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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의 제국-25화 (25/142)

건달의 제국 25화

제4장 국민체조 2분 20초 (4)

3

“이 주임님, 7번 국화방에 들어간 손님 리스트에 좀 넣어주세요.”

“술주정이 심합니까?”

“아뇨, 돈도 없는데 완전 진상이 따로 없어요.”

“알겠습니다. 상황 보고 블랙을 먹이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이시백은 착실하게 유곽에서 입지를 다졌다.

허 주임이 죽고 사라지자 이시백이 빈자리를 차지했다. 기생들은 이 스무 살 애송이가 상당히 유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서 배웠는지 몰라도 화류계에 대해 빠삭했다.

‘정말로 대머리 사장이 전문가를 데려온 걸까.’

일패 기생들마저 헷갈릴 정도였다.

물뽕으로 한바탕 난리가 일어나자,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기녀는 동료들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자세하게 얘기해 주었다.

자칫 잘못되었으면 기녀한테까지 덤터기가 씌웠을 상황. 기녀는 이시백이 마치 자기를 구해준 왕자님이라도 된 것처럼-그래야 기녀 본인이 왕자에게 구해진 공주님이 되지 않겠는가?-과장해서 떠들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전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더라니까! 한참 아이인 줄 알았는데 완전 남자답더라.”

기생들이 꺄아아 하고 좋아했다.

“선수네, 선수. 한두 번 쳐 본 멘트가 아니야.”

“물뽕은 어떻게 그리 통달했대? 원래 술집에서 일했나.”

“아, 그건 내가 알아.”

기생 한 명이 활짝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그녀는 이시백이 이곳에 온 첫날 몸을 섞은 여인. 본의 아니게 윤시아한테 밤샘을 강요한 여자였다.

기생은 동료들이 모르는 정보를 혼자서 알고 있다는 것이 무척 뿌듯했으며, 이 우월감을 과시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사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다는 맛이라도 없으면 기생 짓은 못 해먹을 직업이었다.

“내가 한 나흘 전인가, 그 남자랑 잤거든. 오랜만에 찾아온 뉴페니까 이거저거 꼬치꼬치 물어봤지. 글쎄, 이 주임이 예전에는 의정부 마약 라인을 꽈악 잡고 있었대.”

“의정부?”

“응, 아주 거기서 간부처럼 대접받았다는데! 그 어린 나이에 무슨 재주가 있었는지, 의정부에서 어깨 좀 편다 하는 건달들도 이시백만 보면 형님, 형님 하고 존댓말을 꼬박 썼대.”

고작 마약계에서 보름밖에 일하지 않은 이시백이, 그것도 영세 마약상에게 고용되었던 이시백이 순식간에 의정부 마약 산업의 대부가 되어버렸다.

여기엔 화류계만의 독특한 법칙, 즉 얼마나 대단한 손님과 잤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값어치가 정해지는 풍습이 암암리에 적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일개 공무원과 자도 그 기생은 부산 시장(市長)과 잤다고 말했고, 만에 하나라도 진짜 부산 시장과 잤으면 미국 대통령과 잤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에이, 거짓말. 그렇게 대단한 남자가 왜 여기까지 흘러왔는데?”

“얼마 전에 의정부에서 라블린시아 관련으로 난리가 났잖아. 그때 검찰에서 아주 작정하고 마약 라인을 죄다 때려잡았대. 이 주임은 겨우 몸 하나 건져서 도망쳤고.”

“아아.”

기생들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리오가 그럴듯했다.

그중에는 기억력이 남다른 일패 기생들이 의정부 마약 사건의 날짜를 되짚었다. 딱 20일 정도 되었다.

이 주임이 의정부에서 탈출하여 새로이 일자리를 구했다고 했을 경우, 기간이 절묘하게 딱 맞아 떨어졌다…….

‘설마 그럼.’

‘진짜로 사장의 끄나풀이 아니라고?’

