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35화
제5장 일일호화주의(一日豪華主義) (2)
“일단 마사지 좀 받아볼까.”
“마, 마사지라니. 호텔에 안마소도 있나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시백이 전화기를 집었다. 바로크풍의 은제 장식이 세공된 전화기는 곧바로 VIP를 위해 따로 준비된 안내원으로 연결되었다.
이시백이 윤시아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턱을 치켜들었다.
“오늘 우리는 발을 움직일 필요가 없다.”
“네?”
“부르면 뭐든 다 와.”
이십 분 뒤, 이시백과 윤시아는 나란히 안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드라이 마사지가 아니라 오일 마사지. 이시백은 미끄러운 감촉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윤시아가 ‘예전부터! 어린 시절부터! 아니, 전생부터 꼭 받아보고 싶었어요!’ 하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과연 전생부터 염원한 소원이라면 이시백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부르주아…….”
팬티 한 장 차림으로 마사지를 받으며 윤시아가 한여름의 고양이마냥 축 퍼졌다. 중국에서 공수해 온 전문 안마사가 그녀에게 대륙의 6,000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다. 안마사의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와 등골을 문지를 때마다, 윤시아가 기분 좋게 신음했다.
“흐아아, 선배. 저 이러다 자버릴 거 같아요오.”
“졸리면 자려무나.”
“절대 안 돼요. 자면 여기서 머무르는 시간이 쓸데없이 날아가잖아요.”
이천육백만 원을 쓰게 되었으니 죽어도 뽕을 뽑겠다.
목소리에 강철과 같은 의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시백이 입꼬리를 슬쩍 들었다.
“아서라. 여기에 데려온 의미가 없다. 돈으로 어디까지 가능한지 보여 주려고 왔는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돈에 휘둘리는 거다. 여유롭게 가. 눈앞에 돈이 산더미처럼 쌓여도 꿈쩍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야 그나마 쓸 만해진다.”
“그래도 이천만 원인데요.”
“이천만 원이 아니라 이억 원에도 코웃음을 치는 여자야말로 멋이 있지.”
“그건 확실히 멋있네요.”
윤시아가 안마사의 손길을 만끽했다.
“요컨대 돈 따위로는 내 마음을 빼앗을 수 없어, 같은 느낌이죠?”
“그래. 돈에 휘둘리지 말고 돈을 휘두를 줄 알아야 한다. 이것도 습관이야. 미리 습관을 잘 들여 두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오억, 십억, 하는 돈들이 코앞에서 오갈 때 자기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이걸 야코가 죽는다고 흔히 말하는데…… 중견 용병단에 머무를 거냐, 아니면 거대 용병단까지 올라가느냐가 여기 달렸다.”
여유.
이시백은 윤시아의 많은 부분이 마음에 들었지만 딱 하나. 금전에 여유를 가지기를 바랐다. 운이 따라주면 성공은 누구나 한 번쯤 겪을 수 있었다.
이시백은 어느 도박장에서 자본금 30만 원을 들고 뛰어들었다가 2,000만 원까지 불린 사람도 직접 보았다.
그러나 성공했을 때보다 실패했을 때가 문제.
상황은 언제든지 악화될 수 있었다. 30만 원이 2,000만 원이 되는 것보다, 2,000만 원이 30만 원으로 줄어드는 것이 훨씬 더 쉬웠다. 그때도 사람은 냉철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했다.
‘돈 몇 천만 원은 대수로울 게 없다.’
‘어차피 호텔 하룻밤 값. 내가 겪어봤는데 의외로 별거 없더라.’
‘나는 언제든 재기할 수 있다. 초조해하지 말자.’
그런 여유가 필요했다.
이시백이 어깨에 뭉친 피로가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사실 겉으로만 초조함이 드러나지 않으면 괜찮다마는. 뭐, 그쯤이야 시아가 알아서 잘 생각하겠지.’
김태헌 사장을 윤시아가 직접 죽였다는 얘기를 듣고, 이시백은 후배에 대한 평가를 크게 높였다. 그다음에 윤시아가 보여 준 행동은 더욱더 칭찬할 만했다. 마땅히 복수를 이루어야 할 사람들에게 복수를 양보한다. 훌륭한 태도였다.
