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11화
제3장 우리 가게 에이스(1)
1
전생의 과거.
“어이, 아저씨. 댁은 내가 화교 출신인 거 알지.”
이시백은 이따금 적대 세력의 호위대장들과 어울렸다.
딱히 어울리고 싶어서 어울리는 게 아니었다.
서울의 용병단장들은 그 잘난 비즈니스를 원활하게 이어나가기 위해 반년에 한 번씩 총회를 열었다.
말인즉슨 어느 용병단장이 가장 옷을 멋지게 입는지 품평하는 패션쇼가 반년마다 개최된다는 걸 뜻했다.
“알고 있다.”
“그치. 알고 있겠지. 내가 그래서 궁금한 게 있어.”
용병단장들이 회의실에서 누구 입이 제일 더러운지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부하들은 열 발자국쯤 물러서서 그들끼리 조용히 도박판을 벌였다.
이시백에게 말을 건 남자는 강남에서 한 손에 뽑히는 용병단의 호위대장이었다.
“아저씨는 왜 날 짱깨 새끼라고 부르지 않아?”
“…….”
이시백이 눈썹을 찡그리며 도박판을 내려다보았다.
종목은 텍사스 홀덤.
탁상에 에이스와 킹이 골고루 깔려 있었다.
이시백이 슬쩍 자신의 패를 확인했다. 약간 후달렸다.
“왜. 앞으로 짱깨 새끼라고 불러줄까.”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래. 원래 헌터 새끼들이 출신 따지기는 또 겁나게 따지잖아. 아, 시발, 내가 그놈의 짱개 소리 안 듣고 얌전히 넘어가 본 날이 없어요. 레이즈.”
“원래 따질 게 없는 놈들이 더 따지는 법이지.”
이시백이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방금 상대방은 자그마치 이백만 원을 탁상에 올렸다.
이백만 원이라니.
아무리 호위대장 정도 되는 헌터의 돈벌이가 끝내준다 할지라도, 저렇게 몇백만 원을 아무렇게나 흘려도 될 만큼 풍족하진 못했다.
‘자기들 용병단에 돈 많다고 자랑하는 게로군.’
이시백이 이백만 원어치 칩을 휙휙 던졌다.
‘네놈이 그럴 줄 알고 단단히 총알을 챙겨왔다.’
이시백이 무표정하게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이시백은 이미 이십 년 가까이 무표정하게 살았다. 신께서는 오직 이시백을 위하여 포커페이스라는 낱말을 창조하셨다.
반년 전, 이시백은 상대방에게 패배한 이후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다.
상대방이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아저씨, 오늘 무리 좀 하시네? 그쪽 보스께서 월급을 많이 주셨나 봐.”
“걱정하지 마라. 돈 썼다고 괜히 구박할 마누라도 없으니.”
“아, 이거 조금 쪼달리는데.”
딜러 역할을 맡은 헌터가 다음 카드를 공개했다.
탁자에 올려진 카드 패는 킹.
이시백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도박의 여신께서는 오늘 밤 그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려는 모양이었다.
모텔값에 보태라고 친히 최고의 카드까지 내려주신 걸 보아하니.
“아무튼 우리가 뭐 대단한 인격자는 아니잖아. 내가 아저씨랑 알고 지낸 지가 벌써 4년은 된 것 같은데, 그동안 아저씨가 나한테 짱깨 새끼라고 부른 적이 없다는 게 너무 신기해.”
상대방이 실실 웃으면서 탁자를 툭툭 두 번 두들겼다.
이시백이 삼백만 원짜리 포커칩을 던졌다. 판돈이 또 한 번 올라갔다.
“그러는 너도 나를 상판 튀김이라고 부른 적이 없지.”
“오호, 서로가 서로한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있다?”
상대방이 삼백만 원을 맞받아치고, 거기에 다시 삼백만 원을 더해서 테이블에 올렸다.
이시백은 삼백만 원을 받고 오백만 원을 더했다. 순식간에 탁상에 올려진 돈의 액수가 두 배로 날뛰었다.
오늘 밤에 가장 큰 경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주변에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헌터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니까 아저씨랑 나는 신사네, 신사.”
“동네 양아치들이랑 같은 급수로 놀아서야 쓰겠나.”
상대방이 히죽 웃었다.
“올인.”
남자는 양손으로 칩을 전부 밀어 넣었다.
주위에서 헌터들이 나지막하게 경악했다.
“세상에, 미친…….”
“어허허. 저게 다 얼마야.”
“야아, 스파게티. 너무 배짱부리는 거 아냐?”
