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40화
제5장 일일호화주의(一日豪華主義) (7)
이시백이 당황했다.
무엇보다도 자기가 당황했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당황했다. 윤시아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시백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생각할 시간을…….”
“싫어요. 여기서 대답해 주세요라고 조르면 제가 너무 어린애처럼 구는 걸까요.”
윤시아가 왼손으로 이시백의 손을 잡았다.
이시백은 세 번째로 당황했다. 완전히 연애에 도가 튼 선수처럼 밀어붙이고 있지 않은가. 자기가 보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어린애라고 생각했건만.
원피스 너머로 가냘픈 쇄골이 비추었다. 이시백이 무심코 시선을 피했다. 왠지 보면 안 되는 것을 보고 만 기분이었다.
‘잠깐, 열여섯 살짜리한테 내가 뭘 휘둘리는 거냐!’
이시백이 정신을 단단히 붙들어 맸다.
이시백은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윤시아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것을. 자신의 손을 감싼 그녀의 손도 몹시 뜨거웠으며, 심지어 무언가가 무서운지 조금씩 떨었다.
“…….”
이시백이 다시 평정심을 찾았다.
후배는 결코 연애에 능숙해서 연달아 공격을 퍼붓는 게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고백 같은 것을 처음 해보니까 오히려 과감하게 돌격했다.
겉모습이나마 능숙한 흉내를 낼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향금산 유곽에서 아가씨들한테 이것저것 배운 덕분이겠지. 부끄러움을 필사적으로 감추고 이쪽에 맨몸으로 부닥쳤다.
‘진지하게 대답해 줘야 한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거절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내세우는 장점이 최소한 하나쯤 있었다. 이시백에게도 스스로 덕목이라 믿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었다.
‘……싫어하지 않아. 그래서 곤란하다.’
윤시아가 고백했을 때 필요 이상으로 당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시백은 윤시아라는 아이한테 일정 부분 끌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정 부분.
당연하게도 이시백은 어른이었다. 감정의 크기를 제멋대로 착각하여 자기 자신을 속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윤시아에 대한 이성적인 호감은, 아직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진지하게 고려한다. 그건 평소에는 철저하게 관리해 온 마음의 철창을 벗겨내서, 이 감정이 과연 커질 것인지 아니면 자그마한 그대로 머무를 것인지 찬찬히 살펴보는 작업. 시간이 필요했다.
윤시아의 눈동자는 더없이 진지했다. 약간 물기가 맺혀 있었다. 당장은 대답을 돌려줄 수 없다고 말해도 이렇게 진지해서야 쉽게 납득해 주지 않으리라.
이시백이 강수를 두었다.
“아니, 어린애 같은 건 너가 아니라 나다.”
“네?”
“……나도, 고백을 받아본 게 이번이 처음이다.”
윤시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서, 선배가요? 진짜요? 거짓말.”
“정말이다. 솔직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생각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다오.”
“말도 안 돼.”
이시백은 얼굴이 다소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말하자면 육참골단(肉斬骨斷).
자신보다 아득하게 어린 여자애한테 약점을 건네주고, 대신 고민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얻는다. 그야말로 기책. 평소에는 이시백이 절대로 써먹지 않을 수법이었다. 윤시아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으흠, 으흠. 요컨대 선배는 연애 초짜라 이거죠?”
“……진지하게 사귀어본 적이 없을 뿐이지 여자 경험은 많아.”
“어찌 되었든 초짜인 거잖아요. 헤에, 그렇구나. 그랬구나. 선배도 처음이었구나. 음음.”
윤시아가 왠지 모르게 우쭐거렸다.
언제 부끄러워했느냐는 듯 뻔뻔하게 눈빛이 반짝거렸다.
“좋아요. 이야아, 처음이라면 창피할 만하죠. 그렇고말고요. 알겠습니다. 이해했습니다. 확실히 납득했습니다. 저한테 갑자기 고백 받아서 선배가 무척이나 당황했다는 거, 충분히 인식했습니다.”
이시백은 문득 후배를 한 대 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재 이시백은 명백히 불리한 형세에 처해 있었다. 치욕과 모욕을 감내하고 후퇴하여 어떻게든 전열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하지만 선배.”
윤시아가 이시백에게 얼굴을 바싹 붙였다. 또 키스하는 건가 싶어서 이시백은 표정을 관리했다.
이번에도 함부로 발칙한 짓을 저지르면 아예 어른의 관록을 보여 줄 심산이었다.
덤벼라, 열여섯 살. 거저 서른일곱 살을 먹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마…….
예상은 그러나 빗나갔다.
윤시아의 입술은 이시백의 안면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노린 곳은 귓가였다. 바로 이시백의 귀에 대고 윤시아가 속삭였다. 더운 숨결이 귓구멍을 장난스럽게 간지럽혔다.
“선배의 후배는 별로 참을성이 강한 여자가 아니라구요. 오늘 밤 안에, 제대로 대답해 주세요.”
