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29화
제4장 국민체조 2분 20초 (8)
6
한여름이 사람들의 땀을 물씬 쥐어짰다.
향금산 창관 헌터들은 대놓고 옷을 발가벗었다. 둥그스름하게 나온 배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시백은 자기가 돼지우리에 왔는가 사우나에 왔는가 그만 착각해 버릴 지경이었다.
“슬슬 입질이 오기 시작해야 하는데.”
김태헌 사장이 팥빙수를 먹었다. 사실 먹는다기보다 흡입하는 것에 가까웠다.
김태헌 사장도 자랑스러운 듯 웃통을 까 벗었는데, 심히 더위에 약한지 땀이 줄줄 흘렀다. 김태헌은 오늘로 네 그릇째 팥빙수를 비워 버리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시뻐얼. 에어컨 하나 수리 못해서 이게 뭔 생쇼를 하고 앉았냐.”
“수리공이 고치지 못하겠답니까?”
“오늘 안으로 가져다주겠다며 호언장담을 했는데 오는 길에 땅바닥에 코를 처박고 디져 버렸는가. 그놈 코가 멀쩡하면 내가 손수 뭉개줄 거야.”
평소에 사람 좋은 미소를 유지하던 김태헌이 자신의 본성을 풀풀 드러냈다.
이시백이 묵묵하게 팥빙수를 퍼먹었다. 단 음식은 싫었지만 언제 어디서도 정장을 차려입은 이시백에게 이 후끈함은 과연 견디기 힘들었다.
“지배인이 뭐래?”
“사장님께 개인적으로 사과를 드리고 싶다는군요.”
생각해 보니, 바다에 간 지 참 오래되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시아를 데리고 한 번 가 볼까. 수영복을 사주면 좋아라 하겠지. 이시백이 자기 마음대로 스케줄을 잡으면서 말했다.
“의외로 쉽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마도 거짓이겠습니다만.”
“뭐, 아우가 잘해준 덕택이지. 깔끔한 수완이었어야.”
이시백은 일패 기생 중 한 명을 꼬드겼다.
일패 기생은 지배인이 종업원들과 작당질을 했다고 증언해 주었다. 가게 돈을 빼돌렸으며, 일패 기생들에게는 따로 헌납금을 거두었다.
놀랍게도 이 헌납금은 만에 하나 기생들이 도주할 경우 도와주는 군자금.
즉, 순우경 지배인은 아예 대놓고 도주를 후원해 주고 있었다.
“자기가 후달리는 걸 아니까 고개를 납작 숙일 수밖에 없지.”
김태헌이 비웃었다.
“시백 아우가 독하긴 독해. 아무리 그래도 아가씨의 동생을 잡아서 인질로 삼다니. 나 같은 삼류는 따라하지도 못할 악당이라니까, 악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크으. 그 성실함, 그 의무감. 우리 아이들도 본받아야 하는데 말이야.”
김태헌이 부채를 부치면서 마음속으로 냉정하게 평가했다.
‘여간내기가 아니야.’
이시백은 지배인을 직접 끝장내지 않았다. 대신 주변을 파고들었다.
한 일패 기생한테 남동생이 있다는 정보를 얻어낸 다음, 이시백은 대담하게도 그 남동생을 납치했다.
유일한 가족이 잡혀 버리자 기생은 협박에 버틸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지배인에게 은혜를 입었다 해도 혈육의 정에 비견될까.
‘어린놈이라서 그런지 겁대가리가 없구만. 영리하고.’
요 한 달 동안, 이시백은 빠르게 기녀들의 환심을 얻었다.
이시백과 윤시아는 가게에서 거의 공식 커플로 인정받았다. 덕분에 ‘순수하게 사랑을 키워가는 청년과 소녀’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기생들은 그런 이미지에 혹해서 저들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적인 무장이 해제되었다.
‘나한테도 딱 너만 한 남동생이 있는데.’
한마디. 기녀가 윤시아에게 건넨 딱 한마디였다.
이시백은 이 정보를 전해 듣고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일패 기생이 이틀 휴가를 받고 창관에서 나갔을 때 그녀의 뒤를 밟았다.
결과, 이시백은 개성 외곽의 오피스텔에서 남동생이 살고 있음을 알아냈다.
이틀 뒤, 일패 기생의 남동생은 유괴되었다.
