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411화
공모전(04)
다음 날.
옵션 설계실 단상에 성훈이 섰다.
“이런저런 어려움이 많았지만, 단 한 명의 낙오도 없이, 여기까지 완주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제부터 제군들은 KT 팀의 일원이 되었다. 축하한다.”
후배들의 우렁찬 인사가 들렸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그들의 인사에 성훈이 손을 들어 화답하며 말했다.
“앞으로도 많은 활약을 보여주길 바란다.”
“네. 알겠습니다.”
성훈이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을 조작했다.
후배들이 디자인한 설계안들이 화면에 떠올랐다.
“이제 공모전 작품들이 대부분 완료되었다. 아주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잘들 해주었다.”
“이제는 KT의 다음 일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당선의 여부와 상관없이 다음 일에 제군들을 투입할 것이며, 그 성패 여부는 제군들에게 달렸다.”
단단히 군기든 모습을 보며, 성훈이 말을 이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우리 팀은 단 한 번도 국내 설계 공모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한다.”
성훈이 개인적으로 설계한 적은 있었다.
몇 년 전의 ‘스타타워’ 말이다.
하지만 성훈의 말처럼 KT 팀을 만들고는 국내의 일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후배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성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는 국내 공모에 참여하기로 했고, 그 시작은 국책사업과 관련된 일이다.”
단 위의 물 한 잔을 마시고, 성훈이 말을 이었다.
“아직 공모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음 사업이냐고 하겠지. 이유는 그 사업이 공모전 옵션 설계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연장선?”
후배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없다. 스크린에 주목!”
성훈의 음성에 순식간에 설계실이 조용해졌다.
화면에 프로젝트명과 그 설명이 나타났다.
“이 프로젝트는 포터블 하우징 시스템(Portable Housing system)으로 명명한다. 줄여서 PHS로 하겠다.”
그리고 성훈의 설명이 이어졌다.
“지금까지 우리가 설계한 옵션들을 저가형 단독주택으로 만드는 것이 이 PHS의 핵심이다.”
후배들을 지긋이 둘러보며 성훈이 말했다.
“이 도면에서 살릴 기능만 살리고,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KT, 이 설계팀들이 이 일을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정작 옵션 전문가들은 여기 다 있는 데 말이야. 써먹어야 할 거 아니야!”
전문가라는 말에 후배들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단 한 건을 했을 뿐인데요.”
“그렇습니다. 선배님! 전문가라는 말은 너무 뻥이 심합니다.”
후배들의 농담에 성훈이 물었다.
“그럼 너희보다 전문가는 어디 있어?”
옵션을 메인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처음인데, 어디서 전문가를 찾겠는가?
후배들의 대답이 궁색해졌다.
“그야…….”
성훈이 확신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유일한 전문가다. 즉! 너희들 하나하나가 이 설계의 책임자라는 말이지.”
그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지, 후배 중의 하나가 새된 소리를 냈다.
“저희, 저희가요?”
이제 갓 들어온 신입이 책임자라니,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그렇다. 실제 설계는 기존의 설계 1, 2팀 팀장들이 주관하겠지만, 너희들 각자가 설계에 참여해서 너희가 원하는 건물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고문 정도의 역할이겠으나, 설계의 방향타를 그들이 쥐고 있다는 점에서는 책임자와 다를 바 없었다.
성훈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부터 진짜 실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결과를 보여주길 바란다.”
짧은 브리핑이 끝났다.
후배 중 하나가 물었다.
“선, 아니, 팀장님! 저희가 할 수 있을까요? 제 이름으로 디자인된 건물이 실제로…….”
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실력이 모자란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건 공모전 결과가 말해줄 거야.”
후배들의 눈빛에 긴장감이 흘렀다.
곧 자신들의 작품이 국내에서, 그리고 세계 무대에서 평가받는 시간이 오는 거니까 말이다.
후배들을 보는 성훈의 눈동자도 번쩍거렸다.
‘이제부터 진짜 설계를 접하게 될 거다.’
사실 후배들의 옵션 설계는 성훈의 마음에 그리 들지 않았었다.
‘군더더기가 너무 많아.’
한 교수의 말처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돈으로 해결했다. 첨단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왜 성훈이 애초에 막지 않았느냐고?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어쩔 수 없었지.’
어차피 후배들은 실무 경험이 없으니, ‘이건 안 되는 거다’라고 해도 알아듣지 못할 터!
일일이 실랑이하다가는 삼 개월이 아니라, 삼 년이 지나도 끝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아이디어 일부분이라도 반려 당하면, 후배들의 의욕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할 터!
‘이것 때문에 일부러 우리 설계팀과 함께 작업시키지 않은 거지. 시간 낭비가 너무 심해. 우리 설계 팀에게도, 후배들에게도.’
설계란 자고로, 가장 효율적이어야 한다.
도면이 아니라, 설계 그 자체가 말이다.
그래서 성훈은 생각을 바꾸었다.