“…….”
하필 오늘 밤이라고 언급한 이유를 몰라줄 만큼 이시백은 눈치가 둔하지 않았다.
소녀의 맹랑하기 그지없는 귓속말에 이시백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정말로, 진심으로 인정하기 싫었으나 심장이 조금 두근거렸다.
‘여우를 주웠다고 생각했는데 암사자였어.’
이시백이 마음속 깊이 한탄했다.
3
“무엇이든 말씀만 내려주십시오, 주인님.”
이시백과 윤시아가 카지노를 나서자마자 전담 집사가 붙었다.
안 그래도 VIP인 손님이었다. 여기에다 카지노에서 기적적인 승리까지 보여 주었다. 호텔 차원으로 극진하게 대접해야 하는 필요성이 생겼다.
비록 이백억 원대의 손해를 입긴 했어도 이곳은 개성 제일의 호텔. 이런 손해야 심심찮게 벌어졌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VIP 고객을 관리함으로써 호텔의 이미지를 높이는 것이었다.
“출장 바텐더 한 명 부르고. 잘생긴 남자애들도 일곱 명.”
“알겠습니다, 주인님. 남자만 불러도 좋겠습니까?”
“동생한테 신세계를 경험시켜 줄 요량이거든.”
시종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최상위의 아이들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저희 호텔 측에서 비용의 절반을 분담할 테니 모쪼록 부담 없이 즐겨주십시오. 지금 묵고 계신 로열 스위트도 제가 독단으로 사흘 연장했습니다.”
“고맙네.”
그만한 일을 일개 종업원이 독단으로 처리했을 리 없었다. 호텔 차원에서 어떻게 대접할 것인지가 매뉴얼로 정리되어 있겠지. 그런데도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기에게 어느 정도 결정권. 즉 서비스의 품질을 결정하는 몫이 주어져 있다고 은근히 어필하는 것이었다.
턱-
이시백이 주머니에서 카지노칩을 꺼내어 집사한테 쥐여 주었다. 황갈색 칩이 세 개. 자그마치 삼백만 원을 팁으로 건넸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집사가 허리를 숙인 각도가 70도에서 90도로 수직낙하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충 비키니 수영복도 하나 사 오게나.”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30분 뒤.
로열 스위트에 바텐더와 호스트 군단이 찾아왔다. 바텐더는 호텔에서 이동용 바를 가져와서 이시백과 윤시아가 주문하는 대로 칵테일을 만들었다.
여덟 명의 호스트는 과연 집사에게 돈을 찔러 넣은 효과가 있었는지, 전부 반반하고 젊은 남자로 채워졌다.
“자, 잘생겼다.”
윤시아가 입을 헤 벌렸다. 미남이라곤 텔레비전으로 본 게 전부인 고아 소녀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멋진 스타일, 귀여운 스타일, 악동 스타일, 쿨한 스타일까지. 실로 골라 먹는 재미가 있게끔 각양각색의 미남이 늘어섰다.
호스트들이 방실방실 웃으면서 윤시아에게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잘 부탁드려요, 누나!”
“오늘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 네. 저도 잘 부탁해요……?”
미남들의 향연에 윤시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시백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꼬맹이는 꼬맹이야.’
한순간이나마 저 아이한테 밀렸다는 사실 자체가 의문스러웠다. 흑역사로 치부해도 될 정도였다. 이시백이 바텐더를 향해 주문했다.
“일단 술 한 잔씩 돌려주시오.”
“예.”
양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30대 남성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호스트들에게는 도수가 낮은 술이. 윤시아에겐 나이를 고려하여 달달하게 맛있는 칵테일들이 주어졌다. 알코올이 들어가자 윤시아는 금방 분위기에 적응했다. 점점 더 표정이 풀리고 몸짓이 과해졌다.
“1번! 팬티 차림으로 수영장에 뛰어 드세요!”
“1번, 입수합니다!”
호스트 한 명이 주저 없이 옷을 벗어 던지고 수영장에 다이빙했다. 첨벙, 하고 물이 튀었다.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두 명의 호스트는 차례를 바꾸어 가며 노래방 기기로 노래를 불렀다. 파티가 시작한 것이었다.
“으으응. 아하핫, 간지러워.”
윤시아는 하얀 비키니를 입은 채 등받이 의자에 앉았다. 오른손에는 붉은색의 화려한 칵테일잔이 들렸고, 왼손에는 고양이처럼 귀엽게 생긴 남자가 붙어서 손등을 할짝거렸다. 발에도 한 명씩 호스트가 달라붙어 마사지를 전개했다. 문자 그대로 여왕과 같은 방탕함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웃음은 더욱더 쉽게 터졌다. 수영실은 벽면 전체가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 개성 밤거리의 화려한 불빛이 때로는 푸른색으로 때로는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난반사되었다.
“…….”