“알겠습니다, 선배. 멋있는 골드미스가 되겠습니다.”
“이왕이면 이성에도 휘둘리지 않는 여자가 되라고 주문하고 싶군. 오늘 밤에 말끔하게 빠진 남자들로 다섯 명 불러줄까?”
“아, 죄송해요. 그건 조금…….”
윤시아가 쑥스럽게 실실거렸다.
“처녀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주고 싶어서요.”
호오 하고 이시백이 미소를 지었다.
후배가 어떤 남자를 좋아할지 개인적으로 흥미가 생겼다.
이시백은 평생 다른 사람의 연애사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과연 이 영악한 소녀가 이성적으로 끌리는 타입은 무엇일까.
“왜, 혹시 마음에 드는 남자애라도 있냐?”
열여섯 살이란 향기로운 샴푸 냄새만 맡아도 덜컹 사랑에 빠져버리는 나이.
이시백은 전생에 악질적인 놈들을 수없이 만나보았지만 그만큼 멋있는 남자들도 많이 접했다. 뭣하면 후배한테 직접 원 나이트 파트너들을 소개시켜 줘도 좋았다.
“네, 브래드 레먼이요.”
“…….”
즉답이었다.
지구상에서 인기가 제일 높은 서양의 남자 배우였다.
후배는 눈이 꽤 높았다.
게다가 유부남. 난이도도 상당히 높았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노력하면 사귈 수 있는 수준의 남자를 말해봐라.”
“그럼 재벌 3세인데 막내아들이라서 어떻게 해도 회사의 경영권은 얻을 수 없고, 에라, 모르겠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돈을 마구 쓰고 다니는 20대 초반의 남자로 부탁드립니다.”
상상도 못한 대답이 돌아와 버렸다.
이시백은 순간적으로 말문을 잃었다. 대단했다. 이시백을 당황시킬 수 있는 인물은 한반도를 샅샅이 뒤져 봐도 얼마 없었다.
이시백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윤시아의 목소리가 매우, 몹시나 진지하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물었다.
“……일단 물어는 보자. 왜 하필 재벌 3세냐?”
“집단은 항상 3세대부터 쇠락하잖아요. 1세대나 2세대면 윤리적으로 조금 깐깐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비현실적인 건지 현실적인 건지 모를 답변이었다.
이시백은 이 후배도 평범하게 맛이 갔음을 체감하며 한숨을 쉬었다.
“보아하니 네가 제대로 된 남자랑 놀아나기는 글렀다.”
“우쒸. 꿈이 많은 사춘기 소녀한테 무슨 망발을 하는 거예요.”
“썩을 대로 썩은 여자아이는 여기 한 명 있다만. 꿈 많은 사춘기 소녀가 대관절 어디에 있다는 건지 모르겠군.”
윤시아가 심드렁하게 투덜거렸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어휴. 정 안 되면 선배라도 뭐, 괜찮아요.”
“이렇게나 무례한 고백은 처음 받아본다…….”
“괜찮아요. 전혀 고백이 아니니까.”
손님의 어깨를 풀어주던 안마사들은 표정이 묘해졌다. 이들은 중국인이었지만 개성에서 일한 지 꽤 오래되어 웬만큼 한국어를 알아들었다.
‘도대체 관계가 뭐야?’
남녀 한 쌍이라서 애인 사이인 줄 알았더니 주고받는 얘기를 들어보니 또 아니었다. 그렇다고 생판 남이라고 보기에는 미묘하게 끈적거렸다. 타인끼리 이렇게 비싼 호텔에 놀러 올 리도 없었다.
‘선배라고 부르고 있으니까 남매도 아닌데……?’
안마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한 시간 동안 전문가의 손길을 즐기고, 두 사람은 호텔 지하 1층과 지하 2층을 싹 돌았다. 지하에는 온갖 명품 브랜드가 입점해 있었다. 조금 규모가 있는 카지노라면 어디나 명품관이 붙어 있다고 이시백이 설명했다.
“돈을 벌었으면 여기에다 쓰라는 거지.”