그렇게 시간 낭비를 할 바에야, 아이디어를 모두 뽑아내고 꼭 필요하지 않은 건 나중에 걸러내기로.
녀석들이 스스로 이해하게끔!
그런데 마침 기회가 왔다.
강제로 옵션들을 다이어트 시킬 기회가.
‘물론 녀석들에게 친절히 말해줄 수도 있지.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고.’
하지만 그런 거로 녀석들의 머리를 굳게 하고 싶지 않다고!
‘또 굳이 설명해 줄 필요도 없고.’
옵션들을 간략화시키다 보면 자연히 불필요한 부분이 눈에 보이니까.
‘부푼 몸집을 빼고, 필요 없는 부분을 걸러내는 데는 우리 설계팀만 한 곳도 없지.’
외국 건설사들과 경쟁하면서 느는 것은 그런 노하우들이었다.
성훈이 의욕 넘치는 후배들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곧 결과가 나오겠지.’
***
다음 날, 열 팀의 결과가 나왔다.
집중적으로 열 개를 먼저 하라는 성훈의 지시에 따른 결과였다.
아직 완전히 PHS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간략화의 예를 들기는 충분했다.
도면과 담당 후배를 앞에 두고 성훈이 말했다.
“흠……. 여기 PPS에서는 옵션에 꼭 넣어야 한다고 네가 주장했던 것들이 빠졌네?”
성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티타늄 방탄문’이 그냥 ‘여닫이문(목재)’으로 바뀌어 있었다.
‘벙커’를 설계한 후배가 말했다.
“사실 바깥쪽이 뚫려도……. 안쪽까지 방탄문이 있으면 확실한 방어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세이프 존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바깥이 뚫리지 않도록 온갖 첨단 장비를 다 부착했는데…….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
“호오! 그래?”
성훈의 감탄에 후배의 눈이 아래로 깔렸다.
성훈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 후배의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끄응!”
후배의 신음에는 이유가 있었다.
예전에 성훈이 이걸 꼭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녀석이 당당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이게 없으면 이 집의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그걸 지금 그는 자신의 입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성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수정…….”
녀석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성훈이 말을 이었다.
“해야 하겠지?”
“끄응. 하겠습니다.”
“알았으면 수정해. 내일까지.”
녀석이 뜨악하며 입을 벌렸다.
“내, 내일까지요?”
“응. 당장!”
녀석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지금 하는 것도 있는데…….”
“PHS?”
“네. 그렇습니다.”
“그럼 이건? 일단 해놓으면 세계인들이 다 주목할 건데, 이런 상태로 내놓을 거냐? 그렇게 자신 있어?”
“아, 아닙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성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 기능과 연결된 것들 다 수정하는 것 알지? 경첩과 이에 관련된 모든 전자장치까지?”
“네! 알고 있습니다.”
녀석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선배님. 시간이 너무…….”
“너희들의 이 도면만으로 끝난다면, 공모전까지 하라고 하겠지. 하지만 이 도면으로 모형을 만들고, 프리젠테이션 자료도 만들어야 한다고.”
성훈의 말이 이어졌다.
“그뿐이냐? 모형의 변화에 따라 가이드 ‘갑돌이’의 동선도 달라진다고. 지금도 그쪽 팀에서는 계속 ‘스텐바이’하고 있는데…….”
성훈이 귀를 후비며 말을 이었다.
“지금 분명히 내 욕하고 있을 거야. 아이참, 공모전 날짜를 늦춰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귀 후빈 손을 후 불며 말했다.
“이거야 원. 난감하네.”
사실 모형 팀과 3D를 주로 하는 프리젠테이션팀은 이미 작업을 마쳐가고 있었다.
거기서 변화라고 해봐야, 외관이 약간 바뀌는 것뿐이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후배들이 어떻게 알랴?
전문가인 선배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아는 것이지!
한 번 몸에 밴 나쁜 습관은 쉬이 고치기 어렵다.
‘이제부터가 진짜지!’
줄이고 줄이는 과정에서 핵심만 걸러내는 법을 찾을 것이고, 그건 곧 효율적인 작업 방식과 연결된다.
‘한두 번 써먹을 것도 아니니, 확실히 트레이닝 시켜야 하지 않겠어?’
후배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이걸 수정하려면 지원팀 도움도 받아야 하는데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성훈이 말했다.
“응. 그건 걱정 마. 보람이가 이미 대기하고 있거든. 밤새워서라도 도와줄 거다.”
‘더 할 말이 있으면 해!’라는 듯 눈썹을 으쓱하는 성훈에게, 후배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내일까지 반드시 하겠습니다.”
“약속했다. 이제 넌 사회인이야. 알지?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는 거?”
후배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자존심이 상했는지 단호하게 말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킵니다. 선배님.”
“직장이야. 여기.”
성훈의 말에 그는 즉시 호칭을 정정했다.
“티, 팀장님!”
