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41화
제6장 양손에 악의 꽃(1)
1
이시백이 노곤한 눈꺼풀을 들었다.
조금 지나치게 해버린 것일까. 오랜만에 허벅지가 딴딴하게 땅겼다.
‘애 앞에서 자제하지는 못할망정.’
어젯밤은 정말로 자기답지 않게 과하게 운동했다.
‘넘어갔다. 홀라당 넘어갔어.’
이시백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이시백은 윤시아를 배려하여 적당히 끝내고자 했다.
상대방에게 이번이 첫 경험. 파트너를 배려하면서 차근차근 부드럽게 나아가면 고통을 줄 일도 없었다만, 최대한 배려해야 마땅했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터졌다.
“머엉.”
수영실에서 첫 번째 라운드를 끝마치고, 두 사람이 욕탕에 몸을 담갔다. 일본풍 히노키(檜)로 만들어진 노천탕이었다.
이시백은 뜨끈한 온수가 근육을 풀어주는 느낌을 즐겼다. 한편 윤시아는 새끼 캥거루처럼 이시백의 품 안에 쏙 들어갔다.
“머어엉.”
“아까부터 왜 자꾸 멍멍거리냐.”
“상상했던 거랑 너무 달랐어요.”
아무래도 첫 경험의 후유증에 잠긴 모양이었다.
어쩐지 귀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이시백은 물기에 젖어 곱슬거리는 시아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질해 주었다. 여자의 머리에 절대로 손대지 않는 이시백으로서 가장 친근한 제스처였다.
“조금 더 부드럽게 할 걸 그랬구나. 미안하다.”
“아뇨, 그게 아니라. 저도 엄청 아플 거라고 생각해서 각오했는데.”
윤시아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지. 무진장…… 좋았어요.”
여기서 이시백이 잠시간 일시정지.
머리카락을 빗는 오른손마저 멈추었다.
“뭐?”
“하나도 안 아팠어요. 기생 언니들이 거짓말을 했나 봐요, 선배.”
윤시아가 몸을 돌려서 이시백한테 찰싹 달라붙었다. 욕탕에서 올라오는 증기 때문인지 윤시아는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하, 한 번만 더 해보면 안 될까요?”
감히 이러한 요청을 어느 남자가 거부할까.
요컨대 이시백이 지나치게 파트너를 배려하는 바람에, 혹은 배려해 준 덕택에, 윤시아는 비밀스러운 어른의 세계에 눈을 떠버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2라운드는 수중전.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체력의 소모를 강요하는 목욕탕에서 치렀다. 강도 또한 제1라운드에 비해 훨씬 격해졌다. 이시백은 어찌어찌 버텨냈다.
하지만.
“선배, 주무세요?”
“아직 안 자고 있다만.”
침대에 누운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이시백의 허벅지에 다리를 꼬아오는 것 아닌가.
이시백은 이 맹랑한 몸짓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참으로 난감했다. 남자는 여자와 달랐다. 몇 번이나 연속으로 갈 수가 없었다. 현재 윤시아와의 전력비를 대충 따져보자면 15:1.
이시백은 하나의 목숨으로 저쪽을 열다섯 번이나 물리쳐야만 했다.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후배는 그걸 알고는 있을까.
“저기…… 야한 여자는 싫나요?”
윤시아가 이시백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부끄럽게 속삭였다.
“…….”
쌍문동의 미친 사냥개 이시백, 함락.
이시백은 이십 대 초반의 체력과 삼십 대 후반의 테크닉을 총동원하여 겨우겨우 소녀를 격퇴했다.
그 결과, 두 사람 모두 기진맥진해져서 거의 기절하다시피 잠이 들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것은 물론이고 이불과 침대마저 흥건하게 젖었다.
이시백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떻게든 체력으로 밀어붙였지만 이대로는 큰일이다. 이것이 사춘기 여자애의 성욕인가. 엄청나군. 대단하다.’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이마를 잡았다. 옆에서는 윤시아가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새근새근 자그맣게 내쉬는 숨소리가 깜찍했다. 잠자는 모습만 보면 영락없이 순수한 여자애였는데, 이제 보니 악마의 꼬리가 달린 저승사자였다.
‘아니다. 절대로 아니야. 시아가 비정상적인 것이다……. 게다가 궁합까지 좋아. 잘못하면 나까지 이성을 잃어버리고 어울릴지도 모른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시백이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후배와 애인이 되어버린 지 이제 고작 하루째.
실로 미래가 전도다난한 커플이 아닐 수 없었다.
2
“오늘 경찰청 사람들 만나러 가요? 어디로요?”
“자기들이 향금산에다 조사 본부를 차렸으니 거기로 오라는군.”
“하필 오늘 같은 날에…….”
윤시아가 침대에서 일어나며 격하게 신음했다. 허리가 무척 아픈지 걸음걸이가 해변의 꽃게처럼 이상해졌다.
