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의 제국 9화
제2장 단지 취향의 문제(5)
팀장이 홀로 절규의 도가니탕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이시백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렇지만 저기 계신 창구 담당자분을 보고 마음이 굳었습니다. 신문사보다 여러분께 이번 일을 맡기는 것이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그, 그렇습니까?”
팀장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을 아주 훌륭하게 교육하셨습니다. 언제나 헌터들한테 밝게 웃고. 항상 친절하게 대응하고. 그 태도에 감명을 받아 여러분을 믿어보자 결심했습니다.”
팀장과 이시백이 시선을 돌렸다.
조금 떨어진 저편에서 여자 공무원이 덮밥을 퍼먹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자기한테 시선이 집중되자 무슨 일이지,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어색하게 헤헤 웃었다.
‘나영 씨, 나이스 잡!’
팀장은 지금 당장에라도 부하한테 달려가서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처음에는 웬 재앙 덩어리를 가져 왔는지 울분이 터졌으나, 지금 팀장의 눈에 부하 직원은 ‘세상이 참 빌어먹긴 했어도 아직 멸망할 때는 아니라네’ 하고 인간들한테 친절히 알려주는 천사와 같았다.
이시백이 슬그머니 뒷말을 붙였다.
“부디 상부에서도 여러분의 헌신을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
팀장이 입을 벌렸다. 그거다.
방금 이시백은 팀장에게 스토리를 제공해 주었다.
상부의 분풀이에서 자신을 방어해 낼 스토리.
팀장은 이시백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다음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갔다.
휴대전화기가 상급자를 연결시켜 주었다.
-오, 허 팀장. 점심은 잘 먹었나.
“예, 과장님. 긴히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라블린시아 관련 사건입니다.”
-라블린시아? 곰팡내 풍기게 케케묵은 얘기는 왜 꺼내나?
중년의 남성이 짐짓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인간이 과장쯤 되는 직급에 오르면 점심으로 뭘 먹었고 저녁에는 뭘 먹었는가 하는 얘기를 제외하고 뭐든지 듣기 싫어지는 법이었다.
팀장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것이…….”
사정을 전부 전해 들은 과장이 입을 떡 벌렸다.
언젠가 처리해야만 했던 문제를 이제 처리할 수 있겠구나, 하는 기쁨 따위는 없었다.
왜 하필 그 문제의 도화선을 자기 부서에서 터뜨려야 하는지 분노가 들끓었다.
-허 팀장! 일처리를 뭐 이렇게 해. 안 그래도 요새 국장님 바쁘신 거 몰라? 어차피 동네 수준의 마약상이잖아. 쑤셔 봤자 좋을 일 하나 없어. 그냥 대충 덮어버려.
“제보자가 신문사에 뿌린다고 그럽니다.”
-뭐…….
팀장이 매우 곤란하다는 듯한 어조로 보고했다.
“원래 신문사에 투고하려고 했는데 ‘저희 팀’ 부서의 직원이 성실한 모습을 보여 줘서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답니다. 제보자 나이가 어리긴 한데 눈치가 보통이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 난감한 기색을 조금이라도 내비치면 당장 신문사로 달려갈걸요.”
팀장은 유독 ‘저희 팀’이라는 부분을 강조했다.
신문으로 폭탄이 터질 뻔한 것을 막아내고 헌터 관리국을 구원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팀이다.
자기들은 폭탄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체했다. 그런 의미였다.
-끄으응.
팀장은 마술과 같은 시나리오로 순식간에 자신의 자리를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교묘하게도 이번 사건을 자기 팀의 업적으로 둔갑시켰다.
이제 팀장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만약 여기서 과장이 사건을 덮으라고 지시하면? 온전히 과장의 책임이었다.
나중에 신문에서 뭐라고 떠들어 댄들 팀장은 도리어 ‘그러게 제가 사건을 덮지 말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이 자식, 제법이로군. 애송이가 많이 컸어!’
‘제가 다 과장님한테서 처세술을 배운 것 아니겠습니까.’
휴대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두 명의 공무원이 말없이 눈치 싸움을 벌였다.
과장은 잠시 머릿속으로 저울을 쟀다.
