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418화
정부의 의뢰 (02)
분위기 고즈넉한 해변의 카페.
창문으로 바다가 보인다.
저기 먼 수평선, 하루를 밝히던 태양이 노곤해진 것인가?
쌓인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담그는 중이었다.
피어오른 구름은 붉게 물들어, 추운 겨울임에도 얼굴을 달아오르게 한다.
일몰을 응시하던 성훈이 물었다.
“어때? 여기?”
태양에서 눈을 떼는 게 아쉬운 듯, 소피아는 나른하게 고개를 돌렸다.
노을에 물든 금발이 찰랑거린다.
“아름다워요.”
짧은 감상이었지만, 그녀의 옅은 미소는 다채로운 감동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렇지. 아름답지.”
소피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오래도록 바다를 달굴 것 같던 태양은 서서히 바다로 숨고 있었다.
“아쉬워?”
소피아는 미련이 남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네. 아주 많이요.’
성훈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좀 더 보러 갈까?”
성훈의 뜬금없는 말에 소피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는 태양을 어떻게 잡으려고?’
성훈이 카페 주인에게 말했다.
“준비됐어요?”
사장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갑시다. 소피. 일어나.”
“응?”
성훈이 소피아의 손을 덥석 잡고 일으켰다.
“일몰을 좀 늘리려고.”
“어, 어디로?”
성훈이 턱짓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부두에서 파도를 타고 있는 작은 요트.
성훈이 가녀린 손목을 잡아당겼다.
“가자!”
***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일몰을 따라잡는다 했지만, 겨우 5분 정도밖에는 더 늘릴 수 없었다.
성훈과 소피아는 달리는 뱃머리에 겹쳐 서서 태양의 마지막 흔적을 감상했다.
드디어 태양은 사라지고, 붉은 구름만 남았을 때, 성훈이 말했다.
“그래도 역시 아쉽네.”
앞에 선 소피아를 보며, 성훈이 말을 이었다.
“춥지 않아? 소피?”
“괜찮아요. 안 추워요.”
말로는 그러면서도 연신 성훈의 파카를 여몄다.
왜 성훈의 파카를 여미느냐고?
소피아가 성훈의 파카 안에 있었거든!
아직도 미련이 남는 듯 성훈이 입을 열었다.
“소피. 이게 우리 첫 데이트인가?”
그 말에 소피아가 대답했다.
“아뇨. 두 번째?”
예상치 못한 그녀의 대답이었다.
‘무슨 말이지?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건가? 분명히 처음인데?’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소피아에게 감정을 가진 뒤로는 그런 적이 없었다.
‘이거 곤란한데, 첫 데이트를 기억 못 하다니!’
누군들 이런 상황이면 난감하지 않겠는가?
프러포즈하러 왔는데, 연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다니!
지금 성훈은 공모전 참가 전에 했었던 약속을 실행하는 중이었다.
‘트로피를 가져와서 프러포즈할게.’
난감해진 성훈이 머리를 갸웃했다.
그리고 전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지나가듯 물었다.
“음……. 우리가 언제 또 데이트했더라?”
“5년 전, 프랑스에서…….”
성훈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엥? 프랑스?”
“네. 국도에서 길을 잃었을 때.”
2학년 겨울 방학 때였던가?
성훈이 피식 웃었다.
“야! 그때는 연인도 아니었잖아.”
소피아가 파카 안에서 꿈틀대며 돌아섰다.
이제는 더 볼 노을도 없었으니까.
“난 처음부터 당신이 좋았으니까. 고백은 좀 늦었지만.”
그 말을 하며 소피아는 샐쭉하게 웃었다.
“너에게는 두 번째 데이트였던가? 꽤 길었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간격이?”
“좀 많이 길었죠.”
“앞으로는 많이 하자. 그동안 못 한 것까지. 그리고…….”
성훈이 머뭇거리자, 소피아가 올려다봤다.
“응?”
입술 내밀면 닿은 거리에 소피아가 있었다.
“사랑해.”
소피아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나도요.”
그리고 눈을 감았다.
“결혼하자. 그리고 우리 행복해지자. 영원히.”
성훈은 천천히 그녀에게 입술을 맞댔다.
은은하게 코를 자극하는 재스민 향!
둘은 한참 동안을 그렇게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
프러포즈 다음 날.
