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달의 제국-19화 (19/142)

건달의 제국 19화

제3장 우리 가게 에이스 (9)

“분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이시백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큼직하게 창관을 운영하는 만큼 수중에 돈도 넘쳐날 텐데, 손님에게 대접한답시고 가져온 음료는 봉지 커피였다.

세상에 인스턴트커피 말고 다른 종류의 커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제법 호사스러운 창관이다. 가끔 큰손님이 방문할 거다. 그런 손님한테 인스턴트커피 쪼가리를 내놓을 수는 없지.’

이시백이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 남자는 손님을 직접 대접하는 데 익숙하지 않아. 부하들을 다루는 것도 별로 신통치 않아 보인다. 먹물을 먹은 느낌도 없고. 아마도 손님들을 응접하거나 실제로 가게를 돌보는 사람은 따로 있다…….’

지배인.

사장인 김태헌을 대신해서 유곽을 경영하는 지배인이 따로 있다.

이시백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면서 그리 생각했다.

견적이 슬슬 잡혔다.

‘낚싯대를 한 번 던져 볼까.’

우선 이시백은 겸손한 자세로 일관했다.

그러자 김태헌의 얼굴도 점점 진지해졌다.

장기 밀매업의 유통 라인을 하나 잃어버리게 된 김태헌으로서는 되도록 빨리 대타를 구하고 싶었다.

“농담이 아니여. 박대수 걔가 동생한테 얼마 주디? 내가 두 배는 쳐줄게.”

“이제 겨우 D급에 오른 놈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가게에서 일해도 될 정도로 경력이 쌓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사장님 아래에 유능한 부하들이 있을 텐데 저는 방해만 될 겁니다.”

김태헌이 입꼬리를 들었다. 다시금 피곤한 중년의 안색이 떠올랐다.

“유능한 녀석은 무슨. 말귀 존나게 안 들어먹는 애들밖에 없는데…….”

“혹시 지배인이 기생들을 지나치게 감싸고 돕니까? 창관에서 그러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 나도 이해는 하지. 마이낑 관리하고, 진상들 와도 적당히 달래서 돈 받고, 아가들 멘탈 케어도 하고. 그거 다 지배인이 발로 뛰어서 해결하거든. 나야 가끔 블랙 먹인 진상들 왔을 때나 어깨처럼 위력 과시하고…….”

커피가 입맛에 땅기지 않은 것일까. 김태헌이 담배꽁초를 종이컵에 던졌다. 치익 하고 담뱃불이 커피물에 꺼졌다.

김태헌은 이제 담배도 질려서 도저히 피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여기저기에 기름칠 놓는 건 형님이 다 하시지 않겠습니까? 저희가 용오름에서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 도시 경비대가 아주 허리를 납작 굽혔습니다. 지배인이 아무리 대견스럽다 해도 그림을 크게는 못 보지요.”

“그래. 항상 그놈의 그림이 문제야. 가끔은 다 때려치우고 싶다니까.”

김태헌이 혀를 쯧쯧거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아주 쓸데없이 머리만 굵어서는 얘기가 안 통해. 지들이 아가씨 관리하고 손님 접대하는 거 존나게 힘들다는데, 아, 그거 알겠다 이거야. 그런데 이 새끼들이 아무것도 몰라요. 지들이 아가씨 관리하려면 나 같은 놈이 뒤에서 좆털 빠지게 돌아다녀야 한다고.”

김태헌은 술이 고파졌다.

요새 몸이 예전과 같지 않아 알코올도 조심해서 마시는 판국이었다.

예전에는 소주를 마셔도 온몸으로 뜨끈하게 퍼지는 기분이었는데 요즘은 소주가 위장에 들이차서 꽁꽁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 살다가 뒈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애들이 항상 시야가 좁아요, 시야가. 사업 하나 제대로 굴리려면 뒤에서 다른 사업 열 개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야 하는 걸 아무도 몰라. 어이구, 내가 뭔 말을 더 하겠냐. 그래, 너희들 일이나 알아서 잘해라 씨불이고 말지…….”

김태헌이 부하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시키려던 때였다.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내가 언제부터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 거야?’

김태헌이 눈썹을 찡그렸다. 원래 어떤 주제로 대화하고 있었는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김태헌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다가, 이내 자기가 몹시 피곤하다는 것을 느꼈다.

기녀 한 명의 멱을 따버리는 것쯤이야 바퀴벌레 짓밟기보다 쉬웠다.

그래도 사람 목숨을 죽이는 일. 얼굴에 핏물을 뒤집어쓰면 그날 하루는 알게 모르게 피곤해지게 마련이었다.

“형님, 라블린시아 한 대 피시겠습니까.”

“어? 라블린시아?”

이시백이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여느 상점에서 파는 담배와 똑같이 생겼으나, 안쪽에는 마약이 시가처럼 돌돌 말아져 있었다.

김태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루약이 아니라 엽궐련 형태를 띤 걸 보아하니 제대로 작업장에서 만든 상품이었다.

