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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의 제국-28화 (28/142)

건달의 제국 28화

제4장 국민체조 2분 20초 (7)

5

“저를 인질로 내줬다고요?”

“네 말고 담보로 걸 만한 게 없었다.”

윤시아가 눈썹을 찡그렸다.

저녁 시간. 창관이 본격적으로 업무에 들어가기 전, 약간의 짬이 나서 윤시아는 이시백과 함께 가게 뒷문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지 않아서 밀담을 나누기에 좋았다.

“제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담보로 맡기니 마니 얘기가 나와요. 아니, 맡겨도 상관없지만요. 마음대로 거래를 진행시켜도 상관없지만요. 적어도 저한테 미리 말은 해줘야죠!”

“걱정하지 마. 일패 기생한테도 너를 개인적으로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어려운 일은 아무것도 없어.”

“걱정하는 게 아니라 불평하는 거예요, 바보 선배.”

윤시아가 계단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물장구치듯 천천히 허공에 휘저었다.

검은색 치파오가 미끄러져 내리면서 다리의 하얀 맨살이 드러났다. 시아는 노을에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곰방대를 뻐끔거렸다.

“아니면 뭐예요. 저 윤시아는 선배의 개인 소유품이라도 되는 건가요? 창관에 견습생으로 들어가지 않나, 살벌한 아저씨들의 세계에서 인질로 매매되지 않나. 뭔― 가 너무 선배 형편에 좋을 대로 이용된다는 느낌인데요.”

“이번 일만 끝나면 사치란 게 무엇인지 보여 주마.”

이시백은 누군가에게 사과하느니 차라리 화끈하게 보상을 약속해 주는 성격이었다. 다만 고아로 태어나서 근근이 살아가는 시아에게는 확 와 닿지가 않았다.

“사치요? 맛있는 거? 저 예전부터 스테이크를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평범하다고 해야 할지 소박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는 요구사항.

이시백이 미소를 지었다. 이 약삭빠른 후배는 교묘하게 그의 웃음을 유도하고 있었다.

“스테이크보다 훨씬 더 좋은 걸 선물해 주지.”

“저는 가정환경이 무척이나 열악했던 관계로 스테이크보다 대단한 사치를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걸요.”

“하루에 일억을 쓰면 어떤 생활이 가능할지 기대해라.”

“하루에 일억이요?”

윤시아가 선배의 명령에 따라 그런 생활을 상상해 보았다.

솔직히 스테이크 고기가 산더미처럼 쌓인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걸 솔직하게 얘기했다가는 선배한테 놀림을 당할 게 분명했으므로, 윤시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어요.”

“모르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돈으로 어디까지 미친 짓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본다는 점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경험이다.”

이시백이 윤시아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손짓이 투박했다. 쓰다듬는 것 같기도 했고, 토닥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윤시아는 이런 어설픔이 싫지 않았다. 그녀가 꺄 하고 웃었다.

“간지러워요, 선배. 성희롱으로 고소해 버릴 거예요?”

“연기를 잘해 줬어.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네가 연기해 준 덕분에 쉽게 지배인과 만날 수 있었다. 이번 공사가 성공하면 공로의 절반이 네 것이야.”

“더 칭찬해 주세요. 엣헴.”

윤시아가 없는 가슴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이시백은 다시 한 번 작게 피식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확히 어떻게 처리할 계획이에요?”

“김태헌 사장이 인신매매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증거는 지배인이 가지고 있어. 그걸 부산의 광수대와 특수부에 찌른다. 어차피 개성의 경찰과 검찰은 썩었으니까, 중앙이 알아서 서울이나 의정부에 연결시켜 주겠지.”

“헤에.”

일부러 불필요한 징검다리를 하나 더 밟는다.

한반도의 정부는 이북을 사실상 도시들에게 맡기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북방을 버리고 남방에 안정적인 정부를 구축한 것이었다. 여차하면 바다로 도망친다라는 선택지도 당연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사회의 거악(巨惡)에 맞서는 세력이 없지는 않았다.

이들은 기회만 다가온다면-즉, 도시들의 자치를 침해해도 될 만큼 명분이 확보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헌터들의 용병단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윤시아는 철저한 개인 과외를 통해 이들이 누구인지 숙지했다.