결재를 위해 성훈을 만난 곽 부사장이 부산을 떨었다.
“성훈 님! 뜻하지 않은 기회가 왔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성훈이 결재판을 덮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을 떠시는 겁니까?”
“건설부에서 우리 KT에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오래간만에 밝은 모습을 보이는 부사장이었다.
“그래요?”
국세청장과의 만남이 무산되고 난 후, 한동안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였는데, 건설부 장관과 어떻게 연을 맺어 비리 건을 진행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성훈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훗! 꿩 대신 닭이라는 건가?’
아무려면 어떤가?
목적만 달성하면 되는 것이지.
매일 아침 죄인처럼 머리 조아리는 것보다는 지금의 모습이 훨씬 활기차고 보기 좋았다.
“언제쯤 만나자고 하던가요?”
“언제라도 상관없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하더군요.”
팔짱을 낀 성훈이 입술을 내밀었다.
“왜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용건을 알았다면, 부사장이 먼저 말을 했을 터.
“단지 공모전 당선 축하를 위한 것은 아니겠지요.”
성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전화 한 통이면 될 일이니까.”
“지금 정부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이번에 정권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야당에서 어떻게든 대통령을…….”
성훈이 손을 내밀어 그의 말을 막았다.
“정치 얘기 듣고 싶지 않아요. 결론만 말하세요.”
성훈의 냉랭한 반응에 무안했던지, 부사장이 크게 헛기침을 해댔다.
하지만 성훈이 이랬던 것이 한두 번인가?
‘아 참! 정치 이야기라면 딱 질색을 하셨지?’
기침을 멈추고 부사장이 말을 이었다.
“아마 우리 KT와 일을 진행하면서, 정부에서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국민들에게 어필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흠. 그럴 수도 있겠군요.”
성훈이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할까?’
곽 부사장의 말대로 이건 좋은 기회였다.
사실 국세청장을 표적으로 노렸던 것도, 건설부 쪽의 인물과 줄을 대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믿을 만한 사람이면 좋은데, 알 수가 있어야지.’
미래를 일부 안다고는 하지만, 인간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것도 정치판의 인간을…….
국세청장은 여러모로 검증받은 자였기에, 성훈은 그를 지목했었다.
자칫하면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기에, 성훈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기회란 왔을 때 잡아야지.’
생각이 길어봐야, 걱정만 많아질 뿐!
성훈이 결정을 내렸다.
“그럼 오늘 4시에 만나자고 하세요. 그때 시간이 날 것 같으니.”
곽 부사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 오늘 4시 말입니까?”
“네. 아까는 언제든지 괜찮다면서요?”
“네, 네. 그랬습니다.”
“길게 생각하지 말자고요. 우리 일을 맡아서 해결할 수 있는지, 믿을 수 있는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곽 부사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성훈이 말을 이었다.
“시간을 더 있어도 이런 기회가 또 올 거란 보장도 없고.”
쇠뿔도 단김에 뽑아야 하는 거라고!
***
4시가 다 되었을 즈음.
성훈의 집무실 전화벨이 울렸다.
다급히 곽 부사장이 전화를 집어 들고 몇 마디 나누었고, 전화를 끊고는 말했다.
“팀장님!”
화들짝 놀란 듯, 곽 이사가 말을 이었다.
“건설부 장관이 오셨답니다.”
“네? 장관이 직접요?”
“팀장실로 정중히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요.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성훈이 묘한 표정으로 턱을 긁적였다.
‘훗! 건설부 장관이 직접 왔다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을 양반이네.’
잠시 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곽 부사장은 다급히 문으로 향했다.
성훈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는 문을 열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장관님. KT 팀 곽 부사장입니다.”
인사를 하고는 소파로 그를 안내했다.
장관을 본 성훈의 눈이 번쩍였다.
‘엇! 아는 사람인데?’
장관은 성훈을 보자마자, 환하게 미소 지으며 양팔을 벌렸다.
“성훈 군. 오랜만일세!”
성훈 또한 반가운 이의 등장에 표정이 밝아졌다.
다가가 안으며 말을 붙였다.
“김 박사님! 건설부 장관이 되신 겁니까? 축하드립니다.”
“자네도 요즘 완전히 주가가 하늘을 찌르더구만. 국제 공모전에서 당당히 우승이라니!”