“새삼스럽지만 인간은 되게 똑똑하네요.”
“글쎄. 이런 수작에 빤히 넘어간다는 점에서는 우둔하지.”
의외로 윤시아는 명품관을 둘러보는 걸 심심하게 여겼다. 쇼핑에 취미가 없는 것 같았다. 이시백이 옷을 사주려고 가게에 들어가도, 윤시아는 어쩐지 생리에 안 맞는다는 듯 멋쩍게 웃기만 했다.
“앞으로 사업하면서 사람을 계속 만날 거다. 그중에는 옷 가지고 상대방을 판단하는 부류도 있어. 그런 사람들한테 괜히 책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두세 벌은 비싼 걸 가져야 돼.”
“그런 사람들은 어차피 잔챙이 아니에요?”
“인간이란 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성숙한 사람도 어디 한 군데쯤 유치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아주 많다. 예를 들어 진지하게 재벌 3세와 사귀고 싶어 하는 여자애라든지.”
결국 윤시아는 이시백의 강권에 떠밀려서 옷을 두 벌 골랐다. 하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입을 드레스. 검은색 드레스로 등이 훤하게 파였다.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약간 성숙한 스타일인데도 윤시아는 자기 나름대로 멋지게 소화했다.
“그리고 이걸로 할게요.”
다음으로 조금 더 가벼운 평상복.
이번에는 새하얀 원피스였다. 세라복의 느낌을 훔쳐 왔는지 가슴팍에 푸른색 선이 들어갔다.
윤시아에게 무척 어울렸지만 약간 의외였다. 유곽에서 견습 기생으로 일할 때 입던 옷도 그렇거니와 아까 고른 드레스도 그렇고, 윤시아는 귀여운 스타일보다 고혹적인 스타일을 좋아했다.
“정말 이걸로 괜찮겠냐?”
“네, 이 부분이 교복이랑 비슷하잖아요.”
윤시아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한 번도 학교를 다녀보지 않았으니까요. 동경하고 있거든요. 교복이란 거.”
“…….”
이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을 시켜 나머지 물품을 방에 올려 보낸 다음, 두 사람은 카지노로 향했다. 도박장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는 윤시아에게 체험을 시켜주려는 목적이었다. 여기저기서 중국어와 일본어, 영어와 한국어가 들려왔다. 대체로 중국인이 호쾌하게 떠들었다.
“카지노에는 창문도 없고 시계도 없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려는 거지.”
“악랄하네요. 어라. 음료수는 전부 공짜예요?”
“당연하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웨이터를 잡아서 아무거나 시켜도 돼. 도박하면서 음식도 시켜 먹을 수 있고…… 저런 사람들은 소위 앵벌이라고 해서 손님 따라다니면서…….”
한때 카지노를 운영해 본 이시백이 상세한 내막을 가르쳐 주었다. 두 사람은 블랙잭, 텍사스 홀덤, 포커, 바카라, 슬롯머신, 룰렛, 다이사이, 수많은 게임 판을 돌아다녔다.
윤시아는 금방 도박의 룰을 이해했다.
물론 이시백은 도박하다가 패가망신하는 인간군상이 얼마나 많은지 다채롭게 설명했다. 목숨 걸고 몬스터를 토벌하여 벌어들인 돈을 카지노에서 흥청망청 날리다 자살한 경우 등등. 한 시간쯤 지나자 윤시아는 완벽하게 올바른 도박관을 갖게 되었다.
“저, 절대로 도박에 빠지면 안 되겠네요.”
“그럼. 도박에 빠진 사람들이야 생활도박이다, 하루에 30만 원만 벌어서 먹고살면 이득이다 뭐다 변명하지만 다 도박중독자다. 차라리 마약을 해라.”
“마약은 이미 하고 있는데요?”
“그렇군.”
어떤 의미로든 이미 글러 먹은 스승과 제자였다.
이시백은 윤시아를 VIP 도박룸으로 데려갔다. 그러자 풍경이 달라졌다. 사람의 숫자가 확 줄어들었다. 바카라 같은 경우, 아까 전 장소에는 한 테이블에 스무 명 이상이 몰린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혼자서 딜러와 1:1로 치는 도박꾼도 있었다.