한쪽에는 괜히 귀찮아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다른 한쪽에는 이러다 자칫 잘못하면 모가지가 잘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정말이지 귀찮은 건 질색이었다. 하지만 모가지는 소중했다…….
과장이 판단을 내렸다.
-허 팀장, 마약은 우리 사회의 무척 커다란 문제이고 해악일세.
“물론입니다, 과장님.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결코 마약에 가까이 다가가선 안 되지요.”
-우리는 의정부 시민들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이야. 마약이 시민들을 좀먹는다면 우리에겐 그 못된 것을 근절시킬 의무가 있네. 안 그런가?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했다. 특히 그 물건이 자신들의 철밥통을 위협한다면 말이다.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과장님의 판단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네. 다만 시민을 위한다는 의무를 따를 뿐이지!
“저 허윤수, 평소부터 과장님의 그런 태도를 깊이 존경해 왔습니다.”
사나이들의 우정이 그곳에 있었다.
이 순간, 엉덩이가 무겁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직업의 남자들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팀장은 곧바로 과장과 함께 헌터 관리국의 우두머리가 머무르는 곳, 국장실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공무원들은 더없이 진지하고 엄숙하게 회의를 거쳤다.
그러는 동안, 이시백은 청사 건물 안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죄송해요, 이시백 님. 회의가 약간 길어지는 모양이에요.”
“괜찮습니다. 어느 정도 더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아마 삼십 분만 더 있으면 어찌 되었든 결론이 나올 거예요.”
여자 공무원이 진땀을 흘리며 이시백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시백이 커피잔을 기울이면서 소파에 편안하게 몸을 파묻었다.
그가 생각했다.
‘세 시간은 걸리겠군.’
정확히 두 시간 삼십 분 후에야 이시백은 헌터 관리국의 전언을 들을 수 있었다.
제보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한동안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이시백으로서도 바라 마지않은 일이었다.
6
보름 뒤, 마약상 정구는 평소처럼 작업장 건물에 들렀다.
이번 달만 해도 수천만 원을 챙겨 먹었다.
부하 헌터들에게 나눠 주는 돈과 경찰들에게 기름기 칠하는 돈도 상당했지만, 그러고도 이익이 남을 정도로 정구의 비즈니스는 순탄했다.
‘성실하게 몬스터 잡으면서 살아가는 놈들이 병신 쪼다지.’
정구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쉽게 쉽게 살아가는 방법이 떡하니 놓여 있는데, 뭣 하러 목숨을 걸고 무시무시한 괴물 놈들이랑 부대껴 지내나. 자고로 인생은 편하게 가는 거야. 적당히 자기 분수대로 만족하면서.’
정구가 2층으로 올라서려고 계단에 발을 올렸을 순간이었다.
부르르 하고 정구의 바지 주머니가 떨었다.
정구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화면에 ‘짜바리’라고 적혀 있었다.
정구에게 매달 상납금을 먹어치우는 경찰이었다.
정구가 활짝 웃으며 통화를 받았다.
“어이, 소장님. 이런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정 사장, 얼른 뒤엎고 도망쳐!
전화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구가 어리둥절해져 물었다.
“도망치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길게 설명할 틈 없어. 지금 이쪽도 난리야. 아무튼 얼른 작업장에서 손 털고 도망쳐! 검찰청 소속 헌터들이 지금 자네랑 우리 조지려고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
“거, 검찰이요?”
정구가 떨떠름하게 반문했다.
그때 휴대전화기 너머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소리가 요란했는지 정구가 깜짝 놀랐다.
“소장님! 소장님, 검찰이라니 그게 뭔 씨나락 까먹는 소리입니까!”
-시발, 거기 못 들어오게 막아! 절대로 들여보내지 말라고! 정 사장, 나도 지금 정신이 없거든. 자네 애들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저 자식들이 무대포로 나오는 거야! 완전히 우리를 죽여 버릴 자신이 있으니까 저렇게…… 어, 어? 막아! 무조건 막아!
다시 한 번 폭발음이 거세게 울렸다. 직후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구가 무의식적으로 귀를 기울였지만, 이미 전화기는 끊어져서 무심하게 띠― 띠― 하는 기계음만을 냈다.
“소장님!”
