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424화
알라의 불꽃 (02)
두 달 뒤.
쿠웨이트 공항 대합실.
“하미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하미드가 뒤돌아보았다.
“엥? 아마르, 자네가 여기는 웬일인가?”
“보스톤에 다녀오는 길이라네.”
“보스톤? 거기는 왜?”
하미드의 말에 아자르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내가 ‘알라의 불꽃’에 입주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 설계 때문에 보스톤에 좀 다녀왔지.”
“오! 자네도? 거기 입주하나?”
“응? 그럼 하미드, 자네도?”
하미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마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흠……. 자네가 거기 입주할 정도로 수완가였다니, 지금까지 몰랐는걸?.”
압둘 왕세자가 옵션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내부 설계를 할 수 있다고 홍보를 한 이후, 분양처에는 입주하고자 하는 고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었다.
그러니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분양받을 수 없었고, 그걸 알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마르가 놀려대자, 하미드는 신음을 토했다.
“끄응.”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오랜 친구 사이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옵션 몇 번을 선택했나?”
그 말에 하미드가 잽싸게 반격했다.
“옵션? 흥! 나도 뉴욕에 설계를 맡겼다네.”
“어디인가?”
“<스미스 앤 스미스>라고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아미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신생 설계사무소인가? 난 처음 들어보는데?”
“쯧쯧. 이 친구야! 신생이라니, 뉴욕 최대 규모 설계사무소인 <(주) 브랜든 설계>의 최고 브레인이었던 디자이너 둘이 나와서 차린 거야. 아직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꽤나 주목을 받고 있지.”
“그런가? 그래 봤자…….”
그 순간, 하미드가 게이트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오! 스미스 씨. 여기요!”
그 소리에 캐리어를 끌고 나오던 백인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아랍인의 앞에 섰을 때, 스미스는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이런! 하미드 님. 굳이 공항까지 나오실 필요는 없었는데…….”
하지만 하미드는 그 겸양의 말에 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를 끌어안았다.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케 하시는 거요? 뉴욕 건축계의 거장께서 말이오. 공모전으로 바쁠 텐데도, 내 집에 이리 신경을 써주시는데…….”
하미드는 옆에서 보고 있는 아마르를 의식한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응당! 마중이라도 나와야 내 마음이 편치 않겠소?”
거창한 칭찬이 쑥스러운 듯, 스미스는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거장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이제 조금 크고 있는 설계 사무소일 뿐입니다.”
반면 아자르는 미간이 패였다.
‘흥!’
자기는 설계 때문에 보스턴에 사흘이나 머물다가 왔는데, 하미드의 디자이너는 고객을 위해 직접 쿠웨이트를 방문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실력을 떠나서, 고객을 대하는 태도가 비교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르는 씁쓸하게 웃으며 하미드의 등을 두드렸다.
“그럼 고생하게. 난 이만 가 보겠네.”
아마르가 떠나고, 하미드가 은근하게 물었다.
“제 차로 가시죠. 스미스 씨. 그런데 설계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사소한 거라서 현장과 약간의 협의만 거치면 되는 겁니다. 그래도 KT 팀장님과 직접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하미드 님께서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그나저나 고맙소.”
“뭐가요?”
“공모전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면서요? 그것도 500만 불이 걸린 거라던데.”
“아! 뉴욕시에서 하는 공모전 말이군요.”
하미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바쁜 와중에 나 때문에 이리 방문하게 만들다니, 미안하기 그지없구려.”
“괜찮습니다. 공모전이 아무리 급하다고 한들, 하미드 님의 집보다 중요하겠습니까?”
마음에 쏙 드는 말이 아니던가?
“그래도 500만 불짜리 공모전인데…….”
“그래도 지금은 하미드 님의 집에만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사무소는 맡기신 일은 절대 허투루 하지 않습니다.”
하미드는 속으로 감탄을 토했다.
‘역시 <스미스 앤 스미스>에 맡긴 건 올바른 선택이었어.’
50만 불도 안 되는 설계를 위해서 500만 불짜리 공모전을 뒷전으로 미루다니!
이 얼마나 장인정신이 투철한 건축가란 말인가?
하미드가 말했다.
“암요! 저는 스미스 씨만 믿습니다. 협의 잘 보시기 바랍니다.”
***
<알라의 불꽃> 현장 사무실.
현장을 돌아본 성훈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스미스 앤 스미스>의 스미스라고 합니다.”
인사하는 그를 보며, 성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 스미스 앤 스미스?’
지난 삶의 기억이 떠올랐다.
