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407화
예상치 못한 변수
사흘 뒤, 후배들과 2차 설계 회의가 있던 날.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여. 성훈아.”
사무실에 들어서자, 보람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쩐 일이냐? 네가 먼저 보자고 하고?”
소파에 털썩 엉덩이를 걸치자, 보람이 물었다.
“설계 회의했다면서? 어땠냐?”
“코딱지만큼 나아졌더라. 훗! 나보다 더 잘 알 녀석이 그건 왜 묻냐?”
보람이 설계 이외의 부분을 총괄하니, 이런 농을 던지는 것이었다.
성훈이 소파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믹스?”
보람이 눈썹을 으쓱하며 답했다.
“좋지!”
종이컵을 보람에게 내밀며, 성훈이 자리에 앉았다.
믹스 겉봉으로 커피를 휘휘 저으며 성훈이 물었다.
“그냥 대충 마셔라. 귀찮으니까. 그런데 한창 도면 검토하느라 바쁠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분 거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보람이 도면을 내밀었다.
“성훈아, 네가 좀 봐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 말이야.”
도면을 받아쥔 성훈이 재빨리 눈으로 훑었다.
“엉? 벙커 주택이네.”
후배들이 디자인한 것 중 하나의 도면이었다.
그러고는 이내 말을 이었다.
“음……. 아까 내가 봤던 거랑 다른데?”
“그렇겠지. 네가 본 건 이거였을걸?”
이 말과 함께 보람은 또 한 부의 도면을 건넸다. 회의시간에 성훈이 봤던 것과 동일한 것을.
두 도면을 비교하며 성훈이 말했다.
“이거 1차 도면도 아니고…….”
처음 건넨 도면을 자세히 비교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2차 도면하고도 많이 다른데? 이게 뭐냐?”
성훈의 물음에 보람이 답했다.
“그게 원래 나랑 협의하던 2차 원도면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달라?”
“네가 본 건 이걸 대폭 수정한 거니까.”
그의 말에 성훈이 다시 한 번 도면을 비교했다.
“대폭 수정이라…….”
“응. 수정.”
도면을 꼼꼼히 살피는 성훈에게 보람이 물었다.
“성훈아, 아까 도면 어떻게 봤냐?”
비교하느라 바쁜 성훈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응. 뭐. 괜찮았어, 1차 것보다는 신경 좀 썼더라고.”
성훈의 답에 보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실히 많이 나아졌지. 도면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는 말이었다.
성훈이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도면은 나아졌다’라……. 확실히!”
도면 비교가 끝났는지, 성훈이 고개를 들었다.
“도면의 숙련도와 미적인 부분이 잘 표현된 것만 보고, 잘 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나 보네. 내가…….”
자조적으로 나오는 작은 한숨이었다.
성훈이 고개를 치켜들고 물었다.
“뭐가 다른지는 봐서 알겠는데, 이걸 보여주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성훈이 퉁명스레 말을 이었다.
“원도면엔 괜찮은 아이디어가 꽤 있는데, 왜 이거에서는 다 삭제시켰냐? 애들이 그리기 싫대?”
“그럴 리가?”
“그럼 뭐가 문제냐? 애들이 개겨? 소피가 말한 게 그거야?”
보람은 건축학과 직속 선배도 아니었고, 건축 설계에 있어서는 자신들보다 못하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요것들이 열심히 하라고 기회를 줬더니. 그래. 지금쯤이면 요령이 생길만도 하지. 한 따까리 제대로 해봐?”
당장에라도 혼쭐을 내주겠다는 듯, 성훈이 눈을 부라렸다.
보람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야. 그냥…….”
“그냥 뭐?”
보람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의사소통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의사소통?’
성훈의 눈에 불이 켜졌다.
“혹시? 이거 너한테 동의도 안 구하고 수정한 거야?”
동의를 구한 거라면, 굳이 보람이 이렇게 찾아올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잘 협력해서 좋은 설계를 만들랬더니……. 이것들을 다리 몽댕이를!’
하지만 보람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동의했다고? 네가?”
“응. 사실은 우리의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해.”
‘엥? 능력 부족?’
의외의 말에 성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각 분야에서 난다긴다하는 녀석들만 모아뒀는데 이런 말이 나온다고?’
성훈이 허리를 앞으로 바짝 당기며 물었다.
“자세히 말해봐. 뭐가 문제인지?”