상대방이 싱글벙글거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배짱은 무슨. 너희가 중학생이랑 떡치던 시절부터 난 포커를 해왔어요. 난 헌터질 하기 전부터 타짜였어.”
스파게티란 한 용병단의 별명이었다.
강남에서 굴지의 세력을 자랑하는 용병단 <나폴리>.
이탈리아의 유명한 도시 이름과 똑같다 하여 스파게티라고 불렸다.
실제로는 그저 동네의 레스토랑에서 이름을 따왔을 뿐, 이탈리아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시백이 조용히 판돈을 노려보았다.
“쫄리지, 아저씨? 내가 그쪽 용병단의 주머니 사정을 좀 알거든. 강북에서 노는 애들이 역시 짜긴 짜. 우리가 한 달에 버는 돈이 그쪽 세 달 치 월급이라니까. 뭐. 후달리면 그냥 죽어도 돼.”
순우경(淳于瓊).
신의주 화교 출신으로, 북한이 붕괴하면서 남쪽에 내려온 집안 태생이었다.
헌터들은 사회의 밑바닥을 이루었지만 연고를 따지기는 오히려 더 심하게 따졌다.
북한 출신이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차별이 예약되었다.
거기에다 화교라는 꼬리표까지. 말하자면 이마에다 유성펜으로 ‘안심하시오! 지나가다 한 대 때려도 법적으로 완전히 무죄입니다!’ 하고 써놓고 돌아다니는 것과 비슷했다.
그런 남자가 거대 용병단의 호위대장까지 올라섰다.
웬만한 실력을 갖추지 않고서야 불가능했다.
그리고.
“올인.”
이시백은 이 같은 남자를 짓밟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
“또 올인이야!”
“스파게티랑 백두산 새끼들이 아주 쌍으로 미쳤구먼!”
헌터들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소란을 일으켰다.
한쪽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헌터들까지 슬그머니 일어서서 포커판으로 몰려왔다.
이미 도박을 구경하고 있던 헌터들은 신나서 현재 상황을 떠들었고, 여기에 맞장구가 더해지며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이시백과 순우경이 가만히 마주 보았다.
“아저씨, 후회가 막심하실 텐데.”
“오늘 밤에 잘생긴 아가씨 한 명 데리고 자는 거 잊지 마라.”
이시백이 빈정거렸다.
“혼자서 잤다가는 네가 질질 울어 대는 거 누가 달래주겠냐.”
“어이고, 그러는 아저씨야말로 같이 자 줄 여자는 있는지 모르겠네. 아저씨가 질질 짜면 그거야말로 호러 영화 하나 찍는 거잖아. 아마 돈 천 부르는 창녀도 아저씨랑은 무서워서 못 잘걸.”
“참고로 네가 나보다 연상이다.”
“알고 있어요, 아저씨.”
피 말리는 눈치싸움이 오갔다.
이미 올인까지 부른 마당에 두 사람이 온갖 조롱을 주고받는 까닭은 단순했다.
지금 도박판에 걸린 것은 단순히 칠천만 원의 거금이 아니었다. 서로의 자존심을 걸고 있었다.
호위대장은 어떤 의미로든 조직의 거울과 같았다.
누구한테도 기세에서 밀리면 안 되었고, 소위 ‘쪽팔리는 모습’을 보여 주면 절대로 안 되었다.
호위대장이 패배하는 것.
그건 곧 자기가 모시는 용병단장의 얼굴을 먹칠하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뭐, 하기사 봉급이 그리 적어서야 아가씨도 못 부르겠네. 미안해. 내가 아직도 한국어가 좀 어려워. 워낙에 유서가 깊은 언어잖아. 안 그래?”
“어디 중국어만큼이나 난해하실까.”
그러니까 돈 이외에도 말로 판돈을 올렸다.
상대방이 허세를 부리면 부릴수록, 패배했을 때 몰아닥치는 창피함과 수치심도 거대해졌다.
이시백과 순우경의 생각은 똑같았다.
비웃어라. 떠들어라. 허세를 부려라. 마음껏 깐죽거려라.
그리고 패배해서 망신을 당해 버려라!
“가끔 중국어를 듣다 보면 얘네가 전부 아이돌 대회에 나갔다가 예선에서 탈락해 버린 가수 지망생처럼 느껴지거든.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거 이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여중생들 말이다.”
“아하, 그거 잘됐네. 한국 사람들의 지루한 음치를 내가 좀 고쳐 줄 수 있겠어. 사실 한국인들은 제대로 된 시 한 편도 못 쓰잖아. 아저씨, 이백 알아? 이태백? 아저씨랑 이름이 비슷한데. 혹시 시집 살 돈이 없어서 잘 모르나?”
