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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의 제국-10화 (10/142)

건달의 제국 10화

제2장 단지 취향의 문제(6)

“시백아, 뭐냐……. 이게 뭐냐.”

정구가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아직 의식이 흐릿했다. 겨울철 유리창에 희뿌옇게 김이 낀 것처럼, 정구는 두개골에 차가운 수증기가 묻은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 눈동자. 이시백의 눈동자가 정구는 혼란스러웠다.

“제가 연초를 끊은 지 벌써 십 년이 넘었습니다. 버릇이라고 할까요. 조금 정신병적인 발작이라고 할까요. 담배 비슷한 물건만 보면 안 좋은 추억이 떠올라서.”

“십 년……?”

“그때는 참 많이 어렸습니다.”

이시백은 한없이 나른하고 태평한 눈빛이었다.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회상하는 듯했으며, 자신의 기억에 도취되지 않았으나 또한 딱 정당히 호의적이었다.

정구는 ‘온몸이 꽁꽁 묶여 있다’라는 작금의 상황과 이시백의 눈빛이 너무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불길했다.

태연자약한 저 눈빛이 오히려 정구는 더 불길했다.

“여, 여긴 어디냐. 왜 우리가 여기 있는 거야.”

“북한산입니다, 형님. 잠깐 오래된 산장을 쓰고 있습니다. 형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이시백이 천천히 말했다.

“사냥개 놈들이 아무리 허당이긴 해도 꼴에 B급 아닙니까. 달리기로 그놈들을 따돌리다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지요. 그래서 제가 형님을 잠시 여기로 모셔왔습니다.”

“모셔와……. 시, 시백이 네가 나를 구해준 거냐? 응?”

정구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정구 본인도 진즉에 알았다.

그렇지만 차마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제발 그렇다고 대답해 달라 하고 정구가 이시백을 올려다보았다.

“…….”

이시백이 가만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정구 형님, 제가 요즘 들어서 궁금한 게 하나 생겼습니다. 형님의 고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어떤 놈들이 제 부모를 죽였다고 칩시다. 제가 이 개자식들한테 복수하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겠지요?”

“그, 그래. 당연하지.”

정구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여기서 상대방의 기분을 거스르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 일단 이시백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에 어울려 주자.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 이 개자식들이 하나같이 뭘 잘못 먹었는지. 그만 단체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버렸습니다. 아무것도 기억 못해요. 게다가 이놈들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저밖에 모릅니다.”

“…….”

“문제가 약간 복잡해졌죠. 얘네는 지들이 제 부모를 살해했다는 기억도 없고. 사실을 아는 사람은 또 저 하나뿐이고. 정구 형님, 이때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개자식들을 죽여야지 옳을까요, 아니면 거 어차피 아무 의미도 없는 거 내버려 둬야 옳을까요.”

“요…… 용서해야지 않겠냐.”

정구가 머리를 팽팽 돌렸다. 자기가 언제 이시백의 가족이나 친지를 해친 적이 있었는가.

지금 이상한 비유를 들어가며 이쪽을 시험하는 것인가. 그렇지만 아무리 떠올려 봐도 이시백과 자신은 접점이 없었다.

“죄지은 놈이 뭐를 기억하고 있어야 복수도 의미가 있지……. 응? 아무도 모르는데 젓갈을 담가버리면 그게 자기만족 이외에 뭐가 되겠냐.”

“아, 형님 말이 옳습니다.”

이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형님.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리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어떤 사람은 복수하지 말자고 생각할 거고, 또 어떤 사람은 복수해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결국 사람 취향의 문제입니다.”

이시백이 연초를 떨어뜨려 발꿈치로 짓이겼다.

정구도 잠깐, 시선이 꽁초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이시백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 든 것은 그때였다. 단검이 정구의 손등에 내리찍혔다.

“으, 허, 으하아아악!”

다 허물어진 산장에 비명이 울렸다. 칼날은 정구의 손등을 통째로 꿰뚫었고, 의자 팔걸이까지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정구가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보며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다.

“으학! 흐읍, 크아아아아!”

정구가 온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오른팔만큼은 절대 움직이지 않았는데, 마치 열심히 몸을 흔들어 대면 단검이 저절로 빠지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의자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이시백이 새로이 연초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는 무심하게 정구의 발광을 쳐다보았다.