보람이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쩝. 우리가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다들 다르잖아. 어떤 녀석은 벙커, 어떤 녀석은 물 위의 집. 각자 서로 다른 개성으로 설계를 진행하고 있지.”
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그렇지.”
“그리고 각자가 서로 다른 개념을 도입하고 있지. 뭐. 이동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이미 기존 건물과는 다르지만.”
그래서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추진하지 않았던가?
서로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기 위해서.
“그래서?”
“창의력과 현실 간의 충돌이었지. 덕분에 처음에는 마찰도 엄청 많았고.”
“응. 소피도 그 이야기를 하더군. 다들 힘들어한다고. 아직도 싸워?”
보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요즘은…….”
“그런데 뭐가 문제야.”
“걔들도 열심히는 하는데, 좀 진이 빠진 것 같아.”
“진이 빠졌다? 이유는?”
그는 도면을 가리키며 씁쓸하게 웃었다.
“도면 수정을 동의한 것과 똑같은 이유로. 우리가 녀석들의 요구사항을 맞춰줄 정도로 능력이 안 되거든.”
“능력이 안 돼?”
성훈의 반문에 보람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응 솔직히 말하면 그래. 현재 우리가 가진 기술력으로는 얘네들의 창의력을 뒷받침할 능력이 안 되는 거지. 어차피 못 하는 걸 아니, 도면 수정이 불가피하고, 쟤네들도 도면 수정하다가 지친 거지.”
보람이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할 말이 없는 게, 그 원인이 우리에게 있는 거라서 그래. 기술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하는데, 녀석들에게 설계로 극복하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왜 아까 능력 부족이라는 말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흠…….”
이해를 못 할 바도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어땠냐?”
“처음에는 죽일 듯이 대들더라. 왜 그게 해결이 안 되느냐고?”
“그런데?”
“처음에는 가능한 것들도 많았어. 우리도 의욕이 충만했고.”
성훈이 물었다.
“그런데?”
“얘네들도 욕심이 생긴 거지. 그래서 더 잘해보려고 하고. 그러다가 이게 한계에 부딪힌 거지.“
성훈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쩝. 그 뒤로 소피가 아무런 말이 없기에 잘 돌아가는 줄 알았더니.”
“처음에는 뭐든 될 것처럼 한껏 부풀어 있다가, 자꾸 안된다고 하니 지칠 수밖에 없지. 도면 고치는 게 보통 일이냐?”
보람이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도 노력한다고 했는데, 기술로 때울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겠냐?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것도 많고.”
보람이 도면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벙커 방탄 철판만 해도 그래. 말이 좋아 모터로 움직이는 거지. 이 하중 걸리면 까딱하면 모터 나가는 수가 있거든. 그러다 누전이라도 되면, 집 전체 전기 나가는 건 순식간이고! 그러니까 이 하중은 이 설계에서는 부담이 과한 거지.”
성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하중을 분산시키라고 했더니…….”
보람의 손가락을 따라 성훈이 시선을 옮겼다.
결과적으로 외부로부터 창을 보호할 일체형 철판은 네 토막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두께 또한 얇아져 있었다.
“물론 기술적으로 볼 때는 이게 맞아. 그런데…….”
보람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생각이 단순해져 버렸어. 어차피 고심해서 설계해도 실행할 수 없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 거지.”
보람이 어렵게 말을 이었다.
“성훈아, 지금 남은 건 껍데기만 그럴싸한 집이지. ‘실제로 처음 구상했던 벙커의 위용이 과연……?’ 하는 의문이 들어서 말이야.”
성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꼬았다.
“흠…….”
“물론 지금 이걸로도 나는 신선하다고 봐.”
하지만 성훈의 생각은 달랐다.
‘신선함만으로는 안 돼! 압도적이어야 한다고.’
세계에 선보일 첫 작품이었다.
성훈이 말했다.
“그러니까 편한 길을 선택했다. 이거네.”
으르릉거리며 말을 이었다.
“한 번 붙들었으면 끝을 봐야지. 중간에 때려치우려고. 이것들이!”
찾고 찾으면, 나오지 않을 답이 없을 터!
보람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꼭 걔네들만 탓할 수도 없어. 사실 우리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성훈이 물었다.
“하중만 해결하면 돼?”
“아니, 그건 일부분일 뿐이야. 이것 말고도 문제는 많아. 알잖아? 다들 만들기 어려운 것만 모아놓은 거. 세밀한 부분을 말하자면 끝도 없지.”