이시백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만큼 양념을 뿌렸으니 충분하리라.
“내 봉급을 걱정해 줘서 참 고맙다.”
이시백이 자신의 카드를 뒤집었다.
K 그리고 10.
“나도 요새 주머니 사정이 나빠서 말이야. 게으르게 봉급만 먹고 사느니 스스로 용돈 좀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자네가 도와주게.”
“…….”
테이블 정중앙에 공개되어 있는 카드는 K, A, 8, K.
헌터들이 이시백의 손패를 보고 탄사를 내질렀다.
“케이 트리플!”
“햐아아! 이거 끝났네, 끝났어!”
도박에서 이 이상 뭐를 바라기 죄송스러울 정도로 강력한 패였다.
헌터들은 왜 이시백이 올인에 응답했는지 이해하고 흥분했다. 저런 카드를 들고 물러서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칠천만 원이든 칠억 원이든, 이 상황에서는 못 먹어도 고를 외쳐야 마땅했다.
“과연. 상당히 괜찮아.”
순우경이 입가를 비틀었다.
“하지만 이쪽도 아주 꿀리지는 않거든.”
상대편의 카드가 뒤집어졌다.
A 그리고 8.
“에이스 투 페어네! 벌써 투 페어야!”
“아, 게임은 모르는 거여. 쪼까 후달리긴 해도 풀하우스까진 갈 수 있지!”
“딜러는 뭐 하고 있어! 얼른 마지막 패 뒤집어 봐!”
당사자들은 있는 힘껏 여유로움을 가장하고 있건만, 정작 구경꾼들이 흥분해서 이리저리 소리쳤다.
어느 쪽이 이기든 이 중 한 놈은 무려 수천만 원을 잃게 되었다.
자고로 헌터란 자기 잘되는 것보다 남 못 되는 꼬락서니에 열광하는 작자들이었다.
작은 소동에 이끌린 것일까.
“야아, 너희 재미있는 거 하고 있네.”
“호위대장들끼리 맞붙는 것도 오랜만이군.”
때마침 용병단장들이 회의실에서 나와 테이블로 걸어왔다.
헌터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인사한 후, 각자 자신의 두목에게 쪼르르 달려가 웬 미친놈들이 치킨 게임을 벌이고 있다며 신나게 떠벌렸다.
용병단장들도 눈빛이 흥미로 번들거렸다.
그중에서 적나라하게 관심을 내비친 인물은 두 사람.
“원서 단장, 이거 상황이 흥미롭게 돌아가는걸.”
“그러게요. 우리가 회의실에서 두 시간 떠들어 댄 것보다 다섯 배는 재밌네요.”
당연하게도, 순우경의 용병단장과 이시백의 용병단장이었다.
두 단장은 제각기 서울 강남과 서울 강북의 유망주였다.
이는 달리 말해 두 사람의 사이가 미국과 러시아만큼이나 화기애애하다는 걸 의미했다.
한쪽은 마약 유통과 카지노 사업으로 돈을 벌어재낀, 60세의 노신사.
다른 한쪽은 몬스터를 토벌하고 지역 상권과 유착하여 성장한, 30세의 여걸.
두 인물이 충돌하는 것은 거의 필연에 가까웠다.
“어떤가, 단장. 회의실에서 결정하지 못한 주제를 부하들한테 맡겨 보는 건.”
“상관들이 처리하지 못한 똥을 왜 부하들 보고 닦으라 그래요?”
“별로 싫은가?”
“당연히 좋지요.”
용병단장이 이시백의 어깨에 손을 올려 두었다.
“이럴 때 써먹으라고 부하들 키우는 건데요.”
“원서 단장이라면 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노신사도 테이블을 지나쳐서 순우경의 뒤에 멈추어 섰다.
헌터들이 숨을 죽였다. 안 그래도 흥미진진하던 승부가 이제는 롤러코스터까지 올라탔다.
두 명의 용병단장은 지금 부하들이 맞붙는 자리에 판돈을 끼얹으려 하고 있었다.
“용산동 도박장을 걸도록 하지.”
“도봉구 유통 라인을 전부 소개해줄게요.”
단판 승부!
헌터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곳곳에서 손에 술병을 쥐고 치켜들었다.
웨이터들이 귀신처럼 분위기를 읽어내고 바쁘게 술을 서빙했다.
두 용병단장에게는 최고급 보드카가 배달되었다.
노신사와 여인은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서로를 향해 술잔을 들었다.
“부디 결과와 상관없이 원망이 남지 않도록.”
“만약 원망이 남더라도 최소한 복수는 없기를.”
더 이상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딜러가 마지막 카드를 테이블에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