“동생, 혹시 뽕장사도 해?”

“이쪽이 본업입니다. 의정부에서 마약 유통하다가 지금 잠깐 장사를 접었습니다. 박대수 형이랑은 예전부터 알고 지냈는데, 장사 접었다니까 그럼 알바나 한 번 뛰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더군요.”

“아아.”

그제야 김태헌은 상황이 접수되었다.

며칠 전, 의정부에서 마약을 박멸했다느니 뭐니 크게 떠들어댄 적이 있었다.

김태헌의 사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서 그저 그런가 보다 넘어갔다.

“의정부에서 라블린시아 단속 떴다며. 그래서 동생도 장사 접었구만.”

“예, 공무원 놈들이 아주 작정을 했는지 골목까지 싹 다 밀렸습니다.”

“흐음.”

이시백이 손수 연초의 끄트머리를 보기 좋게 잘라서 김태헌에게 바쳤다.

김태헌이 엽궐련을 입에 물자, 이시백이 고급스러운 은제(銀製)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후으으.”

김태헌이 연기를 가볍게 입안에서 굴렸다. 깊은 향기가 서서히 퍼져 나갔다.

약하게 마셔도 좋고 강하게 마셔도 좋은 것이 라블린시아의 특징으로, 딱 평범한 담배에 질려 있던 김태헌에게는 이 연한 향긋함이 달달하니 좋았다.

그곳에는 간단한 접대의 기술이 있었다.

만일 이시백이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면 대화가 금방 어색해졌을 것이다.

-창관에 지배인이 따로 있습니까?

명백한 악수(惡手).

이 청년은 왜 뜬금없이 창관의 내부 사정을 캐물으려 하나 하고 의아심을 품게 하였으리라.

그렇기에 이시백은 상대방의 심리를 이용했다.

김태헌은 명백하게 부하들한테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바로 이 지점이 농락당했다.

-이미 사장님 아래에 유능한 부하들이 있을 텐데 저는 방해만 될 겁니다.

-혹시 지배인이 기생들을 지나치게 감싸고 돕니까? 창관에서 그러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하들에 대한 불만을 자연스럽게 지배인에 대한 불만으로.

이시백은 따로 질문하지 않고도 ‘창관에 지배인이 따로 있다’라는 정보를 확인했다.

상대방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려 하자, 기다렸다는 듯 마약을 꺼내 들었다. 순식간에 화제가 바뀌었다.

그 결과, 김태헌은 기껏해야 이런 감상을 품게 되었다.

‘젊은 친구가 자세가 되어 있네.’

소위 말해서 김태헌은 이시백에게 감쪽같이 ‘공사’당한 것이었다.

자신이 스무 살짜리 애송이한테 공사당하고 있는 줄 꿈에도 모르고, 김태헌이 찬찬히 이시백의 행색을 살폈다.

‘그냥 통나무 운반책으로 써먹기엔 싹수가 굵어.’

김태헌은 눈앞의 청년이 업무에 임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마약까지 팔아보았다니 이쪽 업계에 쉽게 적응하지 않겠는가.

김태헌이 슬그머니 물었다.

“시백 동생, 출신은 어디고?”

“서울에 있는 고아원입니다. 열다섯 살에 나와서 지금까지 의정부에 있었습니다.”

“우리 아가들 중에도 고아원 출신이 아주 많지.”

고아라는 점도 만족스러웠다.

고아들은 기본적으로 어디 기댈 곳이 없었다. 아무도 자기들을 선심으로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요컨대 ‘끈’이 전무했다.

바로 이 끈을 건네주면 애완견처럼 충성하는 것이 고아 출신의 헌터였다.

“의정부에서 뽕장사할 때는 어디 용병단 아래서 했고?”

“아닙니다. 어차피 크게 사업할 처지도 못 되어서 동료들 몇 명끼리 일했습니다. 여기 이 아이도 제가 동생처럼 아끼면서 함께 일한 여자애입니다.”

이시백이 슬쩍 윤시아에게 눈짓했다.

윤시아가 방긋 웃으면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어리고 싹싹한 여자아이를 보자 김태헌도 반사적으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둘 다 어린데 아주 훌륭하구만.”

김태헌이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들겼다.

고아일 뿐만 아니라 옆에 여자애까지 딸렸다.

정말 여동생처럼 아끼는지, 아니면 성욕 처리 도구로 데리고 다니는지, 그런 건 김태헌이 알 바 아니었다.

어쨌든 ‘식구’를 품고 산다는 것이 중요했다.

‘식구가 있는 새끼는 배신을 쉽게 못 때려.’

출신도 딱히 나쁘지 않았다.

다른 용병단에 얽힌 몸도 아니었다.

마치 언제든 준비된 용병처럼 완벽한 조건이었다.

“그래. 오늘 개성에 도착했을 텐데 오자마자 여까지 와줘서 고맙네. 거, 오늘은 우리 가게에서 진득하게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도 괜찮으려나. 나도 오늘은 살짝 피곤해서 좀 쉬어야 쓰겠어.”