“시간이 쪼까 걸리겠네요.”

“아무리 짧아도 이십 일은 걸릴 거다. 그치들도 개성에는 눈독을 들이고 있을 테니, 속전속결로 끝내기를 원하겠지.”

“역시 중앙 정부의 행정력을 넓히기 위해?”

“다 그런 거다.”

윤시아가 한숨을 쉬었다.

‘거악 척결’이라는 슬로건에 뒤따르는 경찰과 검찰의 엘리트들도, 어디까지나 철저히 권력 논리에 따라 움직였다. 개성이 장기밀매의 중심지라는 게 밝혀진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중앙이 개성에 개입할 명분이 생긴다. 이런 계산이 성립하기에 이른바 높으신 분들도 엘리트들이 행동하는 걸 허락했다.

“세상에 쉬운 거 하나 없네요. 막 잘 짜인 톱니바퀴들 같아요.”

“우리는 톱니바퀴들 틈바구니를 이용하면 그만이다.”

“아직 열여섯 살인데 세상이 잿빛투성이인 걸 깨달아서 음울하다…….”

윤시아가 힘없이 연초 연기를 내쉬었다.

고아 태생, 마약상 회계, 창관 견습생, 그 정체는 사실 내부 고발자. 인생에서 한 번 경험하기도 어려운 것을 절찬리에 순서에 따라 섭렵하는 소녀가 이곳에 있었다.

“참, 선배. 어제 기생 언니 옆에서 시중을 들었는데요.”

윤시아가 잡담을 꺼내려고 했을 때였다.

철컹 하고 가게 뒷문이 움직였다.

윤시아는 당황해서 멈칫했다. 자기가 이시백과 밀담을 나누는 모습이 들켜봤자 좋을 게 없었다. 윤시아가 비록 첫사랑에 푹 빠진 여자애를 멋들어지게 연기했다지만, 그 진실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으리라.

‘아차, 얼른 숨어야 하는데.’

윤시아가 엉덩이를 반쯤 들었다.

철문이 열리는 방향으로 뛰어가면 아슬아슬하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시간에 맞을지 안 맞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시도를 해보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무언가가 자신의 허리를 잡았다.

‘어라?’

무척이나 단단한 손길이었다.

윤시아는 조금도 저항하지 못하고 손길에 이끌려서 넘어졌다. 자기 몸뚱어리가 꼭 성냥개비처럼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어, 어라아?’

이대로 무기력하게 몸이 넘어지는가 싶었다.

또다시 단단한 무언가가 윤시아의 등을 받아주었다. 그것이 이시백의 오른팔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윤시아는 이미 선배의 품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코앞에 이시백의 얼굴이 자리했다.

남자가 화려한 춤을 추고서 마무리로 파트너를 품에 안은 것 같은 자세.

“……선배?”

“조용.”

이시백의 얼굴이 더욱 가까워졌다.

윤시아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순식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심장이 피스톤처럼 쿵쾅거렸다. 윤시아는 당황한 나머지 빠르게 속삭였는데, 이게 그녀의 최선이었다.

“다, 단계를 세 개쯤은 건너뛴 것 같은데요? 아니면 제가 모르는 사이에 벌써 스토리가 거기까지 진행되었나요? 이, 이게 소위 요즘 젊은이들의 연애 감각인가요? 고속도로에도 톨게이트는 있습니다?”

“조용히 하라니까.”

윤시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시백의 숨소리가 뚜렷하게 귓가에 울렸다.

‘연초 냄새…….’

윤시아가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으으. 키스는 조금 더 낭만적인 걸 원한다고요.’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선배다운 향기라고 생각했다. 만약 선배의 입술에서 레몬이나 딸기 냄새가 풍겼다면 도리어 웃어버렸을지 몰랐다. 윤시아는 체념하고 이 의미 불명의 사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째앵-

이시백의 입술이 윤시아의 입술에 살짝 노크하기 직전에 멈추었다. 별안간 철제 도구가 떨어지면서 내는 쇳소리가 들린 것이었다.

윤시아가 눈을 떴다. 이시백의 등 너머로, 자기와 같은 기생 견습생이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이 여자애는 가게 뒷문을 열자마자 펼쳐진 광경에 경악하고 있었다.