일패 기생들이 눈짓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가게가 규모에 비해 전문가가 부족한 건 사실이야. 태생이 헌터들 용병단에서 비롯했으니까. 거기에 어떻게 금박을 입혀 보려고 화교 출신의 여자들만 데려다 놓고 사업에 특별화를 노렸지. 지배인을 따로 고용한 것도 전문가가 필요해서고…….’

‘지금 지배인을 숙청한 다음 새로 지배인에 올리려고 섭외한 걸까?’

가능한 이야기였다.

진흙탕과 같은 화류계에서 미꾸라지처럼 살아남은 일패 기생들이 머릿속에서 서둘러 주판을 두들겼다.

‘의정부에서 어느 정도 보스로 취급받던 사람이 일개 종업원으로 고용되는 건 말이 안 돼. 너무 처지가 몰락해 버리는 거니까.’

‘하지만 지배인이라면 얘기가 달라지네. 직급이 괜찮은걸.’

‘흐음. 아직도 마약 쪽 인맥을 갖고 있을까. 그럼 손님들 대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유통 라인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아니, 오히려 그러니까 지배인이 되려고 하는 걸까…….’

저마다 수준의 차이가 있었지만 일패 기생들이 계산을 전개했다.

‘대머리 사장이 마약까지 사업을 확장하려는 수도 있어.’

‘허 주임은…… 마약 라인을 새로 파는 데 거추장스러워서 치워 버렸나?’

‘안 돼, 증거가 너무 부족한데.’

머구리.

도박판에서 자기 손에 들어온 카드패만 보고, 다른 사람들 카드패는 전혀 상상하지 않는 호구를 가리켜서 그렇게 불렀다.

머구리, 그러니까 잠수부처럼 바다의 밑바닥만 뚫어지라 쳐다보지 큰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초짜.

‘대머리 사장이 뭘 노리는 거야?’

‘우리 지배인의 계획을 간파한 건 아니겠지.’

일패 기생들이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그녀들이 가장 경계하는 사태가 바로 머구리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상대방은 이쪽이 어떤 카드를 들고 있는지 뻔히 아는데, 이쪽에선 상대방의 패를 짐작할 방법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위험했다.

“이번에 새로 견습생으로 들어온 아이 있잖아.”

일패 기생 중 한 명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얼핏 보기에는 그녀 또한 지금 오가는 화제에 관심이 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패 기생이나 삼패 기생은 상상도 못할 심계(深計)가 그녀 마음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아이가 이 주임 동생이나 다름없다며.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아, 시아예요. 언니. 분명히 윤시아라고 들었어요.”

“그래. 시아를 불러서 한 번 이 주임에 대해 들어보는 건 어떨까. 이제 열다섯 살이라니까 제법 순수한 의견을 들을 수 있을 거 같은데.”

기생들이 좋다며 찬동했다. 곧이어 삼패 기생이 쪼르르 달려 나가 윤시아를 데려왔다.

하늘과 같은 선배들이 모여 있는지라 긴장한 것일까. 윤시아는 애써 표정을 밝게 지으려고 하면서도 긴장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머나. 귀여워라―”

“영계가 깜찍한 것 좀 봐. 우리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가, 감사합니다.”

윤시아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기생들은 또다시 깔깔 웃었다.

사람이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질투가 나지만 자기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조금 너그러워지게 마련이었다.

“시아야, 우리가 마침 너희 오라버니 얘기를 하는 중이었거든.”

“아, 시백 오빠요?”

윤시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요번에 들어온 사람이니까. 어떻게 오라비랑 만났는지 말해주지 않을래?”

“시백 오빠는 정말 착한 분이에요!”

언제 긴장했느냐는 듯 윤시아가 활기차게 말했다.

일패 기생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후후, 어지간히도 오빠를 좋아하는 모양이네.’

사춘기 시절의 사랑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만드는 향기가 있었다.

윤시아는 자랑스럽게 이시백을 찬양하기 시작했고, 기녀들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즐거워했다. 기실 원숭이가 재롱을 부리는 것에 손뼉을 쳐주는 것과 똑같았다.

“원래 라블린시아 작업장에서 같이 일했어요. 제가 회계를 맡았거든요.”

“어머, 그래?”