둘의 관계를 모르는 곽 부사장만 중간에서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성훈이 웃으며 말했다.
“아! 부사장님은 모르시겠군요. 예전에 울산 도시계획 할 때, 함께 일하던 김 박사님이십니다.”
그때는 곽 부사장이 함께하지 않았으니, 몰랐던 모양이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인사를 했다.
“그러셨군요. 부사장 곽순일이라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는 둘에게 착석을 권하고는, 탕비실로 향했다.
“팀장님! 차는 뭐로 드릴까요?”
성훈이 장관과 눈을 맞추고는 말했다.
“드립 커피요! 이분은 그것밖에 안 드시니까.”
장관이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기억하고 있었네?”
“저도 장관님 때문에 커피 좋아하게 됐잖아요.”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박사님이 장관이 될지는 말이죠.”
“울산에서 평이 좋았잖아. 그 소문이 정계까지 흘러갔나 보지. 게다가 신임 대통령도 건설 부문만은 실무자를 장관 임명하겠다고 했었고. 그러던 중에 내가 보인 거지.”
“잘하셨어요. 박사님보다 적임자가 또 있겠습니까?”
성훈의 너스레에 그는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장관이 되달라 해서 수락하기는 했는데, 잘할 수 있을지 영 감이 안 잡혀!”
너스레를 떠는 그에게 성훈이 말했다.
“울산을 최고의 도시로 탈바꿈시킨 장본인이 감이 없다뇨?”
“그게 어디 내 능력인가? 자네가 잘 풀어준 덕이지.”
그의 말에 성훈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울산보다 좀 큰 도시다 생각하시면 되는 거죠. 충분히 잘해내실 겁니다.”
“지금은 그냥 얼떨떨해.”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장관이 바뀌었을 테니, 고작 몇 개월 전이었을 것이다.
‘하긴 예전을 생각해 봐도, 파격적인 인사로 유명했었지. 지금의 대통령은.’
성훈이 말을 이었다.
“잘해낼 수 있다 확신했으니, 그 자리에 앉혔겠죠. 아무 근거도 없이 그랬겠어요?”
성훈의 말에 장관이 입맛을 다셨다.
“일단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봐야지.”
“그런데 무슨 일로 KT를 찾으신 겁니까?”
잠시 망설이던 그가 말했다.
“사실은 자네를 찾아온 거지. 도움을 받고 싶어서.”
성훈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제가 도움 드릴 게 뭐 있겠습니까? 국가가 하는 일에.”
“사실 지금 현 정부의 정책 진행이 난항을 겪고 있다네.”
“저 같은 건축 나부랭이가 낀다고 해결될 간단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의 표정은 간절해 보였다.
“성과를 내는 게 중요하다네. 자네가 주도하는 사업은 실패한 적이 없잖나! 그리고 한국 최초로 그런 거대 공모전에서 우승을 했지.”
“우리 이름값을 이용해 보시겠다? 이 말씀이세요?”
그는 초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럴 심산일세. 국민에게 기대를 주는 이름이 되었지. KT팀은.”
“솔직하시네요. 박사님.”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삼척동자도 알만한 사실을 숨겨서 뭐하겠나?”
그리고 차를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대통령께서는 국책사업을 이끌어줄 인재를 찾고 계시지. 그리고 난……. 자네만 한 인재가 없다고 확신하네.”
그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성훈을 설득하고 있었다.
‘지금의 대통령이기에 가능했겠지.’
권위적이지 않은 대통령.
그는 김 박사와 함께 국책사업의 방향을 논의했을 것이며, 그 와중에 자신보다 건축 전문가인 김 박사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했을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그러기 쉽지 않은데, 대단한 사람이군.’
건축밖에 모르는 학자 타입인 김 박사를 이토록 열정적인 관료로 만들어 놓다니 말이야!
한참 동안 설득하던 김 장관이 말했다.
“어떤가? 성훈 군. 같이 일해보지 않겠나?”
“글쎄요…….”
표정만 봐서는 동조할 것만 같았던 성훈의 반응은 생각보다 뜨뜻미지근했다.
곽 부사장은 생각지 못한 전개에 놀란 듯, 성훈에 눈치로 종용하고 있었다.
‘성훈 님! 아까는 이런 기회가 또 있겠냐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왜 갑자기!’
성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보채도 소용없습니다. 생각이 바뀌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