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달의 제국-20화 (20/142)

건달의 제국 20화

제3장 우리 가게 에이스(10)

7

딜러가 마지막 카드를 뒤집었다.

“……!”

모든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한 장의 카드를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헛숨을 들이켰다.

이시백이 카드의 모양을 확인하고 슬쩍 상대편에 앉은 순우경을 쳐다보았다.

마침 순우경도 이시백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엄머, 이거 어쩌나.”

순우경이 히죽 웃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부처님도 몰랐을 거야.”

탁상에 올라온 판돈은 자그마치 칠천만 원.

여기에 순우경의 용병단장은 도박장 하나를 걸었고, 이시백의 용병단장은 강북 유통 라인을 걸었다.

어림잡아 십억이 넘나드는 승부였다.

그리고 딜러가 최후로 드러낸 카드패의 숫자는 2.

“내가 아저씨한테 져버렸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카드였다.

우오오, 하고 헌터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시백이 K 트리플로 승리. 반면에 순우경은 투 페어로 패배. 반전도, 역전도 없이 이시백이 판을 쓸어 담았다.

“백두산이 털었다! 백두산이 털었어!”

“야아, 강남 스파게티 새끼들 낯짝 좀 보소!”

어디까지나 구경꾼에 불과한 헌터들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잠시 연주를 쉬고 있던 재즈 오케스트라가 귀신처럼 눈치 빠르게 합주에 들어갔다.

드럼이 나무스틱으로 챠앙 하고 금속제 심벌을 후려쳤다.

지나치게 기세에 앞선 시작이었지만 나머지 연주자들이 능숙하게 따라갔다. 곧이어 트럼펫이 우아하게 공기를 북돋웠다.

축제의 분위기였다.

“졌네, 졌어. 화끈하게 발려 버렸쓰―”

순우경이 음악에 리듬을 맞추어서 어깨를 흔들었다.

자기 용병단에 십억 원어치 피해를 입혔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시백이 탁자에 산더미처럼 쌓인 칩들을 쓸어 담았다.

이시백은 왠지 모르게 작게 웃음이 나왔다.

“대범한 건지 소인배스러운 건지 모르겠군.”

“아저씨, 요즘 애들은 소인배스러운 게 멋이거든요? 그거 스케일 크게 크게 가져가려는 것도 고질병이야. 우리 같은 하루살이는 지 분수를 알고 살아야지. 안 그래요, 단장님?”

순우경이 칵테일을 마시며 뒤를 돌아보았다.

“…….”

순우경의 용병단장이 무뚝뚝하게 서 있었다.

대머리인 이 노년의 신사는 코앞에서 벌어진 승부의 결과가 몹시 불쾌했다. 회색빛이 감도는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 60세에 접어들었지만, 하얀색의 단정한 양복조차 용병단장이 품은 혈기를 미처 다 가리지 못했다.

꼭 딱풀이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흰색 양복이 몸에 착 달라붙었다.

노신사가 입가를 불만족스럽게 비틀 때마다, 지금 당장 터질 준비를 끝냈다는 듯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렇군.”

용병단장의 입 끝이 휘어졌다.

일단 한번 미소가 지어지자 노신사의 인상은 놀랍도록 부드러워졌다.

그는 눈웃음을 짓고 순우경과 마주 보았다. 순우경 역시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며 껄껄 웃었다.

“저번에는 내가 이겼고 이번에는 아저씨가 이겼으니까 무승부네. 야아, 아저씨랑 나는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닌가 봐.”

내기에서 패배한 당사자들이 좋게 좋게 나와 주니 주변에서도 더 마음 놓고 웃음을 터뜨렸다.

흥겨운 재즈 음악, 끝없이 웨이터들이 날라주는 칵테일과 위스키, 축제의 분위기를 적당히 달구어준 도박.

헌터들은 오늘 밤을 신나게 달릴 참이었다.

“하지만 아저씨도 조심해.”

“뭐를 조심하라는 거냐.”

“사람이 언제까지 승리만 할 수 있겠어. 한 번 이기면 한 번 발리는 게 도리거든. 아저씨도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다음에는 내가 아저씨를 확 벗겨 먹어버릴 테니까. 자고로 인생에 그런 맛이 있어야지―”

순우경이 칵테일 잔에 다시 입술을 댔다.

그는 고개를 들어서 유리잔 바닥에 남은 술까지 탈탈 털어 마셨다.

순우경의 용병단장이 가슴팍에서 권총을 꺼내 든 것은 그때였다.

용병단장은 권총을 순우경의 뒤통수에 가만히 올렸다. 너무나 몸동작이 자연스러웠다.

용병단장은 여전히 신사답게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이시백마저 눈을 크게 치켜뜰 뿐이었다.

타앙!

새빨간 핏물이 탁자에 와락 쏟아졌다.