“얼마 전에 검찰들이 몰아쳐서 작업장에 막 불이 나고 그랬어요. 저는 위층에 갇혀서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시백 오빠가 저를 번쩍 안아 들더니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거예요!”

“정말!?”

기생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저 잡담이나 들어보자고 불렀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정치적인 계산으로 머리가 복잡했던 일패 기생들도 다른 의미에서 흥미가 동했다.

불길을 뚫고 여자애를 구해 주는 헌터라니. 그야말로 허구에나 등장할 법한 남자가 아니고 뭔가.

“네, 저도 너무 당황해서 눈을 질끈 감았는데, 딱 떠보니까 시백 오빠가 땅바닥에 엄청 안전하게 착지하지 뭐예요. 그때 뭐라고 해야 할까.”

윤시아는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목소리마저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안정된다고 해야 할까, 부끄럽다고 해야 할까. 예전에는 그냥 업계 선배님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든든하게 보여서…….”

“반했네! 완전히 반한 거구나!”

“……헤헤.”

윤시아가 수줍게 웃었다.

이 천진난만하고도 노랫말 같은 풋사랑에 기생들은 일제히 오랜 옛날부터 여자들에게만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합창곡, 이른바 <꺄악꺄악 합창곡>을 제창했다.

“시백 오빠가 의정부를 떠야 한다고 그래서 무조건 따라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처음에는 오빠도 막 거절하더라구요. 자기는 아직 여자애를 책임져도 될 만큼 사정이 여유롭지 않다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저야 오빠 곁에 있고 싶어서 아무 말도 않고 하루 종일 따라다녔죠. 오빠도 별수 없었는지 한숨을 쉬더니 ‘그럼 너 자리가 잡힐 때까지만 돌봐주겠다’고 말했어요. 앞으로 딱 1년만 시간을 줄 테니까 생각해 보라던데…….”

“뭐야, 그럼 이 주임은 우리 막내 때문에 여기 취직한 거야?”

기생들이 입을 떡 벌렸다.

“시아야, 너 설마 교육비까지? 매달 교육비 장부에 적히는 거 있잖아.”

“네에, 오빠가 전부 내주고 있어요.”

“대박…….”

기생들은 윤시아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가 이해했다. 이시백은 요컨대 윤시아의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이대로 윤시아가 견습 딱지를 벗고 창관에 진출해도, 가게에 빚으로 저당 잡힌 돈이 없으므로 혹사에 가까운 노동에 시달릴 필요가 없었다.

돈을 벌어서 딱 수입의 2할을 창관에, 수입의 2할을 기녀 협회에 갖다 바치면 전부 자기 재산이었다. 충분히 혼자서 살아갈 발판이 마련되었다.

“와아. 나중 가서도 자기 뒷바라지 할 마음이 남아 있으면 따라오라는 거잖아.”

“세상에 그런 신사가 다 있어! 시아야, 너 진짜 봉 잡았다!”

“절대로 그 남자 놓치지 마. 여기 남아서 돈 벌어봤자 남자 고르는 습관만 이상하게 들어서 안 좋아! 화류계는 조금이라도 물 먹으면 끝이야, 끝!”

기생들 마음속에서 이시백의 주가가 급격하게 올랐다.

일패 기생들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뭐야, 앞으로 1년만 머물다가 떠나겠다는 얘기야?’

‘그럼 잠깐만 가게를 돌봐주다가 손 턴다는 건데…….’

새롭게 지배인으로 키우려고 데려온 인재인가 싶었다.

그런데 윤시아의 얘기를 들어보니 또 아닌 것 같았다.

대체 어느 쪽인지 기생들은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조금 어려운데.’

‘지배인한테 말해 봐야겠어.’

일패 기생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김태헌 사장의 의도. 이시백이라는 남자의 역할. 거기에 따라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므로.

결국 일패 기생들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었던 어느 누구도, 설마 사춘기 소녀가 자신들에게 감쪽같이 풋사랑에 빠진 여자애를 연기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백 선배.’

윤시아가 화기애애하게 떠들면서 마음속으로 히죽거렸다.

‘이제는 전부 선배한테 달렸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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