림이라도 있지 허공누각은 그냥 쌩 느낌밖에 없어. 무슨 느낌인 줄 알아? 아, 이런 이름을 가진 용병단은 정말로 병신이겠구나, 하는 느낌이 강렬하게 풍긴다고.”
“저는 자문사예요. 아저씨는 호위대장이고요. 제가 까라면 까세요.”
“오오, 벌써 권력을 동원하시겠다? 내 이름은 윤시아, 열여섯 살인데도 용병단에서 자문사를 맡은 천재― 내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어떤 남자라도 불알을 튀겨 주겠어― 무서워라, 무서워라. 어디 나 같은 평민은 황후마마가 두려워서 숨이라도 쉬겠나.”
순우경이 어설프게 윤시아를 성대모사하며 조롱했다. 윤시아의 부드러운 이마에 힘줄이 두드러졌다.
“천마는 절대 안 돼요. 제 소속을 소개할 때 ‘천마 용병단입니다’라고 말하는 꼬라지는 죽어도 못 봐요. 차라리 청룡 용병단이나 백호 용병단처럼 아예 쌈마이한 걸로 해버리던가요, 이 센스 없는 실자지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물건은 20㎝야.”
순우경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윤시아 역시 기세에서 밀리기는커녕 얼굴을 마주 댐으로써 맞받아쳤다.
“동생 같은 애송이가 나한테 한 번 걸리면 그날로 너덜너덜한 중고품 되는 거라고. 흐, 뭣하면 오늘 밤 당장 증명해 줄 수도 있는데.”
“하, 본판 뛰기 전에 BJ로 전투 한 판 들어가는 건 어때요. 이참에 이빨로 물어뜯어서 아저씨의 물건을 다이어트시켜 줄 의향이 있는데요. 게다가, 선배! 이거 엄연히 성희롱이에요! 선배의 첫 번째 부하이자 애인이 불법적으로 성희롱을 당했다구요!”
“시버럴, 지금 살인까지 저지른 애가 성희롱을 탓하는 거여? 야아, 한반도의 법률이 존나게 아름답구만.”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서 이시백을 쳐다보았다.
“선배, 아저씨인지 저인지 한 명 골라주세요. 허공누각이 좋죠?”
“형씨, 이건 남자들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감성이라니까. 여기선 당연히 천마지?”
이시백이 한숨을 쉬었다.
이 자리에 모인 세 명은 향후 용병단에서 핵심적인 간부진으로 취급받는다. 제아무리 이시백이 보스라 할지라도 최고위 간부의 의견은 경청할 필요가 있었다.
“솔직히 두 사람의 네이밍 센스가 전부 형편없다고 생각한다만…….”
“누가 더 형편없는데요, 선배? 그게 중요한 거라구요. 이 실자지 아저씨보다 센스가 좋기만 하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형씨. 누가 최악인지만 정해 줘.”
너희 둘 사실 사이가 좋은 거 아니냐.
이시백은 무심코 그런 말을 내뱉을 뻔했다. 천만다행으로 이시백에게는 두뇌가 있었으며, 불난 집에 기름을 부어서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을 간파할 정도의 지능이 소지되었다.
“일단 순우경이. 질문이나 해보자. 왜 하필 천마냐?”
“내가 평소에 무협지를 많이 읽는데 천마라는 단어가 멋지더라고.”
“시아야, 왜 허공누각이냐?”
“왠지 어감이 허공도 멋지고 누각도 멋지잖아요. 멋진 거랑 멋진 게 합쳐졌으니 두 배로 멋지잖아요. 이건 하늘이 내려주신 이름인 게 분명해요.”
하늘이 아니라 지옥이겠지 하고 순우경이 중얼거렸다. 윤시아가 다리를 들어서 순우경의 발등을 내리찍었다. 가냘픈 비명이 울렸다.
이시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빠르게도 새로운 용병단의 간부진이 어떤 문제점을 품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들의 이름 센스는 괴멸적으로 처참했다.
“짧고 굵게 백산(白山)으로 간다. 이건 단장 명령이다.”
