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달의 제국-13화 (13/142)

건달의 제국 13화

제3장 우리 가게 에이스(3)

마약 삼천만 원어치.

“으음.”

이시백이 팔짱을 끼었다. 그러다 문득 팔짱을 낀 채로 대화하는 것이 지나치게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이 열다섯 살이든 다섯 살이든, 삼천만 원짜리 거래를 제시했다면 진지하게 대해야 마땅했다.

이시백이 슬그머니 팔짱을 풀었다.

“네 말이 진짜라고 치자. 왜 굳이 나한테 삼천만 원을 투자해 가며 고용해 달라는 거냐. 나는 이제 D급이 된 초짜 헌터다. 네 뒷배가 되어주기에 썩 믿음직스럽지 못해.”

“오빠가 아니었으면 어차피 불에 타 죽었을걸요. 더 믿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국가 기관이라든지.”

“농담이죠, 오빠?”

이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국에 신고해 봤자 삼천만 원을 고스란히 몰수당하는 짓밖에 되지 않았다.

기관에서는 아마 소녀를 적당한 기숙사제 학교에 보내겠지. 그렇게 입을 싹 닦을 것이었다.

“창부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시백이 적나라하게 말했다.

여자애는 얼굴에 귀여운 구석이 있었고 무엇보다 붙임성이 좋았다. 머리도 잘 돌아갔다.

이시백조차 그녀가 정구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자기에게 주어진 배역을 수행할 만큼 약삭빠르다는 얘기였다.

“헌터들의 세계는 거칠다. 사람들 한두 명 죽여 보는 걸 기본 소양으로 여기는 곳이야. 창부는 적어도 살인 기술을 갈고닦지는 않는다. 그쪽이 훨씬 좋아.”

“아…….”

“왜, 창부가 되는 것은 싫으냐?”

여자애가 우물쭈물거렸다.

“아뇨, 딱히 몸 파는 걸 경멸할 정도로 제 사정이 좋지 않은 건 알고 있는데요…….”

“그럼 뭐가 싫어서? 괜찮은 유곽에 소개해 줄 수도 있어. 아이들을 주워다가 1년, 2년 쓰고 버리는 싸구려 가게만 있는 게 아니다.”

“남자들한테 인생이 저당 잡히기 전에 조금 다른 것도 해보고 싶어요.”

여자아이가 곤란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고아로 태어났으니까 창부가 정답, 이라는 건 어쩐지 짜증 나잖아요.”

“헌터들 시다바리 드는 것이나 남자들 수발드는 것이나 차이가 없어.”

“적어도 헌터는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요.”

상대방의 의지는 제법 확고했다.

이시백이 가만히 머릿속에서 주판을 두들겼다.

짐꾼은 필요치 않았다. 그래도 이제부터 사업을 이뤄나가는 데 적당히 똑똑하고 예쁜 여자애가 있어주면 편했다.

다른 용병단장을 접대할 때 써먹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조직에서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줄 수 있었다.

“정구 밑에서 몇 년 일했냐?”

“4년요. 요 2년 동안은 장부도 제가 맡았어요. 유통 라인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요. 의정부에서 벗어나면 쓸모가 없긴 하지만요.”

“제법이군. 정구가 함부로 사람을 믿어주지 않았을 텐데.”

“아하…… 뭐, 쪼까 고생했죠.”

여자아이가 팔을 굽히면서 알통을 만들어 보였다.

장난스럽게 얘기했지만 거기에 어떤 고생이 숨어 있을지 이시백은 충분히 짐작했다.

이시백도 고아였다. 자리가 잡히기 전까지 삼라만상의 쓰레기를 다 겪었다.

이시백은 여자아이를 고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마지막 시험이 남아 있었다.

“좋아, 임시로 고용하마.”

“임시요?”

“나는 이제부터 개성으로 올라갈 계획이다. 개성에 도착할 때까지 네 태도를 평가하겠다. 내 기준을 만족시키면 너를 정식으로 고용하지.”

“고마워요, 오빠!”

여자애가 활짝 웃었다. 기회를 준 것만 해도 어디냐는 기색이었다.

이시백이 여자애의 손에 오만 원짜리 지폐를 쥐여 주었다.

“개성까지 걸어가려면 사람들이랑 부대껴야 한다. 카라반(Caravan)을 좋은 거로 잡아타려면 첫인상이 중요해. 아무 목욕탕에나 가서 땟물 좀 빼고 와라.”

“여기서 기다리실 거예요?”

“그래, 어디 도망치지 않을 테니 느긋하게 다녀와.”

“감사합니다!”

여자애가 꼬깃꼬깃한 지폐를 쥐고 달려갔다.

몸집이 작은 게 발이 빨라서 순식간에 길거리 저편으로 사라졌다. 아마 근처에 있는 대중목욕탕으로 뛰어갔으리라.