뉴욕의 가장 유명한 설계 회사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이름이었지.
흑인과 백인으로 이뤄진 콤비였는데, 둘 다 같은 이름이라서 그렇게 상호를 지었다고 들었고, 그게 독특했기에 더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아직은 그렇게 유명하지 않을걸?
모던하지만, 단순하지 않고 세련된 건물을 디자인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성훈이 반갑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네. 기다리는 분이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 스미스 씨일 줄은 몰랐습니다.”
스미스가 놀란 듯 물었다.
“저를 아십니까?”
“아뇨. 초면입니다. 요즘 뉴욕에서 주가를 올리는 사무실이 있다는 소문만 알고 있습니다. 하하.”
성훈의 웃음에 스미스는 겸연쩍게 웃었다.
“하하. 소문이 너무 거창하네요.”
스미스에게 앉으라 손짓하며, 성훈이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스미스는 탁자 위에 도면을 내밀었다.
“아! 실은 이 현장 인테리어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도면 협의 차…….”
성훈이 탁자의 도면을 집어 들었다.
잠시 후, 도면을 내려놓은 성훈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스미스를 보며 물었다.
“스미스 씨.”
“네.”
맞은편 소파의 스미스가 시선을 들었다.
“목적은 도면 협의가 아니시죠?”
성훈의 말에 스미스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도면으로 눈길을 던지며 성훈이 피식 웃었다.
“메일로도 충분히 협의 가능한 건이고, 꼭 저를 만나서 협의할 정도로 중요하지도 않네요.”
그러면 목적은 뻔하지 않은가?
스미스가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김 팀장님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럼 설계 변경은 우리 쪽 기준에 맞춰서 변경하시는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
스미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본론을 말씀하시죠.”
“네. 실은 저희 <스미스 앤 스미스>에서 참가하는 공모전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거기의 시공을 해주십사하는 부탁을 하려고요.”
“언제입니까? 공모전이?”
“3개월 남았습니다.”
“흠. 아직 공모전 시작도 안 했는데, 시공을 부탁하시겠다?”
스미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훈이 물었다.
“우리 스케줄이 어떤지는 아시죠?”
설계를 하는 건축가치고, KT팀의 스케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성훈이 물었다.
“우리 이름이 필요한 겁니까?”
그는 판넬에 기입할 이름을 요구하는 거였다.
설계 : <스미스 앤 스미스>, 시공 :
스미스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맞습니다. 이번 공모전에서 우리는 반드시 당선되어야 합니다.”
당선되어야 하는 이유?
‘그건 물을 필요도 없지.’
거액의 돈이 걸렸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공모전 당선은 누구나가 원하는 거니까.
하지만 그걸 얘기하는 사람이 <스미스 앤 스미스>의 주인이라면 다르지!
‘왜?’
실력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
그는 한때 뉴욕의 공모전이라는 공모전은 몽땅 차지한 실력자였다.
그래서 성훈은 다른 이유가 궁금했다.
“왜 우리 이름이 필요한 겁니까? 지금!”
“시공은 조금 시간이 미루어져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의미가 없었다.
성훈이 받아들인다고 하지 않는 이상은.
눈썹을 으쓱하며, 성훈은 다음 말을 종용했다.
“저희는 이번 공모전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합니다. 그러니…….”
“그 소문 때문이군요. 우리가 시공한다고 하면, 공모전 당선 확률이 반 이상으로 올라간다고 하는 그 소문.”
그건 이미 통계적으로 밝혀져 있는 사실이었다.
“알고 계셨군요. 뉴욕에서는 거의 불문율이나 마찬가지이죠.”
하지만 정작 그걸 알면서도 KT 팀에 시공을 요청하는 설계 사무소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3년 치 스케줄이 꽉 차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고, 성훈의 허락 없이 스케줄 변경은 불가능했으니까.
성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이름을 빌려 달라고요? 그럼 공모전이 공정해지지 않을 텐데요.”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키지 않아 하시는 건 알고 있습니다. 팀장님 성품은 소문으로 익히 들었습니다.”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신다?”
하고 싶지 않은 얘기를 꺼내려는 듯, 스미스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 공모전 참가자 중에, 제가 전에 근무하던 <브랜든 설계>가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 <브랜든>이 우리를 밟으려고 작정한 모양입니다. 저희가 참가하는 공모전마다 따라붙더군요. 그리고 당선을 채갔지요. 물론……. 실력 차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당신들 실력은 내가 알지!’
다만 이렇게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인지는 몰랐지.
