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26화
제4장 국민체조 2분 20초 (5)
이시백과 윤시아. 두 사제의 이인삼각 달리기는 주효했다.
이 시기, 향금산 창관의 지배인은 사무실에 틀어박혔다.
지배인이 손님들에게 크나큰 결례를 범하면서까지 두문불출하는 까닭은 단 하나.
자기 마음대로 기녀를 ‘처분’한 김태헌 사장에게 침묵시위를 벌이는 것이었다.
“지배인께서 저를 보자고 하신다고요?”
“네.”
따라서 이시백은 업무를 시작하고 한 번도 지배인과 만나지 않았다.
일패 기생이 방긋방긋 웃었다. 그녀는 지배인에게 밀명을 받아 들고 있었다. 이시백을 지배인의 집무실까지 안내하는 것이 기생의 역할이었다.
“이번 마약 건으로 이 주임한테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싶으신가 봐요.”
“조금 난감하군요.”
사회생활에서 으레 그러하듯 이때 조금이란 ‘엄청나게’ 정도로 번역되었다.
그 증거로 이시백은 노사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노동자처럼 안색이 어두웠다.
“사장님이 저한테 개인적으로 지배인을 보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아, 그러세요? 어쩜 좋지.”
일패 기생이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 주임은 사장의 끄나풀이긴 해도 이쪽에 몰래 침투시키려는 요원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간자로 써먹을 속셈이라면 여기서 난색을 표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면, 오히려 이런 심리를 역으로 이용해서?’
기생이 빠르게 이시백의 표정을 살폈다. 무뚝뚝한 표정에 덤덤한 눈빛. 향금산 창관에서 벌어지는 정치 싸움 따위는 들어본 적도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제 스무 살이 된 남자애가 거기까지?’
따지고 보면 일패 기생도 겨우 스무 살 안팎이었다.
하지만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일패 기생은 격이 달랐다. 하루에 최소한 한 명. 일 년에 삼백 명이 가뿐히 넘는 숫자의 손님을, 내장에 능구렁이를 키우는 작자들을 상대해 왔다. 단순히 나이로는 따질 수 없는 경력을 일패 기생은 갖고 있었다.
“이런 건 어떨까요. 시아라고 했나요? 그 아이가 실수를 저질러서 지배인에게 혼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주임이 지배인한테…….”
그때, 기생은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여태껏 차분한 수묵화와 같던 이시백의 눈동자에 살기가 감돌았다.
일패 기생은 이시백과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온몸이 경직되었다.
불쾌함이 지나치면 공포가 된다던가. 물기에 젖은 뱀들이 손을 타고 팔뚝까지 기어오르는 그 감각에 기생은 소름이 끼쳤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시백이 그녀를 지긋하게 바라보았다.
“일 얘기를 하고 있는데 왜 생뚱맞게 동생을 끌고 옵니까.”
“아…….”
“지금 저를 협박하는 거 아닙니까. 지배인을 만나러 가주지 않으면 시아한테 불이익을 주겠다고. 같은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한테 도가 지나치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만.”
일패 기생은 자기가 역린을 건드렸음을 직감했다. 이 남자는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함부로 사적인 영역을 침범했을 때 송곳니를 드러냈다.
기생은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협박이라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는 단지 그렇게 변명하면 사장님도 양해해 주지 않을까 싶어서.”
“저보고 사장님한테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지배인을 만나라는 얘기입니까? 그래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 지배인은 이 주임의 상급자이기도 하고…….”
“그리고 사장님은 지배인의 상급자입니다.”
기생이 할 말을 잃었다. 뭐 이렇게 성실한 헌터가 다 있는가.
이시백은 상대방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길이 무척 억척스러웠다.
“하지만 동생의 선배께서 말씀하시는데 마냥 거절하기가 힘들군요. 업무가 끝난 다음에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고, 고마워요. 이 주임.”
“저희 시아를 잘 부탁합니다.”
다시는 이런 얘기에 동생을 끌어들이지 마라.
그런 무언의 협박이 전달되고 있었다.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윤시아의 편의를 봐달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어디까지나 기브 앤 테이크에 기반을 둔 협상이었다.
“……당연하지요.”
기생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졸지에 일패 기생이 이제 막 유곽에 들어온 신입의 뒷배를 봐주게 생겼다.
장군이 졸병을 후원하는 것과 마찬가지. 윤시아는 견습생으로서 인생이 활짝 피었다.
이시백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리고 자기 볼일을 보겠다는 태도로 걸어갔다.
일패 기생은 이시백이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걸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세상에. 시아 걔가 진짜 봉을 잡았구나.”
기세에서 완전히 제압당했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분노가 치밀지 않았다.
단지 ‘제대로 된 남자’, 이미 오래전부터 멸종위기에 처했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다이아몬드보다 희귀한 종족을, 자기보다 한참 어린 여자아이가 선점했다는 것에서 부러움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일패 기생은 눈가가 뜨거워졌다.
“히잉. 나도 좋은 남자 만나고 싶은데.”