비명이 점차 잦아들었다. 한참이 지나자, 산장에는 단지 정구가 흐느끼는 소리만이 흘렀다.

“제가 형님께 감탄하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살려줘……. 시백아, 내가 잘못했다……. 다 내가 잘못했어…….”

“아까 작업장에 형님의 따님이랑 제가 있다고 빤히 들었을 텐데. 어떻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망칩니까. 저야 뭐, 형님과 알고 지낸 지 오래되지 않았지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피붙이를 버리는 건 너무했습니다.”

“걔, 걔는 내 친딸이 아니야.”

이시백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친딸이 아니면…… 아아, 고아를 데리고 위장 입양한 겁니까. 신분 만들려고?”

“그래. 고, 고아로 길거리에서 굶어 죽어 가는 걸 내가 주웠어. 내가 주워줬다고. 시백아, 아니, 시백 씨. 내 비즈니스가 떳떳하지 않은 거, 나도 잘 알아. 왜 모르겠어. 하지만 나도 최선을 다해 산 거야.”

정구가 울음기 섞인 얼굴로 애걸했다.

“알잖아, 우리 인생 좆같은 거. 시백 씨도 알잖아. 그래도 나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겨우 여기까지 왔어. 고아도, 고아도……. 고아도…… 응? 그러니까 나 혼자 살려고 했으면 왜 고아들만 모았겠어. 시백 씨한테도 뭔가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내가 우리 아우들한테 섭섭하게 대한 거 하나 없잖아…….”

이시백이 정구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정구는 상대방이 말을 들어준다는 생각에 더욱더 처절하게 하소연했다.

자꾸 목구멍에서 울음이 튀어나와 말문이 막혔지만, 도리어 그게 비참함을 부각해서 좋았다.

“형님은 잘못한 게 없다. 그런 얘기요?”

“잘못했지. 많이 잘못했지. 하지만 전부 내 탓은 아니야. 난 그냥 노력했을 뿐이야. 이게 내 한계인 걸 어쩌겠어. 아니, 시백 씨. 좀 봐봐. 내가 같이 간 아우만 여덟 명이야. 딸로 입양한 애까지 치면 아홉이야. 세상에 누가 고아를 아홉 명이나 데리고 같이 살려고 해……. 나 정말 아우들을 가족처럼 생각한 사람이야.”

“그런데 가족은 왜 버리고 도망치셨소?”

“그, 그건…….”

이시백도 그렇게 생각했다. 정구가 자신을 아우처럼 여겨 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러했고 오늘도 그러했듯, 정구는 부하들을 내팽개쳤다.

이시백은 그 점이 불가사의했다. 정말로 가족처럼 생각한다는 자가 어찌하여 가족을 버렸는가.

‘정구 형님! 제발 도와주세요, 형님!’

‘형님! 아악, 흐아아아악!’

자신의 온몸을 덮친 불길은 지나치게 뜨거웠다.

가끔씩 아직도 그날의 악몽이 떠올랐다.

작업장이 불타올랐고, 미처 도망치지 못한 이시백과 여자아이가 서로를 껴안고 울부짖었다.

작업대가 무너져 내리면서 사방이 깜깜하게 막혔다…….

어떻게 구출되었는지, 이시백은 알 수 없었다.

여자애는 질식으로 죽었다. 자신만 살았다.

그러나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전신에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평생을 그림자에 파묻혀 살아야만 했다.

“그건…… 너,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정구는 얼굴이 눈물로 뒤범벅되었다.

“무서워요?”

“검찰청 사냥개 새끼들이 떴다니까 막 오금이 저리고! 잡히면 어떻게 될까 무서워서, 아, 진짜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어. 너무 두려워서 시백 씨 구해야 한다는 것까지 깜빡 잊어버린 거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너무 무서웠어…….”

이시백이 주머니에서 연초를 꺼내 들었다.

이시백은 연초의 끄트머리가 불에 치지직 갉아 먹히는 모습을 한동안 조용히 지켜보았다.

후우, 하고 이시백이 연기를 내뿜어내고 연초를 정구에게 갖다 댔다.

“히익!”

정구는 자기 몸에다 담뱃불을 지지려는 줄 알고 지레 겁을 먹었다.

