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423화
알라의 불꽃 (01)
6개월 후 쿠웨이트 현장.
성훈이 큰 탁자에 세부 도면을 펼쳐놓고, 전기 설비팀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도면의 한쪽으로 지휘봉으로 짚으며, 성훈이 말했다.
“여기 배선이 왜 이렇게 우회하는 거죠?”
도면 작업자가 설명했다.
“홈 시스템 팀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흠. 그래요? 그런 그쪽에 물어보도록 하고.”
한창 회의를 진행하는 도중 무전기가 음성을 토했다.
-팀장님! 지금 압둘 왕세자께서 현장을 방문하셨습니다.
성훈이 무전기를 들고 팀원들을 보며 말했다.
“회의는 좀 있다가 마저 하기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무전기의 송신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팀장실로 안내하세요.”
-네! 팀장님.
잠시 후, 압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반갑게 웃으며 성훈을 껴안았다.
“오! 성훈. 이 뜨거운 날씨에 고생이 많구만.”
“에어컨 빵빵한테, 고생이랄 게 뭐 있나요?”
사무실 안은 근무하기에 최상의 환경이었다.
밖으로 나가면 바로 살이 익을 것 같지만…….
성훈이 허그를 풀며 인사를 건넸다.
“이 주 전에도 오셔놓고……. 오늘은 어쩐 일로?”
압둘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꼭 일이 있어야 오는 건가? 우리 사이에?”
건물의 공사가 진행되자, 걸핏하면 현장을 방문하는 압둘이었다.
하루빨리 공사를 완공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리라.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허허허. 오늘은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도 있고 말이야.”
그와 대동한 꼬마를 말하는 거겠지.
갈색의 피부에 윤기가 흐르는 검정머리칼, 살짝 반 곱슬이었다. 그리고 오뚝한 코, 똘망똘망한 눈동자, 그리고 립스틱을 바른 듯한 붉은 입술.
아랍의 최고 미소년을 말하라면, 그를 지목하면 될 것 같았다.
“잘생긴 꼬마네요.”
‘꼬마’라는 말에 녀석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꾹 다문 입술에 도전적인 눈빛!
성훈이 피식 웃었다.
‘요거 봐라?’
압둘이 구트라 쓴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맏아들 압둘라일세. 이제 10살이지.”
그리고 압둘라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압둘라.”
“네. 아버님.”
“앞으로 성훈을 삼촌이라 부르거라.”
압둘의 말에 녀석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네?”
녀석은 나와 압둘을 번갈아 보며 되물었다.
“사, 삼촌이요?”
“내게는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이니,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것이야.”
그 말에 그는 성훈을 빤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
성훈이 그들을 소파로 인도하며 말했다.
“이런. 손님이 오셨는데, 세워뒀군요. 앉으시죠.”
그리고는 냉장고를 열었다.
“차보다는 시원한 게 좋겠죠?”
성훈의 말에 압둘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저번에 한국에서 가져온 그……. 캔커피, 아직 있나?”
파란 캔에 든 레쓰비를 말하는 것이었다.
“네. 그걸로 가져가죠.”
소파에 앉으며, 캔커피 세 개를 내려놓고 압둘에게 내밀었다.
“잘 마시겠네.”
그는 캔을 들자마자 까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캬! 역시 시원하구먼.”
그리고 성훈이 압둘라에게도 캔을 내밀었다.
“아직 어린데, 괜찮으려나?”
압둘라가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괜찮습니다. 삼. 촌.”
‘귀여운 녀석!’
성훈이 웃으며 말했다.
“자. 마셔.”
압둘이 탄성 소리가 들렸다.
“오! 벌써 저렇게까지 올라간 것인가?”
압둘의 시선은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에 꽂혀 있었다.
소파에 반쯤 기댄 채 고개를 치켜든 모습.
“지지난 주에 왔을 때는 이렇게 고개를 꺾지 않아도 되었는데 말이야?”
압둘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공사의 진행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압둘은 현장 사무실에 올 때마다 매번 같은 자리에서 건물을 바라다보았으니, 그 차이를 더 명확하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압둘이 성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다음 주에 오면 이제 꼭대기도 안 보이겠어.”
성훈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겨우 30층 올라갔는데요. 아직 멀었죠.”
“정말 자네 말대로 2년이면 끝을 보겠구먼.”
압둘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훈이 말했다.
“약속했었잖아요. 2년. 나흘에 한 층씩은 올라가니, 약속에는 문제없을 겁니다.”
“흠……. 다음 주에 오면 또 2개 층이 올라가 있는 건가?”
“훗! 매주 오실 겁니까?”
“뭐. 아바마마께 보고도 해야 하니, 내 직접 들르는 것이지.”
그러면서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시원한 커피도 마실 겸해서 말이야. 허허허.”