도시의 벚꽃이라 불리는 일패 기생.
실상은 서방님이라 쓰고 왕자님이라 부르는 남성을 찾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여인들이었다.
달마다 3천만 원, 4천만 원을 쉽게 버는 여자가 어떻게 월급 수백만 원짜리 남편을 내조하겠는가? 얌전히 자그마한 용돈을 받아 가며 만족할까.
매우 어려웠다.
일단 화류계 물을 먹으면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남자를 고르는 눈이 망가졌다. 기생은 자기가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미 익숙해져 버린 생활습관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결국 결혼이라는 소망이 점점 더 멀어졌다.
어쩌겠는가.
“……오늘은 손님이랑 같이 달려야지.”
연초를 뻐끔거리고 술을 마시면서 삶을 위안하는 수밖에.
일패 기생은 열여섯 살 소녀를 질투하며 그날따라 술을 미친 듯이 퍼마셨다.
당연하게도, 기생은 간암이 발병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직업이었다.
4
이시백이 집무실 문을 두들겼다.
오전 8시. 창관의 업무가 마무리된 시간이었다.
잠시 뒤에 들어오쇼, 하고 적잖게 경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시백이 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섰다.
“…….”
지배인은 서류를 작업하고 있었다. 이시백이 들어왔음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몹시 무례한 행위였지만 이시백은 도리어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상대방의 화를 살살 북돋워서 이성을 잃게 하는 것이 저 남자의 특기였다.
‘여전히 변하지 않았군, 순우경.’
과거에 이시백과 다방면에서 자웅을 겨룬 사나이.
이시백의 용병단에 투항하려고 했으나 그 전에 주인한테 처단당한 남자.
‘아니, 변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조금 이상한가.’
이시백이 기억하는 순우경은 40대의 넉살 좋은 대장부였다.
반면에 지금 책상에서 한껏 바쁜 흉내를 내고 있는 남자는 20대 중반. 인상은 비슷했지만 훨씬 더 젊고 훤칠하게 생겼다.
게다가 직함만 지배인이 아니라는 듯 값비싼 양복을 차려입었다.
‘나는 유능한 사람이다’라고 광고하고 싶은 것인지 자세에 각이 똑바로 잡혔다.
이시백은 그게 너무 우스웠다.
‘꽃남방 마니아 주제에 고가 양복은 무슨.’
순우경을 네 글자로 표현하자면 시시껄렁.
봄이 오나 겨울이 오나 촌스러운 꽃남방을 걸치고 다니며 껌을 질겅거렸다. 사람이 자기 분수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헌터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사람 썰고 다니는 깡패인데 뭐 대단해서 양복을 차려입느냐 하고.
그런 남자였다.
“이 주임.”
이십 분 정도가 지난 다음에야 순우경이 고개를 들었다.
“예, 지배인.”
“내가 요새 일이 바빠서 말이지. 이 주임을 불러놓고 쓸데없이 세워놓았어.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괜찮습니다.”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도 제법 웃겼으니까.
이시백이 최선을 다하여 무표정한 낯짝을 유지했다.
“이 주임에 대한 소문은 나도 잘 듣고 있어. 동네방네 유능하다고 소문이 나서 내가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기만 해도 얘기가 들려오지 뭐야. 그 나이에 참 대단해. 아, 이건 비꼬는 게 아니다?”
“벌써 지배인 자리에 오른 분께 비하겠습니까.”
“우리 이 주임은 성격까지 좋네. 신사야, 신사.”
순우경이 실실 웃었다. 적잖게 호의적인 미소였지만 상대방한테 앉을 자리를 권하지도 않았다. 순우경은 이시백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냥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 우리 아가씨가 큰일 당할 뻔한 걸 이 주임이 무마해 줬다면서. 고마워. 아가씨들은 전부 내 여동생들이나 다름없거든. 손님 대접하는 방법도, 말하는 방법도, 머리 굴리는 방법도 전부 내가 손수 가르쳤지. 사실 여동생이 아니라 귀여운 딸들처럼 느껴지기도 해.”
“이해합니다.”
“이 주임도 만약 딸이 엄한 데서 상처를 입으면 막 화가 나겠지? 아니, 이 주임은 딸이 없을 테니 약간 공감하기 어려우려나.”
순우경이 장죽에 불을 지폈다.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불어내면서 순우경이 물끄러미 이시백을 바라보았다.
“윤시아, 그래. 우리 가게 막내로 들어온 아이가 만약에 말이야. 무진장 나쁜 놈한테 몹쓸 짓이라도 당한다면……. 이 주임도 소위 말해서 야마가 돌아버릴 거야. 안 그래?”
지금 순우경은 이시백을 떠보고 있었다.
여기서 수긍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이시백의 위치가 결정되었다. 고개를 끄덕이면 순우경의 편을 들어주는 것.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면 김태헌 사장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순우경은 ‘넌 어느 쪽이냐’ 하고 묻고 있었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시백이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멱줄을 따버려야지요.”
“…….”
순우경의 미소 또한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