‘어디 시험해 볼까.’

이시백은 곧바로 골목에 숨어들었다.

자신은 길거리를 내다볼 수 있지만 저쪽에선 자기가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잠시 뒤, 여자애가 깔끔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까 전과 옷까지 달라졌다. 훨씬 더 깨끗한 데다 바깥에서 나돌아 다니기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이시백이 품안에서 연초를 꺼내며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깨끗한 옷을 따로 챙겨 두었군.’

현명했다.

이시백이 여자애를 시험하듯 꼭 그처럼 여자애도 이시백을 시험했다.

‘내가 소녀를 탐하는 변태 새끼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지.’

만약 여자애가 처음부터 단정한 옷차림으로 나왔다면 어떠했을까.

실력이나 태도가 아니라 외모로, 즉 여자애를 성욕의 처리 도구로써 고용했을지 몰랐다.

이시백이야 그런 취향을 갖고 있지 않았다만――여자애 입장에서는 당연히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일부러 지저분한 상태에서 면접을 보았다.

‘최소한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친구야. 하긴 정구 밑에서 4년을 살았으면 없던 머리도 생기겠지.’

후우, 하고 이시백이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따지고 보면 이쪽이 소아성애자인지 아닌지 여자애가 시험한 것이었다.

이시백은 그러나 화가 나거나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심이 없는 애송이는 사양하고 싶었다.

헌터로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 의심은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었다.

“……?”

약속 장소에 이시백이 없자 당황한 것일까. 여자애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시백은 혹시라도 여자애가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골목에 더 깊이 들어갔다.

“…….”

여자애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녀는 옆머리를 손가락을 배배 꼬았다. 이제 막 샤워해서 꼬들꼬들한 곱슬머리가 햇빛을 받아 연하게 반짝거렸다.

그대로 삼십 분이 흐르자, 여자애는 배낭에서 돗자리를 꺼내 아예 거리 한복판에 들어앉았다.

네 시간이 흘렀다.

‘가장 큰 고비는 넘겼군.’

저녁이었다. 이시백이 배낭에서 통조림을 꺼내 후루룩 먹었다.

이따금 행인이 골목에 들어서서 이시백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시백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면 그 사람도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고서 서둘러 걸어갔다.

‘그리고 두 번째 고비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여자애도 자기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통조림이었다.

여자애는 완전히 심드렁한 얼굴 표정으로 통조림을 먹었다. 어쩌다 이런 인생이 되었는지 스스로 한탄하는 모양새였다.

이시백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성도 철저하군.’

여자애가 달랑 목욕탕만 다녀왔다면 이쯤에서 불합격 도장이 찍혔으리라.

이시백은 틀림없이 ‘이제부터 다른 도시로 간다’라고 예고했다.

카라반과 함께 육로로 움직인다는 것까지 암시했다.

그렇다면 짐꾼으로서 자기 먹을거리와 식수쯤은 챙겨서 와야 했다.

목욕비로 5만 원씩이나 건네준 것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인내심도 있고, 준비성도 있다.’

이시백이 미리 준비해 온 비닐봉지에 통조림 깡통을 집어넣었다.

이건 이시백의 성격이었다. 그는 자기가 만든 쓰레기를 길바닥에 버리는 걸 싫어했다. 다만 담배꽁초만은 이시백도 바닥에 버렸다.

‘무엇이든 정도의 문제다. 평범한 인내심과 준비성으로는 안 돼.’

하루가 지났다.

여자애는 담요를 두르고 길거리에서 노숙했다.

이시백도 마찬가지였다. 새벽 다섯 시, 여자애가 기지개를 켜며 서서히 일어섰다.

그녀는 북문(北門) 바로 옆에 지어진 공공화장실에서 얼굴을 씻고 다시 돗자리에 궁둥이를 붙였다.

이시백은 생수로 입을 헹구었다.

‘음, 더러운 것도 그럭저럭 잘 견뎌.’

헌터는 더러움에 초연할 필요가 있었다.

어떤 몬스터를 사냥할 때는 산속에서 일주일이 넘게 매복해야 했다.

인간이란 산에서 딱 하루만 뒹굴어도 상상을 초월하여 더러워졌다.

사흘이 지나면 남자고 여자고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시커먼 원시인들이 우갸우갸 떠들어 댈 뿐.

이틀이 흘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시백의 옆자리에는 검은색 비닐봉지와 담배꽁초만이 어지러이 쌓였다.

“……!”

“…….”

북문의 경비병이 다가와서 여자애한테 뭐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여자애가 연신 허리를 숙였다. 경비병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여자애가 한숨을 쉬면서 돗자리에 앉았다.

사흘째.

나흘째.

