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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425화 (425/427)

건축의 신 425화

알라의 불꽃 (03)

잠시 후 성훈이 입을 열었다.

“그 시공, 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팀장님!”

그는 울먹이며 고마움을 표하고 있었다.

‘스미스 씨,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요. 동정이 아니라, 거래니까.’

그를 다독거리며 성훈은 차분하게 말했다.

“저도 거대 회사가 업계를 지배하는 그런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것도 돈으로요. 그럼 다양한 디자인이 사라지게 될 테니까.”

그는 성훈의 말에 울분을 토했다.

“맞습니다. 그건 상도의에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횡포죠! 우리 같은 작은 설계 사무소를 죽이려는.”

인정에 호소하는 그를 보며, 성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요. 약육강식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어요?’

어쩌면 당선에 성공한다고 해도, <스미스 앤 스미스>는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계 실력만 좋지. 사람이 너무 착해. 순진하고.’

지난 삶에서 봤던 그들의 명성에 궁금증이 들 정도였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살아남았던 거지?’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의문을 접고, 성훈이 물었다.

“일단 스케줄부터 말씀을 해보시죠. 공모전 언제고 언제부터 시공이 들어가야 하는지.”

“공모전은 삼 개월 후이고, 그 후 삼 개월 안에는 공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흠. 6개월 후라는 말이네.”

성훈이 옆에 놓인 노트북을 열었다.

그물처럼 꽉 짜여진 일정들.

모니터에는 형형색색의 그래프로 채워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느낌!

그럼에도 스미스는 입을 떡 벌리며 감탄사를 토했다.

“여, 역시 대단하군요. KT는.”

그 모습을 보며, 성훈이 피식 웃었다.

‘그렇죠? 원래는 이 일정을 수정해야 한다는 말이거든. 이미 다른 대책을 세워뒀지만.’

이미 다른 대책이 있음에도, 이런 대외비 문서를 보여주는 데는 성훈의 숨은 의도가 있었다.

‘이걸 괜히 보여주는 줄 알아? 당신도 부담을 좀 느끼라고!’

백문이 불여일견!

‘이런 상황에서 널 도와주는 거다!’ 라는 걸 일부러 보여주는 거였다.

스미스가 더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끔 말이다.

어려운 와중에 도와줘야 더 크게 고마움을 느끼는 게 사람의 마음 아니던가?

6개월 후의 그래프를 이리저리 조정하던 성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흐음……. 이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빡빡한데?”

성훈의 중얼거림에 스미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럼 당선된 뒤에 제가 주최 측에 사정해서 스케줄을 좀 늦추면 안 될까요? 시공 시기는 전적으로 KT에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그것마저도 쉽지는 않은 일이겠지만, 스미스는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마우스 쥔 손을 톡톡 두드리던 성훈이 말했다.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 몽땅 다 재조정을 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럼…….”

‘일단 보여줘야 할 건 다 보여줬지?’

속으로 미소 지으며, 성훈이 노트북을 덮었다.

“아무래도 참모들과 의논을 좀 해봐야겠어요. 그 기간에 현장이 300개가 몰려있어서. 실무진의 의견이 필요해요. 그것도 평소에 비하면 많은 건 아닌데,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성훈이 어깨를 으쓱하자, 스미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쩌면 안 될 수도 있다는…….”

“아니! 약속은 지킵니다. 무슨 수를 쓰든!”

성훈의 확신에 스미스의 허리가 더 낮아졌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성훈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성훈이 말을 끌자, 스미스가 물었다.

“말씀하시지요.”

“이건 주제넘은 참견일지 모릅니다만.”

“괜찮습니다. 어떤 말씀이라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성훈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쩝! 아까도 저희 일정 보셨겠지만, 저도 쉽지 않은 결정을 한 겁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 점 거듭 감사합니다.”

“사실. 원래의 제 입장이었다면 거부했을 겁니다.”

“그러시겠죠.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수천만 달러를 넘는 공사더군요. 우리 같은 작은 공사로는 남는 것도…….”

그의 주눅 든 말에 성훈이 피식 코웃음 쳤다.

‘그 와중에 자세히도 봤네. 이 양반.’

“공사비, 그런 건 제게 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럼 뭐가?”

“일단 시공일정 조정 건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건 거대 사무소와 일전을 치러야 한다는 거죠.”

“아!”

“저들이 볼 때는 자신들이 밟으려는 자들을 도와주는 거니까, 당연히 KT를 적이라고 여기겠죠.”

스미스를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이 일을 맡는 건, 스미스 씨 같은 재능있는 건축가가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서입니다. 그렇게 되면 건축계에서는 더는 디자인의 다양성을 찾아볼 수 없겠죠. 물론 거대 사무소의 그런 행태도 싫고.”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는데.”

“심사숙고 끝에 이 일을 승낙하는 건, 군소 사무소에 대한 KT의 응원인 거죠.”

고맙다며 인사하는 그를 보며 성훈은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분위기 탔으니 결론으로 들어가야지!’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출혈을 감수하면서 도와드렸는데, 그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지 않겠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의아해하는 그에게 성훈이 말을 이었다.

“공모전 한 번 당선된다고 지금 이 상황이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이게 당신네 <스미스 앤 스미스>만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세상이 가뭄인데 우물물 퍼다 나른다고 해결이 되겠는가?

잠시간 해갈은 될지언정,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얼굴이 침울하게 어두워졌다.

“그건……. 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리고 <브랜든>만 그러는 것도 아니더군요.”