“감사합니다, 형님.”

이시백과 윤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김태헌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한테 손짓했다.

일찍이 두 사람에게 방문을 열어준 조직원이었다. 부하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다가왔다.

“여기 아우들한테 매화방 하나 준비해 줘라. 목욕탕 딸린 방으로.”

“예에, 따거.”

“그리고 에라이, 야만적인 새끼야.”

김태헌이 신경질적으로 부하의 정강이를 발굽으로 깠다.

“아! 따거, 왜 때리십니까요!”

“따거는 무슨 염병할 따거. 너는 네 돌아가신 아버지 앞에서도 껌 씹을 새끼야. 어디서 형님이 조용히 면담하고 있는데 건방지게 껌을 씹어대, 껌을. 당장 뱉어!”

김태헌이 부하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부하가 멀뚱멀뚱하게 보스의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꼭 멸종 위기를 맞이한 수달처럼 곤란한 표정이었다.

“여기에 말입니까?”

“그래.”

“저기. 이건 쓰레기통이 아니라 손바닥입니다요, 따거.”

김태헌이 또 한 번 부하의 정강이뼈를 찼다. 부하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 아아!”

“무식한 자식아, 내가 눈이 허벌지게 뼜으면 암만 이게 손바닥인지 아닌지 못 알아볼까 봐. 됐으니까 곱게 껌이나 뱉어!”

부하가 울상을 지으며 혓바닥에서 껌을 쪽쪽 빨았다. 뱉긴 뱉더라도, 껌이 질척하지 않도록 최대한 침을 빨아 없애려는 것이었다.

부하가 매우 조심스럽게 껌을 내뱉었다.

“투…….”

돌돌 말린 껌딱지가 다소곳하게 김태헌의 손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물기를 완전히 지우기란 불가능했는지 묽은 침이 껌에 묻어 있었다.

김태헌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리고 껌을 집어서 부하의 이마에 꾹꾹 눌렀다.

“혀, 형님?”

“너 같은 놈은 말이야. 아주 버릇부터 싹 고쳐야 해요. 어디 쪽팔린 줄 알아야지.”

껌딱지가 이마 한가운데에 들러붙었다. 코딱지마냥 초록빛이 감돌았다. 부하가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의 얼굴로 애원했다.

“아, 따거. 이러면 제가 애들한테 가오가 죄 죽어버리지 않습니까요.”

“네 가오만 가오고 내 가오는 가오가 아니냐? 이런 이기적인 새끼. 내일 아침까지 얌전하게 붙이고 다녀. 어? 콰악.”

김태헌이 얼굴을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부하가 깜짝 놀라 상반신을 뒤로 물렸다.

“아주 떨어지기만 해봐. 그게 네 모가지야, 자식아. 그거 떨어지면 네 목도 떨어지는 겨. 알았어?”

“알겠습니다, 형님…….”

“어이구야. 이런 놈을 자문사라고 두고 사는 내 신세가 처량하다. 천하의 김태헌이 이렇게 몰락할 줄 누가 알았누.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제발 엉뚱한 놈들 끌고 가지 말고 이 머저리나 얼른 가져가주소.”

김태헌이 엽궐련을 빨았다.

부하가 계속해서 멍청하니 자신을 바라보자, 김태헌이 인상을 팍 구겼다.

“아우들 매화방으로 안내하라고!”

“아, 예! 따거!”

부하가 이시백과 윤시아를 데리고 방문을 나섰다. 일행이 퇴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김태헌이 손가락을 까닥 움직였다. 그러자 다른 부하가 김태헌에게 다가왔다.

김태헌이 부하에게 광둥어로 귓속말했다.

“의정부의 이시백이라고 했지. 헌터 협회 쪽에 물어서 한 번 조사해봐.”

“의심이 가십니까?”

“여자애 하나 데리고 사는 거 보면 짭새일 확률은 낮지.”

김태헌이 후우 하고 연기를 흘렸다.

경찰에서 신분을 위장시켜 보내는데 구태여 거추장스러운 소녀를 붙일 리 없었다.

“하지만 돌다리는 두들기라고 있는 거 아니겠냐. 오늘 밤 안으로 확인해.”

“알겠습니다, 형님.”

“어우. 제발 짭새가 아니면 좋겠다. 어찌 된 게 세상에 쓸모없는 놈은 죄 헌터고, 싹수 있는 놈은 죄 짜바리 새끼여. 이래서 내가 종교를 갖지 못해요. 신이 있으면 좀 세상이 공평한 척이라도 해야 하잖아.”

김태헌이 대머리를 긁적거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이시백이 앉았던 의자에 라블린시아 담뱃갑이 놓여 있었다.

고작 한 대만 피어서는 아쉬울까 봐 통째로 하나를 두고 떠난 것이었다.

김태헌은 어린 친구의 세세한 배려심에 햐아 하고 감탄했다.

“저 친구가 짭새만 아니면 나 그날로 하느님 믿는다,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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