정구가 대머리에 땀을 흘렸다.
전화기에서 그러나 대답이 들려올 리 만무했다.
정구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그냥 검찰도 아니고 검찰청 소속 헌터가 움직였다……. 헌터 관리국? 그쪽 애들이 움직였어? 왜?’
정구는 그쪽 심기를 거스른 적이 없었다. 일부러 머리를 납작하게 숙여서 사업도 확장하지 않았다.
마약도 중독 정도가 가장 약한 라블린시아만 만들어서 팔았다.
그 엉덩이 무겁기로 유명한 공무원 놈들이 왜 자기 같은 송사리를 잡겠다며 난리 바가지를 피운다는 말인가!
‘이, 이게 아니지. 얼른 작업장을 접어야 한다!’
정구가 헐레벌떡 계단을 올라갔다.
작업장 철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마른 이파리를 매만지며 마약을 담배 모양으로 제조하고 있었다.
헌터들이 정구를 의아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정구 형님? 왜 그러십니까?”
“모두 도망쳐라! 짭새가 떴다!”
엄밀히 말해서 경찰이 아니라 검찰청의 사냥개들이 움직인 것이었지만, 정구는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정구가 작업장 구석으로 뛰어가면서 헌터들을 빠르게 지목했다.
“둘째랑 넷째는 북문으로 도망치고! 다섯째, 너는 내가 연락하기 전까지 흥선로 거지굴에 잠적해. 여섯째는 동문으로, 셋째는 남문으로! 나머지는 각자 구석에 있는 여관들에 숨고!”
정구가 기관총 쏘아대듯 명령을 내렸다. 무언가 대단한 의미가 숨어 있는 명령이 아니었다.
정구는 단지 사냥개들의 시선이 이리저리 분산되도록, 자기 부하들을 사방팔방으로 보내려는 것이었다.
‘그 틈에 나는 도망치고!’
정구가 서둘러 작업장 선반에서 박스를 꺼냈다.
정구는 자꾸 떨리는 손으로 라이터를 켰다.
치이익, 하는 소리가 나며 불길이 줄에 올라탔다. 얇은 줄은 박스의 안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짜, 짭새라뇨. 정구 형님, 지금 무슨 일이…….”
“설명할 시간 없어! 어서 도망치지 않고 뭐해, 새끼들아!”
정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헌터들이 움찔거리고 급하게 작업장을 뛰쳐나갔다.
정구는 다섯 박스의 도화선에 불을 지피고 자신 역시 작업장에서 탈출했다.
이럴 때를 위해서 미리 준비해 둔 물건들이었다.
건물 계단을 내려오자 부하 한 명이 말했다.
“정구 형님, 3층에 따님분이랑 신입이 있을 텐데요!”
“뭐.”
정구가 머리를 돌려 계단을 올려보았다.
작업장은 무척 건조했다.
상자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면 순식간에 불타오를 게 분명했다. 아마 2분도 지나지 않아 불바다로 변하겠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정구는 3층까지 올라가서 두 사람을 끌고 내려올 자신이 없었다.
“……냅 둬! 일단 우리가 먼저 도망친다. 알겠냐.”
“그, 그래도 괜찮습니까?”
“두 사람은 잡혀도 돼. 내가 미리 경찰들한테 말해 둔 게 있어. 안심하고 튀어!”
부하 헌터들이 떨떠름하게 턱을 주억거렸다.
정구가 화난 듯이 오른팔을 내젓자, 그제야 헌터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정구는 뒤를 돌아보며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미안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어차피 소녀는 자신의 친딸이 아니었다.
신분을 그럴듯하게 위장시키기 위해 그저 길거리에 떠돌아다니던 거지 여자아이를 데려왔을 뿐이다.
말귀를 빨리 알아먹고 얘가 현명한 구석이 있어서 꽤나 귀여워했지만, 정구는 자신의 안위가 훨씬 더 소중했다.
“너, 너희들 뭐야!”
그때 길거리 저편에서 소음이 들렸다.
한 명의 부하가 웬 덩치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었다.
정구는 그걸 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벌써 사냥개들이 들이닥친 것이 틀림없었다.
“형님! 도와주세요, 형님!”
길바닥에 쓰러진 헌터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정구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골목길을 내달렸다.