“이대로라면…….”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힘없는 우리는 당할 수밖에 없죠. 아마 재기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 말에 성훈의 눈도 진지해졌다.
‘그 정도 실력이 있는데, 고작 그런 일로 묻혀버린다고?’
대형 설계사의 횡포라…….
입맛이 씁쓸해져 옴을 느꼈다.
‘충분히 가능하지. 마음만 먹으면 중소기업 밟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성훈의 눈길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KT 미국 지부 박 교두님께 물어보시면 금방 아시게 될 겁니다. 제가 거짓말할 이유가 없죠.”
성훈이 꾹 다문 입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박 교두님! 접니다. 성훈이.”
-네. 말씀하십시오. 팁장님!
통화는 한참 동안 이어졌고, 한국말을 모르는 스미스는 언제 통화가 끝나는지, 눈동자만 데굴거리며 성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 그러니까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말이네요?”
-그렇습니다. 팀장님! 최근 미주지역 설계 사무소들이 몸집을 키우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중입니다. 물론 제가 알고 있는 경우만 해도 수십입니다만, 그 또한 빙산의 일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국에 지사가 있어서 미국 지부라 칭할 뿐, 사실은 북미와 남미 대륙을 아우르는 거대 지부였다.
성훈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면 얘기가 좀 심각하게 돌아가는데?’
고뿔이라 생각해서 병원에 갔더니, 암 진단을 받은 기분이랄까?
그것도 이제 설계를 좀 해보려고 마음먹었는데.
‘알라의 불꽃’은 KT팀의 자체 설계로 이뤄낸 첫 번째 작품이 아니던가?
‘빨리 조치하지 않으면, 입도 대기 전에 썩어버리겠는데?’
거대 기업이 될성부른 인재들을 싹도 트기 전에 말려 죽이거나, 혹은 그들 산하에 예속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창조적인 디자인이 나오겠어?’
그건 제품 찍어내는 공장이지, 디자인 사무소가 아니지 않은가?
‘대책이 필요해. 일단 가능한지부터 확인하고!’
성훈은 전화기를 손으로 막으며 물었다.
“스미스 씨. 우리가 시공을 맡아주면, 확실히 당선될 수 있습니까?”
스미스의 얼굴이 대번 밝아졌다.
“무조건 자신 있습니다. 무조건!”
전화기를 막았던 손을 떼었다.
“박 교두님. 그쪽 현장이 150개 정도 돌아가고 있다고 했죠?”
-네. 그렇습니다.
“흠. 소장급이 150이라는 말이네? 그럼 소장 대리들은 현장당 몇 명이 근무하고 있습니까?”
-대략 현장당 3명 정도입니다.
“훈련 상태는요?”
-지금 당장에라도 현장 지휘 가능합니다.
“흠. 시공 인력만 확충되면, 별다른 무리 없이 현장을 세 배 더 늘릴 수 있다는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박 교두는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
‘좋아. 시공 문제는 해결되었고.’
성훈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할 때 확실하게 처리해 버리자고!’
전 세계를 아우르는 네트워크를 만들어주지.
아무리 좋은 인재들을 끌어들인다 하더라도, 팀 자체로 완벽할 수는 없다.
‘어디에나 허점은 있는 법!’
그리고 내 앞의 스미스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성훈의 사람이 될지는 미지수였지만.
‘내 사람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설계팀의 허점을 보완해 줄 정도의 실력은 되지.’
그런 그들을, 창의적인 디자인을 개발할 수 있도록 대기업으로부터 보호해주고, 그들의 재능을 KT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KT 네트워크!
그 네트워크의 영역은 전 세계!
‘좋잖아. 그들은 안정적으로 자신들의 작품에 매진할 수 있고, 난 그들의 재능을 빌려 쓸 수 있으니, 윈윈이지!’
“박 교두님.”
-네. 말씀하십시오. 팀장님!
“그런 상황에 부닥쳐있는 설계 사무소들 모두 조사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언제까지 가능하겠습니까?”
-설계 사무소 데이터는 차고 넘칩니다만, 가려내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내일 정오까지는 정리해서 넘겨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게 조치해 주세요. 빠지는 사무소가 없도록 주의하고요.”
-네. 그럼!
통화를 마치자, 스미스는 긴장된 눈으로 성훈을 바라보았다.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성훈이 말했다.
“당신이 한 말은 사실이었군요.”
“네. 그렇습니다.”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스미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권은 성훈에게 있었으니, 어쩔 수 있으랴!
‘스미스가 KT 네트워크의 1호란 말이지. 어떻게 엮어야 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성훈의 눈이 진지하게 번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