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달의 제국-44화 (44/142)

건달의 제국 44화

제6장 양손에 악의 꽃 (4)

4

일행은 근처의 요릿집에 자리를 잡았다.

순우경이 툴툴거렸다.

“나 원 참. 아무리 말이야, 응? 헌터들이 인축의 무간지옥에서 살아간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그렇게 내팽개치고 휑 가버리면 안 되지. 도의가 땅에 떨어졌어.”

순우경은 딤섬을 열심히 집어 먹었다. 이시백과 윤시아는 맞은편에 앉아서 순우경을 째려보고 있었다.

세 사람이 자리한 곳은 딤섬 전문 요릿집으로, 지금 한창 손님이 붐빌 무렵이었다. 종업원이 바쁘게 홀을 돌아다니면서 대나무 찜기를 서빙 했다.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가게의 구석에서 순우경이 말했다.

“나는 이래 봬도 약속을 지킨답시고 어떻게 동결된 자본에서 꾸역꾸역 이억을 맨들어서 가져왔는데. 그까짓 노출 플레이 좀 막혔다고 불알을 까버리고. 시아 동생,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돼. 사람들한테 섭섭함을 남겨두면 결국 그게 화근이 되어버린다니까.”

“화근을 안 남기도록 뿌리째 뽑아버리면 되겠네요.”

“허허, 이거 오늘따라 고량주가 참 맛있네. 허허허. 아가씨, 여기 쌍찐빠우(生煎包) 한 접시 더 갖다 주구랴.”

순우경이 딴청을 피우면서 딤섬을 추가로 주문했다. 소인배인지 대인배인지 모를 넉살이었다. 윤시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젓가락으로 딤섬을 쿡쿡 찔렀다.

이시백이 고량주를 들이켰다.

“음, 역시 자본이 전부 동결되었나. 향금산은 어떻게 될 예정이라던가?”

“부산 애들이 그래도 도리를 알아. 나한테 적당히 결정권을 주는 거 아니겠어. 계속 영업할 수 있게 배려해 주겠다네. 뭐, 형식상 가게 이름도 바꾸고 그래야겠지만.”

순우경이 새우 딤섬을 쩝쩝거렸다. 식사하는 버릇이 나빴다. 유년 시절을 제대로 된 곳에서 보내지 못했다는 증거. 이건 이시백이나 윤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여하간 장사는 접을 생각이야.”

“왜? 이제 사장도 없어졌으니 향금산은 온전히 자네 소유다.”

“기생 명부 불태워 버리고 우리 아이들 풀어주려고.”

가게에 묶인 기생들을 전부 해방한다.

한 명, 한 명의 값어치가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해당했다. 일패 기생은 십억 이상을 호가하기도 했다.

그런 보물단지들을 버리겠다는 말을 하면서도, 순우경은 마치 껌딱지 하나를 땅바닥에 뱉은 것처럼 어조가 평범했다.

상아색 젓가락으로 딤섬을 낚아채는 것만이 순우경의 현재 관심사인 듯했다.

“애들이 없어지는데 장사를 계속할 수는 없잖아. 잘됐지. 이 기회에 손 털 거야.”

“아깝지는 않나?”

“아, 겁나게 아깝지. 요즘도 그거 아까워서 밤잠을 설친대도. 막 변비에 시달리고 그래. 평생 똥 싸는 거 때문에 고생해 본 적이 없는데.”

“……지금 저희 밥 먹고 있거든요, 아저씨.”

윤시아가 썩은 얼굴로 쏘아붙였다. 순우경이 껄껄 웃었다.

“그런데 뭐 다 그런 거 아니야? 아깝지만 참고. 참아도 아쉽고. 거기서 나가리 되면 그 사람은 계속 아쉬운 거 붙잡는 아쉬운 인생 되어버리는 거고, 포기하면 인생도 조금 덜 아쉬워지는 거지.”

“개성에 아주 현자가 탄생했군.”

“내가 원래 소싯적부터 똑똑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형씨는 어찌 여길지 몰라도 난 인생이 하나씩 버려 가는 과정이라 생각해서. 돈 놓치기 아까워서 계속 돈 붙잡고 있고. 여자 놓치기 아까워서 계속 그 여자 붙잡고. 다 좋아. 다 붙잡는 데 성공한다고 쳐. 그런데 죽을 때는 어쩔 거야? 아까운 돈이랑 여자랑 전부 여기 두고 떠나야 하는데 거 아까워서 어떻게 견뎌.”

순우경이 식당용 스텐 물컵에 고량주를 줄줄 따랐다.

“이거 아깝다 저거 아깝다 줏대 없이 쫓아가는 놈들은 결국 지 죽을 때도 워매, 아깝다! 너무 아까워! 하고 죽을 양반들이야. 내가 그런 건 폼이 없어서 견디지를 못해요. 사람이 살면서 하나씩 버릴 준비를 해야지 뒈질 때도 어따 가볍구만, 하고 이짝에서 저짝으로 건너가지 않겠어.”