두 사람이 뭐라고 항의했지만 이시백은 능숙하게 협조를 이끌어냈다. 백산은 백두산을 암시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고봉이다. 꼭 그처럼 우리 용병단도 한반도 제일의 조직이 되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더군다나 단장의 이름이 우연찮게도 이시백(李時白)이지 않은가. 흰 백(白)이 들어가니 일종의 언어유희도 즐길 수 있다.
“선배가 정 그렇다면…….”
“아니, 뭐. 괜찮은 것 같기도…….”
이시백의 유창하고도 단단한 설득에 두 사람이 넘어갔다.
이시백이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니, 정말로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다른 용병단들 앞에 나아갈 때 ‘나는 허공누각의 이시백이다’라는 대사를 읊었을지 몰랐다. 그리고 자신은 쪽팔림에 견디다 못해 스스로 혀를 깨물었겠지. 자살하지 않게 되어서 참으로 잘 되었다.
일행의 두 번째 관심사.
이시백은 용병단 전용으로 으리으리한 캠핑카를 구입했다. 4억짜리 중견 캠핑카였다. 이제부터 개성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이런저런 몬스터 지대로 이동하는 일이 잦아질 터. 그때마다 다른 카라반에 얹혀서 가면 여러모로 불편했다.
“세상에. 트럭 안에 침대가 있어요.”
“이런 거 몰고 다니는 용병단은 진짜 부자들밖에 없는데…….”
거대한 트럭 캠핑카를 바라보며 윤시아와 순우경이 입을 벌렸다.
이시백이 중고차 매물상에게 서류를 건네받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원래는 16억까지 호가하는 녀석이다. 중고이긴 해도 두 달도 안 썼어. 마침 매물로 좋게 나와서 구입했다. 싸게 구입한 거니까 아까워하지 말고.”
“어, 어떻게 하면 16억짜리 트럭 캠퍼를 4억으로 후려칠 수 있나요.”
“요즘 경찰이랑 검찰이 개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지 않느냐. 거기서 잘못 걸린 대형 용병단이 세 곳쯤 된다. 얼른 현찰을 확보해서 가벼운 몸으로 튀어야 하니까,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사치품부터 헐레벌떡 처리하는 게지.”
이시백이 서류에 서명했다. 중고품 매물상은 연신 허리를 조아리면서 감사의 인사를 반복했다. 이틀 안에 구매자를 찾아야 한다는 임무를 달성했으니 매물상도 신날 만했다.
“덕분에 트럭 내부에 쓰일 가구와 장식도 거저 넘겨받았지. 그래도 장식이 마음에 안 들면, 시아야. 네 마음대로 바꿔 봐라.”
“굉장해……. 자, 장사란 이렇게 하는 거군요.”
“우리 백산의 아지트가 될 거야.”
검은색 캠핑 트럭이 햇볕에 반짝거렸다.
참고로 운전수는 순우경이 맡기로 했다. 이시백이 운전하겠다고 나서자 윤시아가 그야말로 결사적으로 반대한 탓이었다. 예전부터 캠핑카를 꼭 몰아보고 싶었던 이시백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관심사.
기생 협회에서 개최하는 견습 기생 심사가 자남산(子南山) 꼭대기에서 열렸다.
산이라고 부르기보다 약간 높은 언덕이라 불러야 할 이곳은 개성 한복판에 위치했다. 본래 견습 기생 심사는 호화로운 축제였다.
개성의 모든 유곽에서 유망주들을 보내 자기 가게가 얼마나 뛰어난지 뽐냈으며, 시민들도 어린 소녀들의 춤과 기예를 즐겁게 구경했다.
“사람이 적군.”
“뭐, 수색이 한창이니까.”
하지만 이번 늦여름에는 달랐다.
경찰과 검찰의 대대적인 수색으로 인하여 내로라하는 유곽들이 전부 몸을 움츠렸다. 아무리 적어도 백 명의 견습 기생이 경연에 나오게 마련이었는데 이번에는 고작 스무 명. 개성의 창관 산업이 얼마나 얼어붙었는가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형씨, 오뎅 하나 먹을텨?”
“이 더운 여름에 오뎅은 무슨 오뎅이냐.”
“노점상이 파리만 날리고 있잖아. 우리라도 팔아줘야지.”