“아.”

이제야 상황이 이해되었다.

이시백은 윤시아와 키스하는 척함으로써 예기치 않은 방문자를 속이려는 것이었다.

윤시아가 이시백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고 팔다리를 바둥거렸다.

이시백은 의외로 순순히 후배를 풀어주었다. 어린아이에게 잡혔다가 기적적으로 방생된 거북이처럼 윤시아가 재빠르게 동료 견습생한테 다가갔다.

“아니. 아니,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그게 아니라. 그거인데요!”

“미, 미안해. 나는 그냥 주마등이 고장 나서 창고에 버리러 왔다가!”

동료 견습생도 허둥지둥 손을 휘저었다.

여자아이 두 명은 마치 마임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서로 마주 보며 이리저리 손사래를 쳤다.

“절대로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라. 불의의 사고였어!”

“…….”

천만다행으로 먼저 제정신을 차린 쪽은 윤시아였다.

상대방이 당황하자 윤시아는 오히려 냉정함을 되찾았다.

‘가게에서 몰래 남자랑 키스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지면 안 돼!’

첫사랑에 빠진 소녀는 귀여웠다. 얼마든지 연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발랑 까져서 업무 시간 도중에 땡땡이를 치고 남자와 밀회를 나눈다-이런 소문은 곤란했다. 도가 지나쳤다. 여자들의 세계에서는 항상 중도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하여 윤시아는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총동원하게 되었다.

“잠깐만요. 내 얘기 좀 들어보세요.”

윤시아가 동료의 손을 덥석 잡았다.

윤시아의 눈동자가 어찌나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는지, 동료 견습생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으, 으응?”

“이번 일은 다른 애들이나 언니들한테 꼭 숨겨주세요.”

진실의 왜곡.

“이런 얘기가 퍼져 버리면 제가 너무 부끄러워지고, 시백 오빠도 업무를 하는 데 난감한 상황을 겪을 거예요. 가게 내부에서 연애를 허락해야 하나 금지해야 하나 논란까지 일어날 수 있구요. 쓸데없이 일이 커져 버릴 가능성이 높아요.”

악의적인 확대 해석.

“소문을 퍼뜨린 당사자에게도 불이익이 오겠죠?”

“그, 그럴지도 모르네.”

“반드시 그렇게 돼요.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됩니다. 사소한 실수 때문에 가게에 손해를 끼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으니까요. 빈대를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워 버리는 짓이랑 똑같아요.”

거짓된 전제의 사용.

그럴듯한 비유의 활용.

“우리 두 사람은 가게를 위해서. 그래요. 가게를 위해 이번 일과 관련하여 침묵을 지킬 의무가 있어요. 만약 이런 상황에서 비밀을 흘려버린다면, 그야말로 이기적인 직원이니 처벌받아도 변명할 도리가 없을걸요.”

마지막 화룡점정으로 은근한 협박까지.

휘황찬란한 논쟁술의 일제사격에 동료 견습생은 정신을 못 차렸다. 눈이 빙글빙글 돌면서 그저 기계적으로 대답할 따름이었다.

“으, 응. 절대로 아무한테도 안 말할게.”

“모쪼록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시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완벽했다.

선배의 기습 공격 때문에 아주 잠깐 당황하고 말았지만,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지게 사태를 무마했다고, 윤시아는 자부했다.

가게 뒷문으로 다시 들어가는 동료 여자애를 바라보며 윤시아가 음흉하게 웃었다.

“…….”

이시백이 다소 썩은 얼굴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참고로 ‘시아가 이 주임과 가게 뒤뜰에서 키스하고 있더라’ 하는 소문은, 바로 그날 밤 창관 전체에 퍼졌다.

“우리 막내, 장하다! 그렇게 선수를 쳐야 하는 거야.”

“더 이상 우리가 가르쳐 줄 것도 없네. 이만 하산해도 괜찮아.”

“막내야, 막내야. 어디까지 갔어? 응? 어디까지 간 거야?”

“…….”

기생 언니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윤시아가 세상만사를 통달한 현자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여자들의 세계에서 비밀이라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간과하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제발 간과하고 싶었다.

윤시아가 절망에 가득 차서 중얼거렸다.

“신은 죽었어…….”

철두철미한 무신론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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