“다다음 주면 궁에서도 공사 진척도를 바로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오! 정말인가?”
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들의 이야기가 지루했던지, 압둘라가 말했다.
“아버지, 저 현장에 들어가 봐도 돼요?”
압둘의 시선이 성훈에게 향했다.
“괜찮겠나?”
현장의 책임자는 성훈이었으니, 그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었다.
“네. 그러시죠. 압둘라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성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전기를 들었다.
“지금 사무실 근처에 있는 사람?”
무전기가 치칙 거리며 대답했다.
-선배님. 제가 가겠습니다.
“한석이냐?”
-네.
“30분 정도 시간 되냐? 현장 안내해줄 사람이 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압둘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압둘이 말했다.
“잘 보고 오너라. 이 건물은 쿠웨이트, 아니, 세계 최고의 빌딩이 될 터이니.”
조금 후, 한석이 도착했다.
“선배님. 누구 안내하면 되는 겁니……. 어! 왕세자 저하. 오랜만입니다.”
한석이 넉살 좋은 얼굴로 고개를 꾸뻑하며 인사를 건넸다.
성훈이 압둘라를 지목하며 말했다.
“압둘라다. 압둘 형의 맏아들이지.”
“오! 그럼 차기 왕세자시네요.”
성훈이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가자는 대로 안내해 줘.”
“네! 선배님. 염려 마십시오.”
그리고 압둘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왕자님. 가시죠.”
압둘라는 그의 손에 이끌려 사무실을 나갔다.
성훈이 물었다.
“귀여운 녀석이네요.”
압둘이 머쓱하게 웃었다.
연신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봐서도, 그가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쩝.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네만, 아주 똘똘한 녀석이야.”
“자존심도 꽤 강한 것 같은데요. 발끈하는 걸 보니.”
하지만 절도 있는 품성이었으며, 예의를 아는 소년이기도 했다.
압둘이 일어나 냉장고를 열며 말했다.
“제 또래에 비하면야……. 좀 세기는 하지. 성훈. 한 캔 더 할 텐가?”
제집처럼 편하게 말하는 압둘을 보며, 성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압둘이 자리에 앉자, 성훈이 물었다.
“고객 유치는 다 끝났습니까?”
“음. 아직이네. 이제 공모전 끝난 지, 육 개월밖에 더 지났나?”
“흠. 공모전은 충분히 성공적이었는데 말이죠.”
압둘의 대대적인 선전 덕에 공모전은 성공적으로 끝맺음했고, 그 덕에 성훈도 세계 유명 신문과 TV에 얼굴을 알리지 않았던가?
“아직은 시간이 부족한 게지. 걱정하지 말게. 다 잘될 터이니.”
잠시 고민하던 성훈이 입을 열었다.
“압둘,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뭘 말인가?”
“이제 두 달 후면 50층이 완성됩니다.”
“음. 그렇겠지. 그런데?”
“공모전에서 보여드린 시공계획에 따르면, 그때부터는 옵션 객실들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렇죠?”
“그렇지.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네만.”
“혹시 유치가 더딘 이유가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거든요.”
압둘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옵션이 50가지가 넘는다고.”
한국 전통 건축까지 포함한다면, 거의 백 개에 가까운,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하지만 객실 수가 2,000개가 넘죠. 감당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상당히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서도 압둘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 아니던가?
“그래서?”
“고객들에게 옵션에 얽매이지 말고, 자기들이 원하는 인테리어를 하라고 하는 건 어떨까요?”
“자신들이 원하는 인테리어?”
“네. 어차피 그 사람들은 평생 살 집이라 생각하는 거니까, 자기 취향대로 하고 싶을 거 아닙니까? 능력 되는데, 굳이 성에 안 차는 기성복을 사 입을까요? 그냥 맞춰 입으면 되는 거지? 안 그래요?”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지?”
성훈은 고객 유치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옵션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않으면?”
“고객들에게 직접 건축가를 고용해서 자기 취향대로 꾸미라고 하세요.”
성훈의 말이 수긍이 되는지,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천천히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말 되는구먼.”
“우리가 해줘도 되겠지만, 지금은 그럴 인력이 없어요.”
“그럼 50개의 옵션 외에 다른 선택지도 있다? 그래서 당신들 원하는 대로 마음껏 꾸며라! 이 말이군.”
“네. 그들의 집인데? 입주한 뒤에 옵션을 뜯고 다시 인테리어하는 것보다는……. 그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맞는 말이군. 그럼 그렇게 홍보하겠네.”
“빨리 고객 유치가 끝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음……. 좋은 아이디어 고맙군.”
압둘이 물었다.
“하지만 그러면 자네가 곤란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압둘의 말은 다른 건축가와 충돌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다만 거기에 조건을 달아주십시오.”
“뭔가?”