이시백은 수영장 저편에 앉아 책을 읽었다. 어릴 적부터 가까운 물체가 잘 보이지 않았으므로 이시백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이시백이 읽는 책은 최근 만주 지역을 다녀온 모험가의 보고서였다.
시베리아의 일부와 만주는 이미 오래전에 몬스터들의 영역이 되었으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항상 파악해 두어야 했다.
“음.”
이시백이 맨해튼 칵테일을 홀짝이고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윤시아 때문에 글씨가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편에서 윤시아가 불꽃놀이를 터뜨리는 것처럼 환하게 웃을 때마다 이시백은 자꾸 신경이 쓰였다.
‘내가 누군가랑 사귄다고?’
이시백이 눈썹을 찡그렸다.
‘시아는 내 부하다. 앞으로 사람들을 이끌 아이가 나와 지나치게 관계가 깊어지면…… 아닌가. 도리어 시아의 지위가 강해지는 효과가 있을까. 아니, 지위 따위는 상관없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여자애한테 무슨…….’
이시백이 등받이 의자에 머리를 기대었다. 무척이나 피곤했다.
후배와 연애하는 것은 힘들었다. 일단 자신이 없었다. 자기야 이미 버려질 대로 버려진 인생이라지만 윤시아에게는 조금 더 가능성이 충만했다. 스스로 장래를 개척해 나갈지 몰랐다. 행여라도 자기 때문에 발목이 붙잡히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시백은 젊은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 줄 여유도 계획도 없었다.
‘역시 거절해야겠다.’
이시백이 눈을 감으면서 생각했다. 설령 윤시아와 사이가 어색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거부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이시백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음울해질지 잘 알았다. 거기에 다른 사람을 너무 가까이 두는 것은 좋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선배.”
자그마한 속삭임에 이시백이 두 눈을 떴다.
이시백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영실에는 바텐더도 호스트 군단도 없었다. 창밖이 아직 어두운 걸 보아하니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다. 윤시아는 그런 이시백을 싱글벙글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냐?”
“제가 다 보냈어요. 네 시간 정도 즐기니까 조금 질리더라구요. 뭐라고 해야 할까. 재밌지만 쉽게 질려서.”
“돈 아깝게…….”
“어차피 돈은 썩어서 넘쳐흐르는걸요.”
음, 하고 이시백이 침음을 삼켰다.
사방이 적막했다.
수영장에서 물결이 잔잔하게 서로 찰싹이는 소리가 내려앉았다. 방안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수영장 아래에서 하얗게 조명이 비추는 걸 제외하고. 어두컴컴한 그림자 속에서 윤시아의 얼굴만큼은 뚜렷하게 보였다.
“대답.”
윤시아가 차분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이시백은 왜 윤시아가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불까지 껐는지 이해했다. 자기가 깜빡 잠이 든 모습을 보고 숙소를 조용히 정리한 것이었다.
윤시아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조금만 더 있으면, 오늘 밤이 다 지나버리는데요?”
“…….”
이런.
이시백은 저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마음속에서 무의식이 항복 선언의 백기를 들어 올렸다.
“나는 사람을 좋아할 줄 모르는 인간이다.”
“저도 비슷한 성격이에요. 괜찮아요.”
“연인이 아니라 기껏해야 애인밖에 못 될 거야.”
“마음이 없고 몸밖에 없는 관계. 딱 좋아요. 완전 제 취향이네요.”
윤시아가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래서, 대답은요?”
“…….”
완벽하게 졌다. 두 손 두 발 전부 들었다.
이시백이 윤시아의 턱을 집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서 키스했다. 장난스러운 입맞춤이 아니었다. 어른의 키스였다.
윤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을 코앞에서 지켜보며, 이시백은 자기가 의외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놀랐다.
한참이 지나서야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실수했어요.”
윤시아는 볼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수, 술을 너무 마셨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마시는 건데. 술 냄새 안 났어요? 선배, 술 냄새 안 났죠?”
이시백이 작게 웃었다.
“나도 나지만, 너도 너구나.”
“네에?”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시백이 윤시아의 손목을 잡아서 당겼다. 윤시아가 꺄악 하고 그대로 끌려왔다. 윤시아는 이시백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히고 부끄럽게 키득거렸다.
“와아, 진도 나가는 속도가 고속도로네요.”
“쓸데없이 앞뒤를 재는 것이 성미에 안 맞아서 말이다.”
“저, 혹시 엄청나게 위험한 남자한테 걸려 버린 건가요?”
“이제 와서 깨달아도 늦었다.”
다시 한 번 키스.
윤시아가 이시백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기쁘게, 그러면서도 쑥스러운 듯 웃었다.
“……이건 비밀이지만, 선배. 사실 네 시간이 아니라 두 시간밖에 안 지났어요.”
아직 밤이 많이 남았다는 암시였다.
윤시아의 미소를 바라보면서 이시백이 절절하게 깨달았다.
어째서인지 자신은 항상 여운(女運)이 지독하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