순우경의 상반신이 한동안 비틀거렸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

순우경은 마지막으로 잠깐 정지하여서 정면을 바라보더니, 곧바로 힘을 잃고 탁자에 머리를 처박았다.

정확히 이마에 뚫린 구멍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순우경의 머리를 중심으로 붉은색 연못이 탁상에 퍼져 나갔다.

정적.

오케스트라 연주가 끊겼다. 흥청망청 술을 퍼마시던 헌터들도 일제히 멈추었다.

이시백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노신사를 쳐다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이곳에서 오직 노신사만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훌륭한 사냥개는 언제나 환영받게 마련이네. 하지만 한 끼 사료비로 십억이 들면 그게 어디 사냥개인가. 사냥개는 주인을 지켜야지, 주인이 사냥개를 지키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네.”

침묵의 한복판.

노신사가 권총을 집어넣고 짧게 박수를 한 번 쳤다. 손뼉 소리가 유독 강하게 울려 퍼졌다.

“파티를 방해하게 되어서 미안하네. 이래서 사람이 늙으면 주책이야. 나는 먼저 집에 갈 테니 여러분끼리 편하게 즐기게나. 아, 이시백 호위대장. 오늘 승부는 인상적이었어.”

노신사가 이시백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순우경에게 방아쇠를 당긴 바로 그 손이었다.

“자네처럼 듬직한 남자가 곁에 머무르는 이상, 원서 단장도 마음이 편히 놓이겠네. 우리 집 사냥개는 중국산이어서 그런지 영 미덥지가 못하더군. 사람이 역시 국산을 애용해야 하는 모양이야.”

“…….”

서울 강남계 용병단의 거두 동태상(董太相).

한때 군인으로 활약하다가 퇴역하여 자리를 잡았다.

군부에 만들어놓은 연줄과 본연의 짐승적인 후각을 이용하여, 서울 전역으로 세력권을 뻗는 데 성공.

카지노와 창관은 물론이고 인신매매까지 휘어잡은 이른바 큰손이었다.

반년 전, 새롭게 서울시장으로 뽑힌 정치인이 비공식적으로 동태상한테 방문했다.

이시백도 자신의 용병단장에게 들어서 안 정보였다.

왜 서울시장이 동태상과 만났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인사를 간 것 아니겠냐’라는 가설이 유력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시백이 무표정하게 상대의 손을 꾹 잡았다.

이 손바닥에 서울시장의 손바닥이 스쳐 갔다고 상상하니, 이시백은 저도 모르게 입가가 비틀렸다. 화상으로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에 비웃음이 더해졌다.

“저는 그저 주인을 잘 만났을 뿐입니다. 제 주인은 사냥개가 중국산이든 똥개든 가리지 않더군요. 덕분에 뒤통수가 근질근질할 일이 없어 좋습니다.”

“아아. 원서 단장의 경영 철학은 항상 감탄스럽지.”

동태상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젊은 사람이 신뢰와 원칙이 있네. 요즘 세상은 원칙이 있으면 신뢰가 없고, 신뢰가 있으면 원칙이 없기 십상인데 대단한 일이야. 원서 단장. 용산동 카지노는 내일모레쯤 심부름꾼을 보내겠네. 괜찮겠나?”

“그쪽이 편하실 대로 처리하시죠, 동 단장님.”

이시백의 용병단장이 짐짓 예의 바르게 대꾸했다. 수년 동안 단장을 보좌해 온 이시백은 그녀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서릿발이 내려앉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시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밤에 또 술 상대를 해드려야겠군.’

동태상이 나감으로써 회합은 자연스럽게 파장했다.

이시백은 자신의 용병단장과 함께 리무진에 올라탔다.

그때까지 숙녀처럼 단아했던 용병단장의 기색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단장은 차에 타자마자 주먹으로 앞좌석을 후려쳤다.

“제기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을까. 운전사가 말없이 리무진을 몰았다. 한밤의 도로를 자동차가 매끄럽게 달렸다.

“저번 달에 순우경이 몰래 정보를 전했어. 동태상 그 노친네, 쓸모가 사라진 기생들을 아주 대놓고 해부해서 통나무로 팔아버린다고. 자기가 물증을 전부 잡아놨으니까 어떻게 경찰이든 검찰이든 같이 공조해 볼 수 없겠냐고.”

“…….”

이시백은 용병단장과 나란히 뒷좌석에 앉아 조용히 앞만 바라보았다. 리무진은 외부와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었다.

바깥의 소음이 전혀 침범하지 못하여, 이시백은 꼭 어느 외딴곳에 용병단장과 둘이서 떨어져 버린 기분이었다.

“내가 서울시는 동태상이랑 같이 고스톱을 치고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지. 부산 쪽 짜바리들을 끌고 와서 어떻게 쇼부를 보겠다고……. 젠장, 일주일만 더 있었으면 됐는데.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거야…….”

순우경은 호위대장인 동시에 나폴리 용병단의 창관들을 관리했다.

