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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의 제국-31화 (31/142)

건달의 제국 31화

제4장 국민체조 2분 20초 (10)

무대에서 예인들이 뒷걸음질 쳤다.

순우경은 자랑스러운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연주자들이 뒤편으로 물러서자, 무대 양옆에서 일단의 무용수들이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걸어 나왔다.

“오오오!”

레스토랑의 손님들이 박수를 보냈다. 단순한 무용수가 아니었다. 여인들은 속살이 훤하게 비추는 나삼을 입거나, 치마가 짧다 못해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치파오를 입었다. 붉은색의 자극적인 향연이 펼쳐졌다.

김태헌 사장이 허 하고 중얼거렸다.

“전부 우리 애들이잖아.”

무용수들은 모두 향금산 유곽의 기생이었다.

지금 시각이 저녁 일곱 시. 기녀들이 슬슬 일과에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척 보아도 일패 기생과 이패 기생이 무대에 총출동했다. 이래서야 오늘 하루 업무는 꽁쳤다.

“순우 지배인, 이게 어찌 된 일이여?”

“가게 종업원이 한자리에 모인다니까 아가씨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지 뭡니까. 이런 기쁜 날을 꼭 축하하고 싶다면서.”

“…….”

과연. 아양을 떨어보겠다는 것인가.

여태까지 기생들은 알게 모르게 김태헌 사장에게 대들었다. 대놓고 반항한 기생은 없었으나 암묵적으로, 티가 나지 않게 뻗댄 경우는 꽤 많았다.

향후 유곽의 경영권이 김태헌에게 대폭 넘어가면 기생들 입장에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으리라.

“흐흐. 우리 아가들도 귀여운 짓을 해주는구만.”

“애완견은 애완견으로서 본분을 다해야 하지요.”

김태헌 사장이 코웃음을 치고 술잔을 기울였다. 중국 본토에서 공수해 온 백주(白酒)가 달콤하게 혓바닥을 적셨다.

단지 미향(米香)이 감돌기 때문에 달콤한 것이 아니겠지. 이것은 승리의 향기였다. 설령 오늘 하루 업무가 증발해 버렸다 할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저 패배한 개들이 허리를 납작 숙인 광경이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하오(好).”

김태헌이 턱을 까닥였다.

순우경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쳤다.

따앙-!

먼저 음악을 울린 것은 고쟁이었다. 가야금보다 음이 가볍고, 그렇기에 음색이 조금 더 미끄러지듯 흘렀다.

걸음이 깔렸다. 이제는 춤을 출 차례였다. 연주자들이 고쟁을 켰다. 잰걸음으로 움직이던 음악이 단번에 공중에 흐느적거리며 녹아들었다. 기생들이 공기의 탄력을 받아 움직였다. 붉은색 옷소매가 기다란 깃발처럼 교태롭게 나풀거렸다.

“음.”

김태헌 사장이 무심코 눈을 감았다.

음악의 이름은 평호추월(平湖秋月).

-고요한 호수에 가을의 달은 깃들지어니.

‘좋군.’

하나의 시구처럼 내려오는 장면이 있었다.

어느 노인이 물을 건너려 하는데 뚜렷한 달이 그곳에 비추었다. 노인이 그걸 보고 파안대소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노인은 지팡이로 달의 그림자를 짚으면서 훌쩍 물을 건넜다.

인간의 삶이란 기껏해야 물가에 비춘 달빛과 같은 것이라. 하지만 장난삼아 웃으며 피안으로 건너갈 수만 있다면야, 달이 하늘에 놓였든 물가에 놓였든 무슨 상관이랴. 김태헌은 자신의 생이 이렇게 될 줄, 그 벌건 대낮에 부유하는 먼지구름을 보았을 때, 이미 다 알았다.

“착하게 사는 것도 다 천운이야. 안 그런가, 순우 지배인.”

“그럴까요. 다 사람이 노력하기에 달리지 않겠습니까?”

“그래, 지배인은 젊지. 아직 인생에게 변명할 필요가 없는 나이야.”

김태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대에 유난히 어린 기녀가 한 명 끼어 있었다. 이 주임의 동생뻘인 견습 기생, 윤시아였다.

“저 아이가 벌써 무대에 올라도 되나?”

“아아, 천부적인 재능이 있더군요.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춤곡을 하나 터득했습니다. 몸짓에 저절로 교태가 머무는 것이 타고난 예기(藝妓)입니다.”

“호오.”

확실히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실력은 다른 기생들에 비해 약간 떨어진다 싶었는데, 이상하게 리듬이 끊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춤을 펼쳐 나갔다. 나삼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맨살이 매혹적으로 번들거렸다.

“자네 말이 맞네. 타고났군, 타고났어.”

“아마도 무난히 일패까지 올라갈 것 같습니다. 저거 보십시오. 웃는 얼굴이 한시도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저런 아이는 빨리 성장하게 마련이지요.”

순우경이 웃었다.

“뭐, 이 주임이 그걸 허락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

말의 뉘앙스가 이상했다.

이 주임이 윤시아를 아낀다는 사실이야 이미 빠삭하게 퍼졌다. 윤시아가 창관에 뼈를 묻는 것을 이 주임이 허락하지 않을 가능성은 높았다.

하지만 왜 ‘허락한다면’이 아니라 ‘허락할 수 있다면’이라고 말했는가.

김태헌은 곧바로 순우경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 주임을 죽여 달라는 얘기로군.’

김태헌이 스스로 술을 첨잔했다.

‘이쪽 프락치라는 걸 눈치 깠나. 당할 때 당하더라도 누구한테 당했는지 정도는 알아냈다. 그런 얘기인가…… 흐흐.’