“그래? 알았어. 믿어보지. 나가 봐!”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어기적거리며 걷는 후배의 등을 보며 성훈이 소리쳤다.
“얼른 안 뛰어?”
“네, 네! 선배님!”
성훈이 인터폰을 누르며 말했다.
“다음!”
***
공모전 하루 전.
성훈은 책상을 등지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는 것일까?
한동안 턱을 괸 채, 창밖을 응시하다 중얼거렸다.
“드디어 내일인가?”
작게는 삼 개월 땀 흘린 결실을, 그리고 크게는 평생을 염원해 왔던 일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맨 처음 돌아와서 하고 싶었던 일이 설계였거든.’
물론 이미 ‘스타타워’를 설계하면서 작은 성공을 했다고는 볼 수 있겠으나, 그건 성훈의 성에 차지 않았다.
‘내일의 결과에 따라 앞으로의 행보가 달라질 거야. 속도를 내느냐, 준비를 좀 더 하느냐로.’
하지만 결정을 하는 것은 성훈 자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압둘이 정에 휘둘릴 정도의 인간은 아니었고.
성훈이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결국은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건가?”
똑똑.
성훈이 힐끗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들어온 사람은 소피아였다.
다시 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물었다.
“응. 소피. 무슨 일이야?”
소피아가 성훈에게 다가가 말했다.
“모형이랑 갑돌이팀, 그리고 3D팀이 쿠웨이트에 잘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지금 공모전 현장에서 세팅 중이래요.”
성훈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말 안 해도 알아서 잘할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리고 내일 공모전 시작 직전에 민호에게 기자회견을 하라고 얘기해 뒀어요.”
“고마워. 신경 써 줘서.”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요. 뭘.”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그 상태로 십 분이나 지났을까?
조용히 성훈을 보던 소피아가 손목의 시계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
“이제 당신도 출발할 시간이에요.”
“응. 알아.”
그래도 고개만 끄덕일 뿐, 성훈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멍하니 밖을 응시할 뿐.
“긴장되나요?”
그 말에 성훈이 소피아를 힐끗 올려다봤다.
“긴장?”
소피아가 놀리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면 불안하던가?”
성훈의 자존심을 툭툭 건드리는 말이었고, 그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지만, 소피아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러지 않으면 당신이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아서요.’
소피아가 성훈과 함께한 지 삼 개월이 지났다.
평범한 석 달이 아닌, 지지고 볶는 삼 개월.
대목장이 말했었다.
‘어떻게든 같이 있게만 하면, 젊은것들끼리 연분이 안 생기겠습니까? 귄터 성님!’
이렇게 월하노인을 자처한 두 노인이 둘을 어떻게든 이어붙인 거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난 지금!
소피아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훗! 내가 불안해 보여?”
말없이 빙긋 웃는 소피아를 보며, 성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혀 불안하지 않다고, 온몸으로 항변하는 모습!
그런 그에게 소피아가 천천히 다가섰다.
서로의 숨결을 느낄 거리까지.
그러고는 성훈의 양복 상의 단추를 끌렀다.
“어! 소피, 갑자기 이게 무슨?”
하지만 성훈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소피아는 성훈의 넥타이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휴우.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성훈이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뜨자, 그녀는 재빨리 성훈의 넥타이를 풀더니 자신의 호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곧 반대편 호주머니에서 다른 넥타이를 꺼냈다.
훨씬 더 화려하되, 세련된 느낌이 드는 넥타이.
“이걸로 하고 가세요.”
“왜? 저것도 조, 좋기만…….”
“이 하얀 셔츠에 회색 넥타이가 가당키나 해요. 나이 오십 먹은 아저씨도 아니고, 노티 나게?”
‘노티’라는 말에 성훈의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난 삶에서는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가만히 좀 있어요.”
쭈뼛거리는 성훈의 몸을 양손으로 바로 잡은 소피아가 넥타이를 성훈의 목에 둘렀다.
“내일 바로 공모전 식장으로 가는 거죠?”
“응.”
“내일은 당신이 주인공이에요. 주인공은 주인공답게 입고 가야죠.”
그녀의 말에 웃음이 피식 나왔다.
‘주인공이라.’
나머지는 들러리라는 말이 아닌가?
이보다 힘 나는 말이 또 있으랴?
웃음을 머금고 가만히 내려다보니 소피아의 가지런히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정수리에서부터 방사형으로 정리된 머리카락들.
향긋한 샴푸 냄새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안 그래요?”
갑자기 소피아가 올려다보며 묻는 통에, 당황한 성훈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해댔다.
“커흠. 그렇지.”
소피아의 능숙한 손놀림에 넥타이 매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성훈의 자켓 단추를 잠근 소피아가,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성훈을 위아래로 훑었다.
“것 봐요! 훨씬 젊고 멋있지.”
화려한 넥타이를 어색해하며 성훈이 말했다.
“소피. 내가 프로포즈를 했던가?”
소피아가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보며 성훈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
“프로포즈는 우승 트로피로 대신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