“선배, 저건 칩이 아니라 뭔가 네모나게 생겼어요.”
윤시아가 공짜 콜라를 홀짝이며 도박꾼을 가리켰다. 도박꾼은 테이블에 직사각형의 붉은색 칩을 산더미처럼 쌓아두었다. 아아 하고 이시백이 말했다.
“저거 한 개가 삼천만 원인가 천만 원인가 그래.”
“히익!?”
이시백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저 멀리서 도박꾼이 빨간색 칩 여섯 개를 걸었다. 30초 정도 지났을까. 딜러가 카드를 버리고 칩을 쓸어 담았다. 도박꾼이 덤덤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방금 한 판으로 일억 가까이 날아갔다.”
“……제 머리까지 이상해질 것 같아요.”
“그런 곳이다. 창문은 없지, 사시사철 온도를 시원하고 따스하게 맞춰두지. 목이 마르면 웨이터들이 알아서 음료를 배달하지. 마음만 먹으면 계속 카지노에서 죽치고 있을 수 있다.”
돈만 있으면, 하고 이시백이 덧붙였다.
“저 사람은 옆에 삼십억은 쌓아두고 바카라를 하고 있군.”
“으으. 대체 어떤 기분일까요.”
“잘 모르겠지만 세 시간 뒤에도 오링이 안 날지 궁금한걸.”
이시백이 돈을 칩으로 바꿔왔다.
화려한 색깔의 카지노 칩이 플라스틱에 담겨 있었다.
“자아,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한번 직접 쳐봐.”
“이건 얼마짜리인데요?”
“오천만 원. 전부 잃어도 괜찮으니까 경험한다는 생각으로 해라.”
윤시아가 울상을 지었다.
그녀는 힘없이 카지노 칩 상자를 건네받았다.
“왠지 돈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기분이…….”
“이거 끝나면 최고급 바에 갈 테니 우울해하지 마.”
“와우! 시아는 돈 버리는 걸 정말로 좋아해요!”
윤시아는 술을 매우 좋아했다.
두 사람은 함께 바카라 테이블에 앉았다. 서양인 한 명과 중국인 두 명, 일본인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도박판에 국적은 의미가 없다는 걸 보여 주었다.
어린아이가 오천만 원어치를 들고 앉았는데도 도박꾼들은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테이블 매너가 좋았다. 다만 윤시아가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배팅을 했을 때 도박꾼들은 무심코 그녀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
이시백도 어이가 없어서 윤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윤시아가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쳤다.
“뭐, 뭐요. 처음은 원래 다 이런 거잖아요!”
윤시아가 플레이어 측에 건 칩의 액수는…… 1만 원.
오천만 원을 쌓아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배팅이었다.
“플레이어 윈.”
어찌 되었든 결과는 좋았다.
딜러가 웃으면서 윤시아의 칩을 거둬들여 두 배로 돌려주었다. 1만 원을 걸었으니 2만 원. 윤시아가 칩을 받아들고 활짝 웃었다.
“서, 선배! 왠지 모르겠지만 이겼어요!”
“……축하한다.”
윤시아의 목소리에 도박꾼들이 쿡쿡 웃었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어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아는 것이었다. 이시백은 이마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이런 건 자기가 해야 의미가 있으니…….”
“네, 선배. 이거 왠지 재밌네요! 돈 따는 맛이 있다고 할까.”
이제 겨우 한 판. 그것도 1만 원짜리 승부에서 이겼으면서 윤시아는 벌써 도박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이번엔 큰마음을 먹고 5만 원어치 칩을 내걸었다.
“역시 사람은 크게 크게 가야죠!”
도박꾼들이 또다시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악의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다들 윤시아가 귀엽고 흐뭇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무미건조한 도박판에 갑자기 부드러운 공기가 흘렀다…….
“뱅커 윈.”
“아싸!”
딜러가 5% 커미션을 빼고 윤시아에게 다시 두 배에 가까운 칩을 돌려주었다.
“다음에도 으쌰으쌰 가자구요!”
윤시아가 10만 원을 배팅했다.
그리고.
전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