역시 순우경도 만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지금 그는 항복에 대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인적부를 포기하겠다. 손님 명단도 넘겨주겠다. 단, 자신을 이런 나락으로 떨어뜨린 장본인만큼은 처리해 달라. 그것이 얌전히 항복하는 조건이다…….

김태헌 사장이 상대방의 속내를 짐작하며 히죽 미소 지었다.

“아무렴 이 주임이라고 해서 동생이 가는 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진심으로 아끼는 것처럼 보입니다마는.”

“원래 가장 아끼는 것일수록 마음대로 안 되는 법이지. 내 장담하건대, 이 주임은 아마 ‘절대로 막을 수 없을 것’일세. 뭣하면 내가 저 아이를 도와줄 수도 있어.”

이시백은 죽는다.

김태헌 사장은 그렇게 암시하고 있었다.

이쯤이면 충분한 대답이 되었을까.

“……후우.”

순우경이 한숨을 쉬었다.

이 곱슬머리의 남자는 어딘지 안심한 얼굴이었다.

“사장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저는 걱정을 덜었습니다.”

“으허허. 그거 하나 얘기하자고 저 어린아이를 무대까지 올렸는가? 자네도 어지간히 속이 새카맣구만 그래.”

“뭐, 확실할수록 좋으니 말입니다.”

음악이 끝났다.

기생들은 일렬로 늘어서서 손님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초심자에게는 약간 버거웠는지, 윤시아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은 채로 윤시아는 숨을 거칠게 쉬었다. 다만 여전히 입가는 활기차게 웃었다.

‘길들이는 보람이 있겠어.’

긍정적인 여자아이는 싫어하지 않았다.

그만큼 망가뜨리는 보람이 있었으므로.

김태헌 사장이 미래에 대한 기대로 흡족하고 있을 때, 순우경이 무대를 향해서 걸어갔다. 또 무엇을 준비하고 있나 싶어서 김태헌이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

그때 김태헌은 순우경이 실실 웃는 것을 발견했다.

사회생활에서 으레 주고받는 웃음이 아니었다. 도리어 비웃음에 가까웠다. 김태헌은 묘한 감각에 사로잡혀서 눈썹을 찡그렸다.

순우경이 천천히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곳으로 모였다.

짜악-

손뼉이 울렸다. 손바닥과 손바닥이 부딪친 것치고는 다소 요란하게. 널따란 레스토랑의 공기에 찌르르 울리듯이. 문득 김태헌은 주위가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

“…….”

드르륵 하고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드르륵. 드르륵.

사방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헌터들이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자, 오십 명에 가까운 인원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새끼들이 왜 다 일나고 있어?”

헌터들이 당황해서 덩달아 일어났다. 그들의 의문에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이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레스토랑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부터 음식 따위는 먹지 않았다는 것처럼, 테이블에 오리 요리와 술잔이 그대로 덩그러니 남았다.

헌터들은 그들이 빠져나가는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혀, 형님!”

“…….”

김태헌 사장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레스토랑의 손님 전원이 나간 것은 아니었다. 육십 명 정도가 남았다. 그들은 향금산 유곽의 헌터들을 포위하듯이 서서히 걸어왔다. 어느새 그들의 손에 권총이 들린 것을 보고, 김태헌이 이죽거렸다.

“이건 또 시나리오가 어째 묘하게 흘러간다이.”

김태헌이 자리에 앉은 채로 순우경을 쳐다보았다.

그 건너편에서는 기녀들이 한없이 차가운 눈초리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배인, 내가 살짝 상황이 접수되지 않아서 그러는데, 조금만 친절하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이 무서운 아저씨들은 어디서 기어 나온 거여?”

“아, 출신지들이 좀 다양합니다. 서울에서 오신 양반도 있고, 의정부에서 오신 양반도 있고, 저기 아래 부산에서 여까지 오신 분도 있고.”

순우경이 시시껄렁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 사장님을 축하하려고 모이신 분들 아니겠습니까.”

“와아, 내 장례식에 오줌 싸갈기려고 부산에서까지 왔어? 그거 징하게 상냥하신 양반들일세. 그런데 어쩔까. 내가 아직 병풍 뒤에 누울 생각은 별로 없는데.”

“걱정하지 마십쇼, 사장님.”

순우경이 품 안에 손을 넣었다.

다음 순간, 그의 오른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제가 다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이래 봬도 우리가 동포 아닙니까?”

“씨바알 새끼. 말하는 뽄새가 싸가지를 하수구에 말아 처드셨나.”

김태헌이 육중한 몸뚱어리를 일으켰다.

부하 헌터들도 이를 으득 갈며 저마다 무기를 꺼냈다. 양 진영 사이에 한순간의 정적이 감돌았다. 먼저 소리를 지른 사람은 김태헌. 선수 필승의 이치를 신봉하는 남자였다.

“싸그리 족쳐 버려!”

항쟁이 시작되었다.

8

“어이, 이 주임. 이 시간대에 어딜 가나?”

“손님들 오기 전에 잠깐 몸이나 풀고 오겠습니다.”

이시백은 동료 경호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창관에서 외출했다.

열대야에 지쳐 개천가에 나온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시백은 어느새 자신의 전용 자리가 되어버린 곳, 개천의 물결과 물결 사이에 자그맣게 드러난 자갈밭에 걸어갔다. 이시백이 라디오를 내려놓았다.

“어머, 저거 봐.”

“이제는 저녁에도 하나 봐.”

사람들이 작게 웃으면서 수군거렸다. 이미 동네의 명물이 되어버린 이시백이었다.

찰칵 하고 이시백이 라디오를 재생했다. 유치하지만 경쾌한 팡파르가 흘러나왔다. 이시백이 자세를 똑바로 세웠다.

약간의 노이즈와 함께 구호가 힘차게 울렸다.

-국민 체조, 시이,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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