나폴리에서 호위대장으로 발탁하기 이전부터, 순우경은 창관 여러 개를 솜씨 좋게 운영하기로 유명했다.

동태상은 그 사업 실력에 눈독을 들인 것이었다.

하지만 순우경은 자기 주인의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으리라.

동태상이 비즈니스를 돌리는 방법이 지나치게 가혹했다는 것.

자신이 어릴 때부터 손수 키워낸 아가씨들이 단지 나이가 찼다는 이유만으로 ‘처분’당하는 것.

거기에 화교 출신인 자신을 알게 모르게 무시하는 조직의 분위기…….

“일부러 용산동 카지노를 던졌군요.”

“그래, 나폴리에는 순우경 따라서 들어간 화교들이 제법 되니까. 걔들까지 싹 다 숙청해 버리려고 건수를 만든 거야. 늑대 같은 노친네…….”

용병단장이 이를 까득 물었다.

나폴리에서는 곧이어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었다.

동태상은 화교 우두머리인 순우경이 배신을 때렸다고 주장하겠지.

오늘 도박판에서도 의도적으로 용산동 카지노를 넘겨주기 위해 이시백한테 패배해 주었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만들 것이 분명했다.

“짭새들한테는 뭐라 말씀하실 생각입니까.”

“뭘 어쩌겠어. 전부 나가리 됐다고 알려줘야지.”

용병단장이 이시백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시백은 평소부터 단장님이 가볍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특히나 몸에 힘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기생들이 통나무로 폐기처분된다는 걸 몰랐다. 전부 창관을 운영하던 순우경이 독단적으로 벌여 온 사업이다. 우리도 뒤늦게야 순우경의 만행을 깨닫고,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열심히 뿌리째 박멸하고 있다……. 뻔한 스토리야.”

용병단장이 중얼거렸다.

전형적으로 조직의 이인자를 숙청하는 방법이었다.

“부산 광수대 4팀장이 길길이 날뛰겠네. 지금 장난 치냐고. 짭새들이랑 말로 싸울 거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

“단장님.”

“시백아, 왜 이렇게 나쁜 새끼들은 머리까지 똑똑할까.”

이시백이 입을 다물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착한 건 그냥 못난 거라고. 이런 생각이 말도 안 된다는 건 알겠는데, 왜 현실에선 자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어. 이해하고 싶지 않아. 전부 쓸어버리고 싶어…….”

한없이 나약한 목소리.

다른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는 절대 내비치지 않을, 용병단장의 연약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대지를 진동시키고 인간을 공포로 몰아넣는 S급 몬스터 드래곤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그런 여인조차 인간의 본모습에 치를 떨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원서 아가씨. 다음에도 반드시 기회가 생길 것입니다.”

이시백이 단장을 위로했다. 자기가 말하고도 깜짝 놀랄 정도로 어조가 부드러웠다.

나도? 이런 목소리로 누군가를 다독일 수 있었는가 하고 이시백이 당황했다.

“그래, 그래야지.”

아무래도 놀란 사람은 이시백뿐인 것 같았다.

단장이 이시백의 어깨에 조금 더 파고들었다. 피곤이 쌓인 것인지, 그녀는 곧 잠이 들었다. 차 안에 그녀의 숨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렀다.

“…….”

이시백이 눈을 감았다.

어깨에 자그맣게 올려진 무게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8

오랜만에 이시백은 제대로 된 방에서 잠을 잤다.

김태헌 사장이 이시백 일행에게 준비해 준 매화방은 최고급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고급스러운 객실이었다.

큼직한 방에 호화로운 중국식 침대가 버티고 있었다.

“이제 일어났어요?”

이시백이 침대에서 걸어 나오자, 잠옷 차림의 윤시아가 뚱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옷이 헐거워서 새하얀 어깨가 다 드러났다.

“그래, 잘 잤냐.”

이시백이 습관에 따라 관절을 풀었다.

언제나 이시백은 아침을 국민체조로 시작했다.

윤시아가 입에 칫솔을 문 채 투덜거렸다.

“잘 자기는 어떻게 뭘 잘 자요. 밤 꼬박 새웠어요.”

“왜?”

“왜? 지금 왜라고 물었어요? 선배가 밤새 기생이랑 놀았잖아요.”

윤시아가 손가락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직 이불에 파묻혀서 잠이 든 기녀가 한 명.

이불이 미처 가리지 못한 사이사이로 여인의 매끈한 살결이 드러났다.

“선배, 제가 여자애인 거 가끔 잊어버리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제가 바닥에 침낭 깔고 자는 거 뻔히 알면서도 자기는 침대에서 여자랑 놀아요? 진짜 이해 불가능이에요.”

“이것도 전부 비즈니스다.”

이시백이 허리를 좌우로 비틀면서 말했다.

헛둘, 헛둘 하고 이시백이 가뿐하게 근육을 풀어주었다.

윤시아가 이시백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음식물 쓰레기를 보는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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