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401화
저마다의 꿍꿍이(02)
다음 날 아침.
대목장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대목장 어르신!”
“으음, 웬 놈이냐? 아침 댓바람부터.”
부스스 눈을 비비고 보니, 시계는 일곱 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고, 아직 입가에는 어제 마신 막걸리 향이 기분 좋게 남아있었다.
마른 입술을 혀로 훔치며 중얼거렸다.
“한 교수 이 친구, 급하지 않다 했건만…….”
서울 지리 잘 아는 친구 하나 붙여 달라 부탁했더니, 이리도 일찍 온 모양이라 생각했다.
흐뭇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퍽도 부지런한 친구일세. 응당 그래야지.”
허나 이번에 온 친구는 부지런한 만큼 성격도 급한 모양!
예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어르신. 어디 계시냐니까요?”
복도가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치고 있었다.
“기운도 좋구먼, 젊은 녀석이.”
어기적거리며 방바닥에 걸린 저고리를 주섬주섬 주워들며, 복도를 향해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게. 내 바로 나갈 터이니!”
비록 아랫사람이라 하나, 자신을 도와 서울 저잣거리를 안내해 줄 사람.
하루를 신세 질 이에게 어리다 하여 무작정 기다리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한 교수가 보낸 친구는 성격이 아주 급한 모양이었다.
아직 속옷 바람인데, 숙소 문이 벌컥 열렸다.
“어허! 이 무슨 무례한…….”
신경질적으로 호통치며 돌아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호흡을 멈췄다.
“헉! 서, 성훈이냐?”
“왜 그리 놀라세요? 못 볼 걸 본 것처럼! 그리고 어르신하고 저 사이에 무례는 무슨……. 빨랑 입으세요!”
하지만 돌처럼 굳은 몸은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엉거주춤 동작을 멈춘 채 물었다.
“네, 네가 여기 웬일이냐?”
“내 회사 기숙사인데, 못 올 이유라도 있어요? 그리고 팀장급 이상은 7시 출근인 거 모르세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중국에 있는 거 아니었느냐?”
“그건 어제 일이죠!”
“어제 갔다면서? 사흘은 걸릴 거라 들었거늘, 내가 잘못 안 것이냐?”
성훈의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고였다.
“그러게요. 사흘이 더 걸릴 수도 있다고 각오하고 갔었거든요!”
“그런데?”
대목장의 물음에 오른팔로 풀 스윙을 휭 휘두르며 성훈이 기분 좋게 말했다.
“일이 풀리려고 하니까, 그렇게도 풀리더라고요. 하루 만에 싹 해치우고 왔습니다.”
“그, 그랬구나…….”
내키지 않은 동작으로 어기적거리자, 성훈이 다가오며 물었다.
“몸이 어디 안 좋으세요? 도와드려요?”
“어허! 되었다. 내가 하면 된다.”
대목장이 다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아직 한 교수가 얘기를 안 한 것인가?’
어제 출발을 했어야 했는데,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은 법!
그래도 말은 해봐야 할 것 아닌가?
‘제 놈도 양심이 있으면…….’
성훈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성훈아.”
“네?”
“혹시 한 교수가 아무 말 않더냐?”
“아! 어르신이 저 보면 많이 아쉬워하실 거라던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전 반갑기만 하고만.”
속없이 싱글벙글하는 성훈을 보자, 한 교수가 원망스러웠다.
‘뭣이? 만났는데도 말하지 않았다고? 에잉!’
한 교수는 성훈의 성격을 알고 있으니 애당초 말도 꺼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속으로 열불이 치솟았지만, 꾹 눌렀다.
그래도 자신의 처지를 배려했다면, 부탁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니면 내게 연락을 주던가? 도망이라도 치게!’
바짝 약이 오른 대목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 교수! 요 고얀 놈! 두고 보자. 네놈 상투는 내가 친히 틀어 주고야 말 테다! 끄응!’
방을 휙 둘러보며 성훈이 투덜거렸다.
“아! 바빠 죽겠는데, 왜 이리 늑장을 부리세요?”
성훈의 독촉이 들렸지만, 경주에 갈 생각에 부풀어 있던 기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좋은 반응이 나올 리가 있나?
윗저고리에 팔을 넣으며 꿍얼거렸다.
“흥! 그리 바쁘면 어제 오지 그랬느냐?”
“그럴 수 있었으면 그랬겠죠. 오늘 새벽에 도착했으니 그건 어쩔 수 없고!”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냐?”
성훈이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답했다.
“일 때문에 왔죠. 그렇게 입어서 언제 다 입으시려고! 팔 이리 주세요!”
옷깃을 덥석 잡고는, 대목장의 반대 팔을 끼워 넣었다.
“아야야! 아프다. 욘석아!”
“이제 괜찮으세요?”
그의 팔을 붙임성 있게 주무르는 성훈을 흘기며, 대목장은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어험! 시차 적응이 안 돼서 그런 건가?”
그러고는 양어깨를 휘휘 돌리며 말을 이었다.
“어째 몸이 영 시원치 않구나.”
“장거리 여행이셨으니…….”
“그렇지. 늙으니 몸이 영…….”
성훈이 대답이 없자, 대목장은 바로 말을 이었다.