뒤편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무리의 기척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혹시나 이런 재앙이 덮칠까 싶어서 일부러 작업장 건물을 뒷골목에 두었다.
정말로 불상사가 일어날 줄은 몰랐다.
정구는 작업장 위치를 신중하게 골랐던 과거의 자신에 백 번, 천 번 감사의 절을 올리고 싶었다.
‘검찰청에서 개밥 그릇이나 주워 먹는 놈들이 이런 골목길 지리를 꿰뚫고 있을 리 없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정면으로.
정구는 한없이 복잡한 골목길을 마치 평원을 질주하는 말처럼 시원하게 달렸다.
그렇게 길목을 하나씩 돌 때마다 정구를 뒤쫓아 오는 기척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럼 그렇지!’
정구가 숨을 씩씩 몰아쉬며 환희했다. 제깟 놈들이 얼마나 등급이 높은지는 모르겠다.
C급? 어쩌면 B급짜리 헌터가 몰려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뒷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만 따지자면 자신이야말로 따불 A급이었다.
어느새 정구는 완벽하게 추격꾼을 따돌렸다.
“후우, 하아…… 후우욱. 흐아.”
정구가 발을 멈추고 허리를 푹 숙였다.
갑작스러운 운동에 심장이 자동차 피스톤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정구는 가슴을 벌렁거리며 하, 하, 짧게 끊어서 웃었다.
“하하…… 후으, 으하하하…… 개 같은 놈들…….”
아무리 적어도 1년은 더 해먹을 거라고 믿었다.
어떤 미친놈이 작정하고 일을 벌였는지 모르겠어도 덕분에 자신의 사업 스케줄이 완전히 엉망으로 꼬였다.
게다가 사냥개들이 지쳐서 떨어질 때까지 잠적해야만 했다. 몇 년은 쥐 죽은 듯 살아야 하리라.
“퉤엣.”
정구가 끈적끈적한 가래침을 뱉었다.
괜찮았다. 몸뚱어리가 살아 있다면 정구는 얼마든지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더군다나 정구에게는 비밀스럽게 금고를 묻어둔 곳이 시외(市外)에 몇 군데 있었다. 군자금은 충분했다.
정구가 허리를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염병. 개에 물렸다고 생각해야지.”
“진짜 개한테 물린다는 게 뭔지 모르는군.”
등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정구가 본능적으로 걸음질을 치며 뒤를 돌아보려 한 찰나, 소주병이 산산이 깨지며 정구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정구는 무릎에서 힘이 핑 사라지는 걸 느꼈다.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가 한 차례 더 울렸다. 그러자 희미하게나마 보이던 시야가 완전히 끊겼다.
정구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어스름한 그림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7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구가 신음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온몸이 끈적거렸다. 특히나 머리통에 뭐가 묻었는지, 정구는 자신의 두개골이 두 배로 불어난 느낌이었다.
그가 팔을 들어서 머리를 만지려고 했다.
“으어……. 어……?”
팔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몸이 살짝 들썩거리기만 했다.
정구는 눈앞이 서서히 뚜렷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황색 테이프로 의자에 꽁꽁 묶였음을 깨달았다.
테이프가 한두 번 감긴 것이 아니었다. 마치 벌레가 거미줄에 포장된 것처럼, 정구는 옴짝달싹 못하게 꽈악 동여매 있었다.
‘뭐야. 이게 뭐야.’
정구가 멍하게 생각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 차가우면서 묵직한 목소리가 자기에게 말을 걸어왔다.
“정신이 좀 듭니까, 정구 형님.”
정구가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낯익은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은 연초를 피고 있었는데, 그 특유의 냄새를 맡아보니 다름 아니라 작업장에서 생산해 낸 라블린시아였다.
청년은 꼭 수십 년 동안이나 라블린시아를 피워본 것처럼 얼굴 표정이 평화로웠다.
그건 조금 이상했다.
“시백이……?”
왜냐하면 정구가 알기로, 청년은 작업장에서 일하면서도 여태껏 단 한 번도 마약에 입을 대지 않았으니까.
“예, 형님. 저 이시백입니다.”
이시백이 무표정하게 연초 연기를 흘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