축제의 규모가 작아지자 시민들도 참여하지 않았다. 야외에 플라스틱 의자가 천 석 가까이 늘어섰지만, 자리를 차지한 시민의 숫자는 일흔 명이 채 되지 못했다. 혹시나 하고 축제에 몰려든 노점상들은 한숨을 푹푹 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일흔 명의 손님.
일흔 명 가운데 서른여섯 명은, 이시백에게도 순우경에게도 낯이 익었다.
“우리 막내가 잘할까.”
“아무렴, 누가 키운 아이인데. 향금산 최고의 수재라구.”
“하지만 이제 견습 딱지 붙은 지 두 달밖에 안 됐는걸.”
“아휴, 언니들. 걱정하지 좀 마. 이쪽이 불안에 떨면 시아도 긴장한다니까.”
바로 향금산 유곽의 기생들이었다.
기생들은 오늘이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쁜 치파오를 입고 있었다. 그녀들의 작업복. 이른바 홀복이었다. 김태헌 사장이 죽은 그날부터 향금산 유곽은 문을 닫고 종업원 전원한테 무제한 휴가를 내렸는데 말이다.
-그럼 이제부터 54회 견습 기생 심사를 시행하겠습니다. 먼저 호명하는 순서대로 나와 주십시오. 1번, 태공산맥 유곽의 후보생 김나래…….
단상에 올라선 심사위원이 견습 기생들을 차례차례 호명했다.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나와서 관중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불과 일흔 명의 관객. 그렇지만 여자아이는 최선을 다해서 예의 바르게 심사에 응했다.
일흔 명이든 일곱 명이든, 여자아이에게는 이것이 최초의 공연이었다. 개성 기생의 이름을 달고 처음으로 손님들한테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다음. 4번, 백은수 유곽의 후보생 배유진.
기생들은 한 명씩 무대에 올라와서 춤과 재주를 뽐냈다. 본래 다섯 명이 한꺼번에 불려와 심사를 보았으나 이번에는 후보가 지나치게 적은 관계로 한 명, 한 명 정성스레 심사를 보기로 했다. 협회에서 나온 심사위원들의 표정도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어쩜 좋아. 나 시험 볼 때보다 가슴이 떨려 죽겠네.”
“그러니까 긴장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
기생들이 울상을 지으며 수군거렸다.
마침내 차례가 다가왔다.
-다음. 12번, 향금산 유곽의 윤시아 후보생.
윤시아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기생들이 벌떡 일어섰다.
마땅히 기생이 갖추어야 할 요조숙녀로서의 체면도 몸가짐도 잊어버린 채, 기생들이 마구마구 팔을 흔들었다.
“우리 시아 화이팅! 화이팅!”
“다른 애들을 짓밟아버려!”
“향금산 최고의 천재가 어느 수준인지 보여 주는 거야!”
격렬한 응원에 다른 손님들이 깜짝 놀랐다. 다만 심사위원들은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왜 기생들이 심사회장에 몰려 왔는지, 왜 저토록 자기 식구를 응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
무대로 윤시아가 올라왔다.
그때 처음으로 이시백은 윤시아의 전용으로 맞춤 제작된 기생복을 보았다.
일종의 개량 한복. 속이 언뜻 비추게 만들었지만 품이 넓어서 천박해 보이지 않았다. 약간 하얗게 내려앉은 얼굴 화장도 잘 어울렸다. 소녀의 눈부신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었다.
천천히 음악이 흘러나왔고.
윤시아가 가볍게 춤을 추었다.
“…….”
관중이 숨을 죽이고 윤시아의 연무를 바라보았다.
팔동작, 다리동작 하나하나가 애틋했고 절묘했다.
윤시아가 서서히 팔을 움직일 때마다 기다란 옷자락이 허공에 흘렀고, 윤시아가 사뿐히 발을 내디딜 때마다 치맛자락이 바닥을 스치듯 흩날렸다. 춤은 완벽했다. 기생들은 끝끝내 숨을 죽였다.
그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기생도 있었다.
동료의 어깨를 안아주는 기생도.
지배인 순우경은 어쩐지 먼 눈길로 저편의 무대를 바라보았다.
여름이 저물어가는 무렵.
향금산 유곽은 마지막 기생을 배출하고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향금산의 마지막 졸업생은 압도적인 수석으로 심사에 합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