“네. 거대 사무소들이 경쟁적으로 확장을 시도하는 상황이죠.”

고래가 싸우면 새우등이 터지는 법이다.

스미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버텨봐야지요. 어떻게든.”

스미스의 축 처진 어깨를 보며, 성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현실을 모르시네. 버티고 싶다고 당신 뜻대로 버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거대 사무소들은 스미스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때까지 자본으로 밀어붙일 테니까.

“당선된다면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테니, 나름대로 활로를 모색할 수도 있겠죠.”

그래도 헤쳐나가기가 쉽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던지, 그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은 당선을 확신했지만, 실패할 가능성도 분명히 있죠. 심사위원 중 누군가를 매수 한다든가…….”

스미스는 작게 신음성을 토했다.

‘확신할 수는 없을걸.’

KT에서 도와준다고 해도, <브랜든>이 뒤에서 조작한다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거액이 걸린 공모전에서 비리 따위야 비일비재한 일 아니던가?

성훈이 물었다.

“그런 최악의 상황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건…….”

“그럼 제가 이렇게 도와드린 의미가 없어지는 거죠. 안 그런가요?”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최선이 아니라, 무조건 당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훈은 뒷말을 아꼈다.

‘나를 위해서도 말이야!’

KT는 건축 설계에는 아직 걸음마 단계였다.

이제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대 설계 사무소와 경쟁할 수밖에 없을 터!

그 싸움에 맨몸으로 부딪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는 KT의 갑옷이 될 것이며, 초병과 참모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스미스 같은 사람은 <브랜든> 같은 거대 사무소의 작태를 누구보다 잘 알 것이기에.

“그래서 끝까지 살아남아야 합니다.”

단호한 성훈의 말에 스미스도 동의했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저희 KT는 이제 설계를 막 시작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건설하고 있는 ‘알라의 불꽃’이 KT의 첫 작품이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 차후 거대 사무소와는 경쟁이 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맺힌 게 많았던지, 스미스는 욱하며 성훈의 말을 수긍했다.

“반드시 그럴 겁니다. 성장 가능성이 있는 설계 사무소를 그들이 내버려 둘 리 없으니까요.”

“하지만 KT는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설계로 성공할 겁니다. 그때까지만 버텨주세요.”

“최선을 다하기는 하겠지만…….”

그의 확신 없는 말투에 성훈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때까지 제가! KT가! <스미스 앤 스미스>의 비빌 언덕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어떻게?’라는 그의 표정에 성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다른 공사에서도 KT가 시공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 번으로도 그렇게 곤란해 하셨는데…….”

“물론 매번은 어려울지 몰라도, 힘이 닿은 한은 도와드리겠습니다.”

실제로는 가능했다. 대책이 있었으니까.

허나 인간이란 쉽게 주어지는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는다.

‘좀 생색도 내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성훈의 속내를 모르는 스미스는 입을 딱 벌렸다.

“저, 저희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신경을…….”

KT에 시공을 맡기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시도해 본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성훈이 눈썹을 으쓱하며 말했다.

“다양성이 사라진 건축은 그 자체로 죽은 겁니다. 전 그런 상황이 싫거든요.”

스미스가 감동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뭐든지…….”

“아직 신생인 우리 KT를 도와주세요.”

“어떻게 말입니까?”

“재능을 보태주세요. 우리 설계에 대해 조언을 해주셔도 좋고, 함께 협업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 거라면, 저희 힘닿는 대로…….”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동맹입니다.”

그는 각오를 다졌다.

“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만약 공모전에 실패해서 우리 사무소가 문을 닫더라도, 저만은…….”

‘문 닫으면 안 되지. 이 양반아! 초병 역할을 못 하게 되는데!’

성훈이 코웃음 치며 그의 말을 끊었다.

“동맹이라고 했죠! 혹여 당선되지 않아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계속 독창적 설계를 할 수 있도록, KT가 뒤를 봐 드리겠습니다.”

“정말입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여차한 경우에는 그 이름 그대로 가지고, KT 미국 지부로 들어오셔도 됩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것 아니던가?

“어떻게 그럴 수가…….”

“그래도 당신들의 창의력은 존중하겠습니다. 어떤 간섭도 하지 않을 것이며.”

정작 하고 싶은 골자는 ‘KT에 들어오라’는 말이었지만, 그걸 먼저 말하기에는 너무 속 보이지 않는가?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시는데, 실패하면 안 되겠지요. 반드시…….”

스미스는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지더니, 성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제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요. 당장 가서 공모전 설계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고요.”

스미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스미스가 사라진 후, 성훈이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모니터를 켜고, 인터폰을 눌렀다.

-네. 팀장님!

“미국 지부를 제외한 세 분 교두들께 연락해서, 5분 내로 회의 준비하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미국 지부 박 교두와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할 생각이었다.

‘다른 지부도 미국 지부랑 상황은 비슷할 거야.’

그 말은 지부마다 150개의 현장이 돌아가고, 소장 대리들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럼 지부마다 450개의 현장을 더 돌릴 수 있다는 말이고! 흠.’

그 말은 한 지부가 450개의 설계 사무소를 감당할 수 있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이렇게 전 세계에 동맹을 만들어 두면……. 그리고 큰 프로젝트가 있으면 그들의 의견을 구해야지. 실력자들 골라내는 것도 일이겠네. 흐흐흐.’

생각만 해도 즐거워지지 않는가?

5분 뒤, 세 명의 교두들이 차례로 모니터에 얼굴을 비쳤고, 성훈이 의 개요와 취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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