“끄아아아. 서, 선배. 허리가. 배가 겁나게 아파요!”
“그러게 어제 무리하지 말고 일찍 자자고 말하지 않았냐.”
“너무 좋아서 그럴 정신도 없었다구요, 칫.”
윤시아가 투덜거렸지만 이시백은 무시했다. 그는 후배가 부끄러운 발언을 꺼낼 때마다 적당히 무시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사실을 학습했다.
이시백이 거울을 바라보며 양복을 입었다. 검은색 양복이 잘 어울렸다.
“외출 계획이 있었으면 진즉에 깨워주지 그랬어요. 전 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퍼질러 잤잖아요.”
“오늘은 네가 거동하기 힘들 테니 나 혼자 다녀오마. 침대에서 편히 쉬고 있어.”
이시백이 별다른 생각 없이 말했다. 어젯밤에 그토록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으니 하루 정도 휴식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단지 그런 의도로 말했을 뿐이었다. 뜻밖에도 윤시아가 대답으로 돌려준 것은 배려해 줘서 감사하다는 말이 아니라, 놀랍도록 냉정한 반문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선배.”
“음?”
이시백이 시선을 뒤로 돌렸다.
윤시아는 평소와 같이 싱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에서 반항심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저는 선배의 첫 번째 부하인걸요. 어떻게 선배가 일하러 가는데 하급자인 제가 침대에서 빈둥거려요.”
“아니, 몸이 아플 때는 쉬는 것도 요령이다. 이건 당연한 거야.”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저는 지금 컨디션이 무너져서 아픈 게 아니잖아요. 선배랑 애인다운 일을 해서 허리가 아픈 거라고요. 선배의 애인이 되었다고 해서 특별취급을 받고 싶지 않아요.”
윤시아가 이시백을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부하 헌터로서의 업무, 선배 애인으로서의 생활. 두 가지 전부 해낼 자신이 있으니까 선배한테 고백한 거예요. 아니, 두 개 전부 거머쥐고 싶으니까 고백한 거예요. 나중에 저 말고도 선배한테 부하들이 잔뜩 생겼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제가 허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자체 휴가를 내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
“완전 끝장이에요. 실력이 아니라 상급자의 편애를 받아서 붙어먹는 구더기로 취급될걸요. 아시겠죠? 헌터의 업무랑 애인의 생활은 절대 서로 영향을 끼치면 안 돼요.”
윤시아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는 이시백의 목깃에 걸린 넥타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기생 언니들에게 배운 것일까. 넥타이를 이리저리 교차시키는 손놀림이 여간 능숙한 것이 아니었다.
“어리광부리게 내버려 두지 말아주세요. 저는 마음이 약하니까요.”
꾸욱 하고 넥타이가 단단하게 매였다.
윤시아가 이시백을 코앞에서 올려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선배가 그렇게 나오면 진짜로 마음 놓고 아양을 떨어버릴지도 몰라요.”
“……이거 내가 또 한 방 먹었군.”
이시백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후배는 항상 생각하지도 못한 구석에서 허를 찔러왔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었으면서 대중선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사람을 처리하는 데 머뭇거림이 없었으며, 알아서 공사(公私)를 철저히 구분했다. 백 점 만점 시험에서 백이십 점을 쥐여 줘도 모자랐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선배. 삼십 분 안에 준비 끝낼게요.”
윤시아는 정말로 이십오 분 만에 외출할 채비를 완료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머리를 감더니 드라이기로 헐레벌떡 말렸다. 어제 구입한 흰색 원피스를 입고 하얀색 스타킹을 주욱 당겨서 착용하자, 윤시아는 준비가 끝났다며 활짝 웃었다.
“아직 머리카락에 물기가 남았다.”
“그쯤이야 가면서 말리면 괜찮아요. 자아, 출발하죠! 앞으로!”
윤시아가 호두까기 인형의 병정처럼 헛둘헛둘 양팔을 휘저었다. 기세가 좋았다만 우스꽝스럽게도 발걸음 속도만큼은 느릿느릿했다. 공사를 구별한다 어쩐다 당차게 포부를 밝혀도 허리의 통증이 가라앉을 리 만무했다.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야.’
이시백이 천천히 윤시아를 따라갔다. 그는 후배에게 보조를 맞춰 줄 생각이었다. 문득 윤시아의 부드러운 목덜미가 이시백의 시야에 들어왔다.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다소곳하게 붙어 있었다.
‘그런가. 이 아이가 내 애인인가.’
이시백은 어딘지 새삼스러운 감상에 사로잡혔다.
‘화상 때문에 이성은커녕 동성들도 피했던 나한테 애인이라.’
일생 변변한 친구도 사귀지 않았다.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쪽에서 다가설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유일하게 용병단장이 이시백을 가까이에 두었지만, 그때 두 사람 사이에 놓였던 감정은 우정이 아니었거니와 애정은 더더욱 아니었다. 적어도 이시백은 그렇게 확신했다.