‘여러모로 대담무쌍한 자식이야. 뭐…….’
단, 조금 지나치게 배짱이 넘쳤다.
‘재능이 뛰어날지는 몰라도 경험이 부족하지만.’
김태헌 사장이 보기에 이시백은 자기 목을 스스로 졸랐다.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를 멋들어지게 해결하느라 바로 뒤에 놓인 진흙탕을 알아보지 못했다.
간단한 문제였다.
가게 동료의 가족을 제멋대로 납치하는 사람에게 누가 신뢰를 주겠는가.
‘가끔 해결사로 기용할 수는 있어도…….’
결국 누구 부하가 되지는 못할 성격이었다.
김태헌이 땀범벅이 된 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애당초 김태헌 사장은 이시백과 순우경, 두 사람 중 한 명을 버리고 갈 계획이었다. 어느 쪽이든 김태헌은 손해를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시백이 너무 요란하게 일을 처리해 버렸다.
‘유능하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여, 아우.’
확실히 이시백은 유능했다.
지나치게 유능한 나머지, 김태헌 사장은 지배인의 약점을 훤히 꿰뚫게 되었다.
처음에 김태헌이 기대한 것은 단지 지배인을 숙청해 버리는 데 ‘적당한’ 명분이었다.
100퍼센트 확고한 증거가 아니어도 좋았다. 썰어버려도 뒷말이 조금만 나올 정도. 딱 그만한 명분만 있어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러면 내가 구태여 순우경을 지워 버릴 필요가 없거든. 허허.’
이시백은 기대 이상으로 뚜렷한 증거들을. 그것도 무더기로 가져왔다.
이 증거물을 갖고 협박할 경우, 지배인은 절대로 김태헌에게 반항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까닥하면 자기 목줄이 날아갈 정도로 강력한 자료가 사장의 손에 주어져 있었다. 순우경이라는 난폭한 호랑이를 얌전히 만들어버릴 힘이 김태헌한테는 생겼다.
‘반항하지 못하는 호랑이를 왜 도살하겠냐, 시백 동생.’
본말전도였다.
지배인을 물어뜯으라고 들여온 사냥개는,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쓸모가 없어졌다. 무능해서가 아니라 과도하게 유능했기에.
김태헌 사장은 조금 궁금했다. 과연 이시백, 이 눈앞의 유망한 젊은이는 도리어 지금 숙청될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있을까?
“흐으.”
김태헌이 작게 웃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동생, 지배인한테 내가 원하는 날짜와 장소를 추후에 알려줄 테니 거기서 술이나 한잔 나누자고 전달해 줘. 물론 지배인은 혼자서 와야 하고.”
“그때 끝내 버리실 생각입니까?”
“암, 화끈하게 끝내야지.”
다만 끝장나는 쪽은 지배인이 아니었다.
이시백이었다.
지배인에게 단단히 목줄을 채워놓은 이상, 김태헌은 이번 사태를 적당히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이시백을 희생물로 바치고자 했다.
……안타깝게도 사장과 지배인 사이에 그동안 ‘사소한 오해’가 있어왔다.
일패 기생의 남동생을 납치한 것은 전부 이시백의 독단이었다. 사장은 아무것도 몰랐다…….
가게에 분란을 일으킨 이 주임은 마땅히 처단당하고.
지배인은 이시백의 모가지를 선물로 받음으로써 체면을 차리며.
김태헌 사장 본인은 창관을 완벽하게 자기 수중에 넣는다.
‘베스트 시나리오!’
김태헌의 두꺼비 입술이 히죽 웃었다.
‘이게 베스트 시나리오다.’
결과적으로 김태헌 사장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시백이 알아서 다가오더니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 주고, 알아서 죽어 나자빠질 따름이었다. 의뢰금으로 약속한 삼억 원? 어차피 시체가 되어버릴 사람한테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하는 돈이었다.
‘역시 나는 운수가 좋아. 가만히 있어도 하늘이 나를 도와주잖아.’
김태헌은 슬슬 진지하게 종교를 믿어볼까 고민했다.
이 더러운 세상에 신이 있을 리는 없었지만, 어쩌면 신은 조금 편파적일지도 몰랐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편애하는 것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태헌은 감사하게 편애를 만끽할 심산이었다.
“이 주임.”
“예, 형님.”
“뭔가 바라는 거 없어? 보수 말고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봐. 내가 최선을 다해서 들어줄 테니.”