이시백이 실소했다. 여전히 재미있는 놈이었다.

“말투를 보아하니 기생들한테 전별금까지 얹혀서 보낸 것 같은데.”

“딱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만 붙여 줬지.”

순우경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람들한테 섭섭함을 남겨두면 큰일이 나버리니까.”

어조는 가벼웠지만 어디 말의 내용까지 가볍겠는가.

순우경은 향금산 유곽을 처리하면서 남은 돈 대부분을 기생들한테 쾌척했다.

너무 많아서 다 받지 못하겠다며 곤란해하는 기생들마저 있었다. 그때마다 순우경은 이게 네 혼자의 돈이 아니라 사장한테 죽어나간 동료의 몫까지 합친 거라며 다독였다.

기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절을 올렸다.

“전부 형씨 덕분이야.”

순우경이 고량주를 기울이고 미소를 지었다.

“명부 빼내려면 가게 쪽만이 아니라 협회에서도 허가를 내려줘야 하거든. 보통 잘 안 빼주지. 빼려고 해도 기름칠을 잔뜩 맥여야 하고. 그런데 이번에는 부산서 온 경찰이랑 검찰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잖어. 협회에서도 문젯거리가 된 기생들은 얼른 잘라야겠다 싶은 거지. 매우 매우 부드럽게 처리가 됐쓰.”

“불행 중 다행이로군.”

“특별히 형씨한테 다행이지.”

순우경이 무릎에 올려둔 서류 가방을 식탁으로 옮겼다.

“덕분에 2억을 제대로 챙길 수 있었으니까.”

현금 이억 원.

며칠 전에 선불로 건네준 일억과 합쳐서 총 삼억.

사실 순우경은 이시백한테 보수금을 일절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계약에 얼마를 건네주겠다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순우경이 삼억을 챙겨준 것은, 순전히 이시백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시백은 순우경을 처리하는 대가로 김태헌 사장한테 삼억을 받을 수 있었다. 적어도 그런 약속이 오갔다. 하지만 이시백은 사장을 택하는 대신 순우경을 선택했고, 덕택에 순우경은 목숨을 부지했다.

그것에 대한 예의.

그리고 감사.

말하자면, 순우경은 끝까지 도의(道義)를 지켰다.

“이거 나한테 줘도 괜찮냐.”

“어따. 형씨 눈에는 바보로 보여? 내 몫은 단단히 챙겼어. 나도 이억쯤은 있으니까 걱정하질 마쇼.”

순우경이 실실 웃었다.

수백억 자산을 기생들한테 나눠주었다. 거기서 남은 몇 억을 또 이시백한테 절반가량 나눠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차지한 몫은 이억 원. 결코 작지 않은 금액.

그러나 순우경이 욕심을 부렸다면 이억의 백 배도 독차지할 수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한없이 작았다…….

“이다음에는 뭐 하면서 먹고 살려고?”

“글쎄. 일단 천천히 생각해 봐야지. 워낙 계획에도 없이 일을 싸질러서.”

순우경이 입에 젓가락을 문 채로 팔짱을 꼈다.

“기생 업계에서 다시 일하기는 죽어도 싫고. 달리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 헌터답게 근근이 몬스터나 잡으면서 먹고 살아야지 싶은데.”

“순우경, 댁은 몬스터보다 사람 써는 게 적성에 맞아.”

“그거 칭찬이 아니라 욕이여, 형씨.”

이시백이 고개를 저었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

“…….”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용병단을 차릴 생각이다. 자본을 갖추었으니 이제 바로 설립해야지.”

순우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본만 있으면 뭐해? 단원들은 차차 모으면 된다 쳐도, 자문사는? 호위대장이나 뭐 간부는 어떻게 모으려고?”

“자문사는 시아가 맡는다.”

이시백이 윤시아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윤시아는 입술을 샐쭉거리며 장죽에 라블린시아를 꾹꾹 눌러 담았다. 어지간히도 순우경이라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호위대장은 너가 맡아.”

“캬아. 스무 살 용병단장에다 열여섯 살 자문사라. 구성 한번 끝내주는구만.”

순우경이 빈정거렸다.

자문사는 용병단의 두뇌를 담당했다. 군사(軍師) 혹은 책사라 봐도 무방했다. 용병단의 사업 전반에도 깊숙이 관여하므로 사업적인 감각과 회계 능력이 필요했다.

부정적인 사업을 거의 필수로 끼고 가는 용병단에 있어서, 자문사는 양날의 검과 같았다. 만약 자문사가 용병단의 정보를 라이벌이나 경찰에 팔아넘기면 끝장이었다.