하지만 이시백은 그저 연초를 꺼뜨린 다음, 정구의 귓등에 슬쩍 올려놓았다.

이시백이 등을 돌려 산장 구석으로 걸어갔다.

“시, 시백 씨?”

이시백이 양손에 묵직한 무언가를 들고 왔다. 플라스틱 기름통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이시백이 기름통 뚜껑을 열었다.

그는 정구의 주변을 빙 돌면서 누리끼리한 액체를 줄줄 흘렸다. 휘발유 냄새가 콧구멍을 찔렀다.

정구는 안색이 창백해져서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기름통 하나가 금세 동났다. 이시백은 나머지 기름통을 정구에게 부었다.

정구의 얼굴에 휘발유가 콸콸 쏟아졌다.

음퍼, 으퍼 하고 정구가 괴롭게 신음했다. 휘발유가 온몸을 적셨다. 기름이 바닥에 동심원을 그리면서 흘러내렸다.

“검찰청 사냥개는 무섭고 나는 안 무서웠다. 그런 거지.”

“……!”

“하긴. 스무 살 애송이가 거 복수해 봤자 얼마나 무섭겠어. 불에 타서 죽든 말든, 네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면 그만 아닙니까.”

이시백이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눈동자에 감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 거세되어 있었다.

이시백은 마지막 기름 두 방울까지 탁탁 털어냈다.

“아, 아니야! 그런 얘기가 아니야! 시백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 나 돈 많아! 전국에 숨겨 뒀어! 그거 우리가 뿜빠이 하자. 오 대 오! 아니, 전부 줄게. 몽땅 다 줄게. 평생 놀고먹을 수 있어! 그러니까-”

“사람 무서운 줄 모르는 인간이 세상에 많습니다, 형님.”

이시백이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푸른색과 진홍색으로 작게 피어오르는 불씨를, 정구가 커다래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놈들이 다른 사람 인생을 괜히 힘들게 만드는 겁니다.”

이시백이 라이터로 연초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정구의 허리를 향해서 연초를 던졌다.

정구가 자신의 허리를 내려다보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악! 안 돼! 아아아아악! 안 돼!”

불꽃이 순식간에 주변으로 번졌다.

이시백은 이제 볼일이 끝났다는 양 발걸음을 돌렸다.

산장을 빠져나올 때까지 등 뒤에서 ‘안 돼! 안 돼!’ 하고 발버둥 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그러나 이시백은 여느 때처럼 느릿한 발걸음으로 산에서 내려왔다.

이날 밤, 삼각산에서 산불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산불이란 잊어버릴 때마다 찾아오는 불청객과 같았다.

게다가 산속에 사는 몬스터 중에는 흙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개체가 꽤나 많았다.

녀석들이 알아서 산불을 꺼뜨릴 터. 아니나 다를까, 불길은 크게 확산되지 않고 그저 수백 그루의 소나무를 불태우는 데 그쳤다.

아주 오래된 산장 한 채가 흔적도 없이 불타버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시백 님, 마약상에게 협력하던 헌터들이 저게 전부 맞습니까?”

이시백은 다음 날 검찰청의 인물들에게 협조를 요청받았다.

유리창 너머에 정구의 패밀리가 줄줄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의정부에서 도망치려 했으나 운이 나빴다. 전원이 용의자로 검거되고 말았다.

“…….”

그중에는 정구의 가짜 딸도 섞여 있었다.

이시백이 3층을 빠져나오면서 탈출시킨 것이었다.

“저 아이는 마약상 밑에서 일하던 애가 아닙니다.”

“예? 하지만 용의자들은 범인의 딸이라고…….”

“가짜입니다. 마약상이 자기를 애 둔 가장처럼 보이게 하려고 써먹은 겁니다. 아마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틀 후, 여자애는 피해자 신분으로 풀려났다.

마약상에 협력하던 경찰들은 모두 붙잡혔고, 한동안 신문에선 의정부 시청 및 검찰청의 완벽하고 신속한 소탕 작전을 극찬했다.

단 한 가지.

마약상이 어디론가 도망치는 바람에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만이 옥에 티로 거론되었다.

의정부에서는 수색에 전력을 다했지만 결국 마약상은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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