김태헌이 착한 봉사를 하나 해보는 심정으로 말했다.
이시백은 다소 의외라는 듯 눈을 조금 치켜떴다. 잠시 후에 이시백이 말했다.
“시아를 잘 보살펴 주십시오.”
“이 주임 동생? 아이고.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우리 아우의 동생이라면 내 동생인 거나 마찬가지 아냐. 내가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도 막내만큼은 잘 키워 줄게.”
김태헌이 슬쩍 윤시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싱그러운 갈색 머리. 약간 곱슬이 섞여서 더 귀여웠다. 이제 갓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와 같은 매력이 있었다. 김태헌도 의리가 있었다. 이 정도로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해 준 청년의 동생이라면,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펴야 하리라.
‘애인으로 삼아서 귀여워해 주면 딱 좋겠구만.’
김태헌은 윤시아의 가녀린 몸매를 생각하니 흐뭇해졌다. 제법 앙증맞은 신음을 흘리지 않을까. 자고로 꽃이란 아주 살짝 개화했을 때가 아름다운 법이었다.
‘오빠를 잃어서 상심한 틈을 노리면 쉽겠지.’
김태헌이 가게 아가씨들한테 손을 댄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나이가 어린 여자아이를 좋아했으므로 일패 기생보다는 주로 삼패 기생이나 견습 기생을 노렸다. 이것이 순우경 지배인이 김태헌에게 반기를 든 원인 중 하나였다.
순우경이 반항하기 시작한 이후, 김태헌은 꽤 오랫동안 아가씨와 살을 섞지 못했다. 슬슬 배가 고파서 군침이 돌았다. 기나긴 금식. 윤시아라는 소녀는 새로운 포식 생활을 시작하는 데 알맞은 애피타이저였다.
“형님은 어떻습니까?”
“어?”
김태헌이 느긋하게 윤시아의 알몸을 상상하고 있을 때였다. 이시백이 물었다.
“형님만 제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조금 불공평합니다. 형님께선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저와 시아를 무척 잘 대해 주셨습니다. 저 또한 고용주와 종업원의 사이를 뛰어넘어, 형님께서 바라시는 바를 들어드리고 싶습니다.”
“으허허.”
당돌하기도 하거니와 재밌기도 한 발언에 김태헌이 사람 좋게 웃었다.
“아우가 이미 일을 잘해 주고 있는데 내가 뭘 더 바라겠어야. 그냥 이 형은, 시백 아우가 건강하게만. 응? 건강하게 오래오래 똥칠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건강입니까…….”
“그려. 내가 이 짓거리를 오래 하다 보니까 건강만큼 중요한 게 없더라고. 머리가 암만 똑똑해도, 싸움을 암만 존나게 잘해도, 건강이 거지같으면 인생도 졸지에 거지처럼 변하는 거야.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사나이라면 뭐든지 길게, 아주 길게 봐야 하거든.”
이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진지한 기색이. 상대방의 말에 진심으로 수긍했다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우리 동생은 선배의 말을 잘 듣는 게 최고 장점이야. 아무튼 지배인한테 그리 전해 줘. 조만간 끝을 봐버릴 테니까.”
“예, 형님.”
이시백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사장실에서 나갔다.
“진짜 웃긴 놈이라니까. 으허허.”
김태헌 사장이 왕후장상마냥 거만하게 부채를 흔들었다.
중국식 창문 너머를 바라보니, 참매미들이 무더운 하늘로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야― 이야― 이야― 이야아― 하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울음소리에는 일종의 영원감 같은 것이 있었다. 김태헌은 문득 이마 부근이 새하얘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
데자뷰라고 해야 할까.
김태헌은 만주에서 보낸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 고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황량했다.
그가 유일하게 떠올리는 풍경은 마을 한가운데에서-어쩌면 마을의 어귀일 수도, 어쩌면 아예 마을 바깥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고향으로 새겨진 그곳에서-자신이 외로이 홀로 서 있는 것이었다.
저 멀리서 먼지 구름이 피어올랐고, 김태헌 본인도 몸의 반절이 먼지에 묻혀 있었다.
김태헌이 창문 바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놈의 에어컨 수리공은 변비에 걸려서 오장육부가 똥독에 옮았나. 왜 안 와.”
그의 얼굴은 한없이 무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