믿음.
그리고 충성심.
가로되 통틀어서 의리(義理)라고 부르는, 낡은 골동품과 같은 것.
인간백정만이 살아남는 이 무간지옥에서 의리란 한갓 오래된 농담거리에 불과했다. 시대착오적인 감정.
그렇게 비웃음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시백은 분명히 그런 감정을 품었으며, 바로 그 감정 때문에 죽은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삶에서.
결국 다 버리고 남는 것은, 사람 사이의 인연밖에 없었다.
‘흐음.’
이시백이 불쑥 윤시아의 왼손을 쥐었다.
윤시아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서, 선배?”
“호텔 아래층까지 내려갈 때까지만.”
“누가 봐버리면 제가 부끄러워서 죽을 거 같은데요…….”
윤시아가 우물쭈물 중얼거렸다. 그래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까지 쭉 손을 놓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손을 빼버렸다.
윤시아가 과도하게 창피해하는 모습을 보고 이시백은 왠지 모르게 승리한 기분이 들어 흐뭇했다.
16살 여자애한테 승리해서 만족해하는 37세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안쓰럽게도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했지만.
3
향금산 유곽에는 경찰들이 장사진을 차리고 있었다.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노란색 현장 테이프가 거미줄처럼 곳곳에 쳐졌다.
이시백과 윤시아가 다가서자 경찰들이 피곤함에 지친 눈으로, 그러나 살기가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시백과 시선이 마주치자 경찰은 상대방이 ‘이쪽 업계’임을 알아본 것 같았다.
“이시백 씨, 맞습니까?”
“예, 이쪽은 제 조수입니다.”
“여기 명찰을 달고 들어가 주십시오.”
두 사람은 향금산 창관의 사장실에 안내되었다. 한때 김태헌 사장이 무더위에 견디지 못해 부채질을 열심히 지피던 사장실. 그곳에는 이제 널널하고 후줄근한 와이셔츠를 걸친 형사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팀장님, 참고인 이시백 님이 방문했습니다.”
“어? 아아, 다섯 시까지 오시면 된다고 했는데 빨리 왔네.”
30대 중반의 남자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체구가 컸지만 대체로 허우대였다. 몸에 살집이 하나도 없었다. 신장이 2m가 간단히 넘어가서 무척 거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근육이 증발하고 뼈다귀만 남아서 웬 키다리가 허리를 편 것 같았다.
팀장과 이시백이 악수를 나누었다.
“안녕하십니까. 부산경찰청 광수대 헌터 범죄 쪽 팀장을 맡은 차수현입니다.”
“D급 헌터 이시백입니다. 말 편하게 놓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럴 수야 없지요. 장차 국가에 세금을 내줄 시민이 되실 텐데.”
팀장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며칠째 수염을 안 깎아서 회색 턱수염이 자잘하게 튀어나왔다. 눈 밑이 퀭하여 보라색 기미가 내려앉았다. 옷깃에서는 담배 냄새가 확 풍겼는데, 아무리 봐도 얼굴이 건강한 인간의 안색이 아니었다.
“저도 세금 받아먹고 사는 월급쟁이입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쪽 숙녀분께서는…… 여기 사장을 단칼에 처치하신 아가씨로군요. 하하. 우리 친구들도 아가씨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누고 있습니다. 멋집니다.”
“감사합니다, 차 팀장님.”
윤시아도 교과서적으로 예의 바르게 악수에 응했다.
간단한 인사.
그러나 ‘장차 국가에 세금을 내줄 시민이 될 것’이라는 말에는 묘한 뉘앙스가 있었다. 헌터가 시민으로 취급받는 것은 C급부터. 아직 이시백은 시민으로 대접받을 신분이 못 되었다. 그런데도 팀장은 당연하다는 듯 시민권을 암시했다.
이시백이 윤시아와 나란히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이미 내 처우에 대한 논의가 상부에서 어느 정도 마무리했군.’
이시백한테 특별히 시민권을 내주기로 결정된 게 분명했다.
여기서 광역 수사대의 팀장이 이시백을 만나자고 부른 까닭은, 아마도 이쪽의 의도를 직접 캐물어볼 의향이 있기 때문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봉다리 커피가 한 잔씩 서빙되자마자 팀장이 운을 뗐다.
“하하. 제가 평소에 눌변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막 어렵고 복잡한 얘기가 생소합니다.”
“저도 똑같습니다. 사양하지 말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예에. 단도직입해서 여쭙자면…….”
차수현 팀장이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실눈 너머로 이시백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한테 무슨 떡고물을 얻어먹으려고 이 난리 생쇼를 벌이는 것입니까?”
이시백이 상대방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이제부터 ‘국가’와 승부를 벌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