하중만 문제가 된다면 새로 개발될 강철 합금으로 해결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게 일부라니?
‘그럼 강철 합금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말인데?’
심각하게 고민하는 성훈에게 보람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능력이 안 돼서.”
가능한 건 최선을 다해 보조하겠지만, 안 되는 걸 안 된다고 하는 게 저들의 역할이다.
현실을 무시한 설계는 무고한 희생을 부른다.
그 때문에 저들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그들의 도움으로, 후배들이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해 주길 바랐다.
성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너희들 탓이 아니야. 오히려 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지. 나도 이건 생각도 못 했으니까.”
“하지만 성훈이 네가 바란 게, 이런 적당히 타협한 결과물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
“흠…….”
성훈의 손가락이 턱으로 향했다.
“이거 심각한 문젠데?”
단순히 공모전의 승리가 문제가 아닌, 후배들의 인생이 걸린 것이기도 했다.
그 말에 보람도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이거 때문에 골머리 좀 썩었다. 자칫하면 그 녀석들이 창의적 설계에 대한 흥미를 잃을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니까.”
보람이 말을 이었다.
“네 의도와는 다르게 말이야.”
아무리 창의적이면 뭘 하나?
실현 불가능하다면, 그저 몽상에 불과할 뿐!
‘그리고 실패의 기억은 현실에 안주하게 하겠지.’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
내가 지난 삶에서 건축 설계를 포기했던 것도, 그 영향이 컸었다.
‘흥미 상실로 인한 뒤처짐.’
앞서가려 노력하지 않는데, 어찌 뒤처지지 않으랴?
설계든, 공부든, 일이든!
진화의 반대는 퇴화가 아니라, 소멸이다.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면 기억에서 잊히고, 잊히면 사라지는 게 모든 직업 세계의 적자생존.
‘그리고 이어지는 자신감의 상실.’
게다가 한번 잃은 흥미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후배들은 경험이 없어 자각하지 못하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뼈아프게 깨닫게 된다.
하지만 흘러간 세월은 절대 되돌릴 수 없다.
설계에 지쳐버린 무력감이, 이렇게 점점 평범해지는 도면으로 표출되는 것이었다.
“많이 그러냐?”
“이제 반수 이상은 그러지 않을까 싶다. 혈기방장하게 덤비던 놈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으니.”
“그 싸움이 설계가 잘 되어간다는 바로미터였던가? 훗!”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자칫하면 이거 독이 되겠는데.”
“미안하다. 괜히 폐만 끼치는…….”
성훈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아니, 후배들은 둘째 치고 너희한테도 말이야.”
보람이 말없이 웃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다.
‘해서도 안 되고!’
이미 한번 새겨진 패배감은 지워지지 않을 테니.
‘이런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기다니!’
허나 데리고 왔으니,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 한다.
‘나 믿고 온 녀석들인데! 게다가 사기 문제야. 죽을 때 돈 싸갈 것도 아니고. 한번 질러본다.’
성훈이 물었다.
“그런데 진짜로 불가능한 거냐?”
“응. 우리도 검토 많이 해봤어. 오죽하면 내가 이렇게 죽는소리하겠냐?”
“아니! 한국에서는 안 되는 거 알겠고. NASA 그런 데는 어떠냐? 이 말이지.”
보람이 놀라서 되물었다.
“뭐? NASA? 그건 잘…….”
“NASA든, MIT든, 유명한 데 알 거 아냐?”
건축밖에 모르는 성훈이 알아야 얼마나 알겠는가?
성훈이 재차 물었다.
“진짜 불가능할까?”
“가, 가능할지도 모르지.”
성훈이 단호하게 말했다.
“알아봐. 필요한 기술이나 재료가 있으면 말해. 아낌없이 지원해 줄 테니까.”
“그래도 되는 거냐? 돈이 꽤 들 텐데?”
속으로 성훈이 투덜거렸다.
‘회사에는 그만큼 더 벌어다 주면 된다고! 반대하면? 내 돈으로 하고 내가 다 먹지. 뭐!’
게다가 이건 성훈의 후배들 문제만도 아니었다.
‘보람이 너도 꽤 자신감을 잃은 것 같거든!’
보람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모두에게 공지해! 책임은 내가 지니까, 필요한 인재가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