이윽고, 인내심 싸움이 시작한 지 6일이 된 시점에서.

이시백이 몸을 일으켜 느릿느릿하게 골목을 걸어 나왔다.

“……머엉.”

여자애는 이시백이 다가오는 줄 모르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존재의의를 고민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드디어 세계의 존재의의를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고민을 보다 상세하게 표현하자면 ‘왜 세계는 얼른 망해 버리지 않을까’였으며, 보다 논리적으로 재구성하자면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였다.

이시백의 발소리가 지척에 이르자 그제야 여자애가 고개를 돌렸다.

몸에 영양분이 부족한 것인지 눈가가 퀭했다.

“와아, 정말 엄청나게 빨리 오셨네요―?”

“용케도 5일 넘게 버틸 식량을 챙겼구나. 잘했다.”

“어쩐지 겁나게 불안하더라구요.”

여자애가 웃었다.

결코 상쾌한 웃음이 아니었다. 억지로 쥐어짜 내느라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저야 꼬락서니가 거지가 되었다지만 왜 오빠까지 거렁뱅이 뺨따귀 후려갈길 정도로 더러워요?”

“저쪽 골목에 숨어서 너를 지켜보았으니까.”

“의외네요. 오빠는 어디 편안한 여관에 들어가서 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시백이 허리를 굽혀서 여자애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두 사람의 눈높이가 평행을 이루었다.

“시험이란 본래 출제자도 응시생도 똑같이 견뎌야 한다. 자기는 안락하게 쉬면서 시험이니 뭐니 거만을 떨어대는 놈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오빠가 거지꼴만 아니었으면 방금 멘트로 반했을지도 몰라요.”

“주의하라는 얘기다.”

이시백이 진중하게 여자애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나에게는 짐꾼이 필요 없다. 필요한 건 고락을 함께 나눌 동료 헌터야. 너는 좋든 싫든 나의 첫 번째 일행이 되었다. 조직의 이인자가 된 거야. 이제부터 나중에 우리 조직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너를 선배로 대접할 것이다.”

“…….”

“자리에 오래 붙어 있으면 엉덩이가 썩는다. 사람이 부패해서 음식물 쓰레기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자기가 거만해 빠진 비곗덩어리가 되었음을 깨닫게 돼. 하지만 그때 가서는 이미 늦어진다.”

어차피 세상이란 그런 것.

어차피 살아간다는 건 이 정도에 불과한 것.

그렇게 안전한 변명을 마련해 두고 살아가게 된다고, 이시백이 경고했다.

“너는 똑똑한 아이니까 다른 사람을 시험하는 게 습관이 되었을 거다. 그건 좋은 덕목이야. 하지만 네가 출제하는 시험을 너 자신조차 풀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주의해라.”

“알겠어요.”

여자애가 진지하게 정면으로 이시백의 시선을 받아냈다.

“요컨대 정구 아저씨처럼 되지 말라는 얘기죠?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밑바닥에서 태어났는걸요. 오빠만큼이나 저도 그런 사람을 싫어해요.”

“아주 훌륭한 반면교사를 두었군.”

이시백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시백. D-급 헌터이고, 스무 살이다. 잘 부탁한다.”

“아, 윤시아입니다. 진짜 나이는 열여섯 살이에요. 아마도?”

여자애의 자그마한 손바닥이 이시백의 오른손을 꾸욱 쥐었다.

소녀는 누군가와 악수한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워서, 살짝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잘 부탁드려요, 시백 오빠.”

“나를 부를 때는 선배라고 불러.”

“네? 왜요? 남자들은 오빠라고 불리는 걸 더 좋아하던데.”

왜냐하면 이시백은 사실 마흔 살 가까이 나이를 먹었으며, 열여섯 살 여자아이한테 ‘오빠’라고 불릴 때마다 차마 무엇이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범죄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기 때문이었다.

이시백이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고용 조건이다.”

“무진장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선배!”

이시백과 윤시아는 대중목욕탕에 가서 6일 내내 쌓인 때를 밀었다.

밀어도 밀어도 자꾸 나오는 검은색 강물에 남탕과 여탕의 손님들은 경악했지만, 두 사람은 뻔뻔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완전히 상쾌해진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영혼마저 세탁된 모습이었다.

“목적지는 개성이다.”

“옙, 대장님.”

그들이 각자 큼직한 배낭을 들쳐 메고 걸어 나갔다. 꼭 달팽이 두 마리가 나란히 길거리를 기어가는 것 같았다.

목욕탕 주인이 썩은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주인은 소금을 한 움큼 가져와서 온갖 쌍욕을 주절거리며 가게 입구에 뿌렸다. 다시는 오지 마라! 다시는!

목욕탕 주인의 염원이 통한 것인지, 그날 두 사람은 의정부를 아예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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