그렇기에 용병단에서 자문사는 가장 충성심이 높은 인물이 맡았으며, 마땅히 용병단장 다음가는 2인자로 대접받았다.

“형씨, 고깝게 듣지 마. 열여섯 살 애송이한테 자문사를 맡기는 용병단을 세상에 어느 누가 믿어줘. 이건 그냥 단순한 상식이잖아.”

“시아는 마약상의 회계를 3년 넘게 다뤘어. 그 마약상은 의정부에서 가장 발이 넓었다. 나이와 별개로 경험과 감각은 이미 충분히 있다.”

“……경험과 감각의 문제가 아니야. 나도 저 아가씨 배짱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봐서 알아. 근데 사람들이 무시한다니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시하는 돌대가리들이 널린 게 이쪽 업계야. 게다가 나이도 어리다? 이건 무시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으로 취급당할걸.”

“흐.”

이시백이 비소를 흘렸다.

“용병단을 네 개쯤 없애버리면 대놓고 무시하는 놈도 없어지겠지.”

“…….”

순우경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잦아들었다.

“다른 용병단들을 없애?”

“준비가 끝나는 대로 평양으로 올라갈 거다. 평양은 이미 용병단이 포화가 된 상태이니 말이다. 그럴듯하게 자리를 잡으려면 용병단 네다섯 개는 밀어버려야지.”

“고작 세 명 가지고서? 어떻게?”

“향금산도 우리 두 명 때문에 무너졌다. 똑같은 일을 못하리라는 법이 없지.”

순우경이 이시백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형씨, 목적이 뭐요?”

“재활용이 불가능한 쓰레기들을 청소하는 거.”

이시백이 즉답했다.

“법도 도리도 없는 업계다. 경찰이든 검찰이든 높으신 양반들의 사정에 따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지. 코앞에서 불길이 나고 있는데 엉덩이가 무거워서 움직이지도 않을 놈들이다.”

“바깥에서 못 바꾸니 안쪽에서 바꾸겠다고? 허. 현실주의자인 줄 알았더니 인제 보니 택도 없는 몽상가였네. 형씨가 난장판치고 다니면 뭐, 다른 용병단들은 병신이게? 형씨가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아채고 제거해 버릴걸.”

“들키지만 않으면 범죄도 아니야.”

이시백이 고량주를 자기 술잔에 따르고 순우경의 컵에 따라주었다. 술이 물잔에 차는 소리가 울렸다.

“끝까지 동족인 척 굴 거다. 권력욕에 미친놈처럼.”

“그러다 경찰들 눈 밖에 나면 어쩌려…….”

순우경이 눈썹을 찌푸렸다. 무언가 깨달았다는 눈치였다.

“……그렇군. 그래서 하필 부산에서 불러들였나. 향금산은 애당초 그걸 위한 희생물이었냐. 거기서 이미 모든 계획을 짜두고 움직인 거냐…….”

“정확하게 말해서 김태헌이 희생물이었지.”

“형씨, 기생들이 불쌍해서 이런 짓거리를 저지른 게 아니었군.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어.”

“부정하지 않겠다.”

“그럼 뭣 때문에 쓰레기들을 청소하겠다는 건데? 정의감 때문도 아니잖아. 형씨부터 이미 목적이랑 수단이 바뀌어 있는데 내가 뭘 어떻게 믿어?”

이시백이 술잔을 들었다.

“믿지 못하면 믿지 못할수록 옆에서 감시해야지 않겠나.”

“호오. 여차하면 호위대장인 내가 형씨의 목줄을 따버려도 좋다?”

“나는 그쪽의 충성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순우경, 부디 자네의 신념대로 살아. 거기에 내가 어울리면 잘 따라주고, 안 어울린다 싶으면 이쪽의 멱줄을 따버리고. 상당히 간단한 문제 아닌가.”

순우경이 헛웃음을 흘렸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기색이었다.

“살다 살다 지 모가지 따달라며 들어오는 섭외는 처음이구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

“아니, 됐어.”

순우경이 물컵을 들었다.

순우경은 팔을 내밀어서 이시백의 술잔을 툭 건드렸다. 투명한 술 몇 방울이 바깥으로 튀었다.

“재밌을 것 같네. 은퇴하고 할 일도 없겠다, 까짓것 한번 해보지.”

순우경이 술을 한 번에 다 비우고 히죽 웃었다.

“조심해, 형씨. 길 조금만 잘못 들었다 싶으면 내가 뒷목을 후려칠 거니까.”

“그거 무척 기대되는군.”

이시백이 천천히 술잔을 기울였다.

일주일 뒤, 개성의 헌터 청사에서는 한 용병단의 설립을 통과시켜 주었다.

용병단의 이름은 백산(白山).

과거 이시백이 한때 몸을 담았던 곳이자, 서울의 북변을 호령했던 조직이지만,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이름의 용병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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