“내부든 외부든, 어떻게 장식을 하든 상관없지만, 코어와 연결되는 부분, 그리고 전체 미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디자인하는 것은 금지!”
“그 말은…….”
“네. 우리와 협의를 해야 한다는 거죠. 뭐가 되었든.”
각각의 자율성은 허락하되, 모든 것은 성훈의 통제하에 이뤄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압둘은 그 말에도 수긍했다.
“알겠네. 그건 자네의 권리이니, 다들 이해할 걸세. 이렇게나 양보해 주다니.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생각도 못 했을 걸세!”
압둘이 보기에는 양보의 형식이었지만, 성훈에게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게 나한테 더 좋은 거라고. 세계 유수의 건축가들과 교류할 기회가 생기는 거니까.’
이런 집을 사는 사람들이 어중이떠중이 건축가를 쓰지도 않을 것이며, 두 달이라는 촉박한 시간은 한 건축가가 두 개의 객실 디자인을 동시에 맡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옵션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유명건축가를 쓸 거라만 말이지. 한 객실당 한 명씩!’
천명 이상의 건축가와 교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걸 생각만 해도, 성훈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단지 교류만이 성훈의 목적은 아니었거든!
‘그중에 쓸만한 사람이 보이면, KT팀으로 캐스팅해야지.’
잘만 섭외하면, KT 설계팀의 디자인 수준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으리라.
고개를 끄덕이는 압둘에게 성훈이 물었다.
“2차 체인 부지는 어디로 결정하셨습니까?”
“아! 그것도 상의한다는 게……. 아무래도 미국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네만. 고객 유치하기가 좋을 테니까.”
성훈도 그리 생각했던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네요. 그래도 도심부는 배제하세요. 자체 공항도 있어야 하니까.”
“응. 나도 그리 생각했지. 그래서 라스베이거스나 LA 쪽이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네.”
그 말의 의미가 뭔지 눈치챈 성훈이 웃으며 말했다.
“사막이 있거나, 해변이 있거나, 둘 중의 하나는 있겠네요?”
“그렇지.”
“어찌 되었든 빨리 결정해 주시는 게 좋습니다. 부지가 정해져야 설계를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알겠네. 결정되면 바로 알려주지.”
30분 후, 압둘라가 돌아왔다. 얼굴이 상기된 채.
“잘 둘러보고 왔느냐?”
압둘의 물음에 녀석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아버님, 현장은 정말 재미있는 곳입니다.”
성훈이 눈짓으로 물었다.
‘쟤 왜 저래?’
한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리프트 카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갔었거든요. 바람 부는 엘리베이터는 처음이라던데요? 그게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근엄한 체하더니, 아이는 아이인 모양!
하긴 웬만한 놀이 기구도 100미터를 넘기는 어렵지.
아무리 리프트카가 안전하다고 해도, 흔들림이 없지는 않으니, 그게 더 재미있었던 게 아닐까?
“아버님, 다음에도 저 데려오시면 안 됩니까?”
아들의 애원에 압둘은 흐뭇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자꾸나. 그럼…….”
성훈을 안으며 말을 이었다.
“성훈, 다음에 또 보세. 그리고 오늘 자네가 양보해 준 것. 내 잊지 않으리.”
성훈이 웃으며 답했다.
“고객 유치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압둘 부자가 돌아가고, 한석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선배님이 양보를 하셨다고요? 그럴 리가요?”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걸, 한석은 확신하는 듯했다.
성훈이 한석에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럴 일이 있어! 나가서 일 봐. 임마!”
한석이 투덜대며 나갔고, 성훈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절로 웃음이 지어져, 히죽거리며 중얼거렸다.
“흐흐흐. 빨리 두 달이 지나면 좋겠는데…….”
사람을 찾을 수 없어서 문제지!
인재가 있다면, 그중에 내 사람 만드는 것은 성훈의 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이제 어떤 건축가들이 몰려올까? 좀 쓸만한 인재들이 모여줬으면 좋겠는데.’
인재만 모아서 뭘 할 거냐고?
‘할 거야 많지. 세상의 부자들을 상대로 건물을 지어주고, 그렇게 번 돈으로 보급형 주택이나 더 만드는 거지.’
사실 한국에서 진행 중인 ‘보급형 주택 사업’은 성훈이 생각하는 건축가의 사명 중 하나였다.
한국의 사업은 성훈이 혼자 계획하고 있는 ‘세계 주택 기구’를 만들기 위한 실험이었다.
‘난민 구호를 위해, 음식도 제공하고, 옷도 주는데, 집 지어주는 단체는 없단 말이야! 이상하잖아? 세상에 건축가는 넘쳐나는데.’
어차피 건축가로 살 거라면, 전 세계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 지어주는 것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려면 난 인재가 많이 필요하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