이런 기회를 놓쳤다가는, 다시 아내와 삼 개월간 이산가족으로 살아야 할 게 명약관화였으니!
어쩌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고…….
“그래서 하는 말이다만……. 하루 정도 경주에 가서 여독을 풀었으면 하는구나. 코에 바람도 좀 넣고…….”
“…….”
가타부타 대답이 있어야 하건만, 성훈의 무반응에 조심스레 돌아보며 물었다.
최대한 피곤에 찌들어 보이는 표정으로.
“성훈아, 내 말……. 듣고 있느냐?”
하지만 성훈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내용물이 사라진 막걸리병!
그것들이 질서 정연하게 사열해 있는 방구석을.
오늘 새벽, 소피가 귄터를 부축해 나갈 때 저리 깔끔하게 정리해 둔 것이리라.
세기도 좋게…….
성훈이 말없이 입 끝을 올리며, 팔짱을 쓱 꼈다.
“아! 아직도 여독이 안 풀리셨군요?”
저도 모르게 대목장의 몸이 움찔했다.
“저, 저건 말이다. 성훈아.”
성훈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아하! 시차 적응이 안 되셔서……. 저렇게 막걸리를 까셨구나!”
“크흠. 그건 말이다. 오랜만에 막걸리를 마시다 보니. 너도 알다시피 미국에는 저게 비싸서…….”
그리고 재빨리 말을 이어 붙였다.
“게다가 대부분은 귄터 성님이…….”
대목장의 말은 귓등으로 흘리며, 성훈의 눈은 막걸리병을 세고 있었나 보다.
“스물여섯, 스물일곱……. 와! 서른두 병! 저걸 귄터, 그 영감님이 혼자 다 드신 건 아니죠?”
“어험! 내가 약간 거들기는 했다만.”
개수를 헤아린 성훈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작은 반상과 그 위에 차곡차곡 쌓인 접시들.
그리고 누군가가 먹다 남긴 파전의 잔해들.
저 파전은 누가 부쳤을까?
대목장이나 귄터가?
절대 그럴 리가 없지!
누군가에게 지시했으리라.
‘이들의 시중을 들어 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성훈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흠……. 이제 이해가 가네.”
그러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었군.”
“뭐, 뭐가 말이냐?”
대목장의 물음에 성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아침에 제가 혼이 났거든요.”
“감히 누가 너를?”
의아해하는 대목장을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소피한테요.”
뜻밖의 답에 대목장이 눈을 홉뜨며 물었다.
어제 귄터와 밤새 대작했던 이유가 뭔가?
그게 다 둘의 혼사 계획 때문 아니었던가?
그런데 벌써 빨간 불이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대목장이 갸웃하며 물었다.
“소피, 그 아이가 네게 왜?”
“반가워서 어깨를 툭 쳤는데, 눈은 뻘게 가지고 건드리지 말라고 짜증을 내더라고요. 팔에 알통 배겼다면서 울상까지 지으면서.”
왜 그런지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라, 대목장은 스리슬쩍 등을 돌리며 바지를 주워들었다.
바지를 툭툭 터는데, 성훈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이상하죠? 힘쓰는 일을 하는 녀석도 아닌데…….”
켕기는 게 많은 대목장이 연신 기침을 해댔다.
“크흠! 크흠!”
“오늘 새벽까지 어떤 분들의 술심부름과 안주 구워 나르느라 생긴 근육통이었어. 그것 때문에 난 눈치 없는 놈이 되었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심부름은 귄터가 시킨 것!
귀책사유는 분명 귄터에게 있었다.
크게 헛기침하며 말했다.
“그건 내가 시킨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귄터…….”
그의 해명은 관심 밖인 듯, 성훈은 다시 숫자를 세어 나갔다.
“접시가 여섯, 일곱 개네요.”
“커흠!”
“그럼, 여기에 최소한 일곱 번은 왔다 갔다는 거고, 식어 빠진 파전을 드실 분들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무슨 변명을 하랴!
아무 말 않아도 귀신같이 아는데…….
대목장은 말없이 바지에 다리를 끼워 넣었다.
등 뒤에서 성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네, 내가 화나게 한 게 아니어서. 난 또 괜히 긴장했잖아. 매직데이인가 하고…….”
성훈이 손뼉을 짝 치며 화제를 바꿨다.
“어쨌거나 그게 중요한 건 아니죠.”
대목장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다 입으셨네. 바로 출근하실 거죠?”
“벌써?”
당연하다는 듯 성훈이 말했다.
“그럼요! 제가 얼마나 어르신을 기다렸는데요. 그리고 괜히 제가 왔겠어요? 모시고 가려고 왔지. 가는 길에 밀린 얘기도 좀 하고요.”
팔을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간 걸 보니, 이대로 납치를 할 모양새!
허나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하지 않던가?
게다가 몇 달을 미국에서 고생했는데, 아내 얼굴도 못 보고 끌려갈 수 있으랴?
성훈의 손을 툭 떨쳐내며 말했다.
“아니, 성훈아. 그게 말이다. 내가 오늘 집에 간다고 전화를 해뒀단다. 안사람이 오매불망 기다릴 걸 생각하니,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지 않구나.”
그 심정 안다는 표정으로 성훈이 다시 그의 팔을 잡았다.
“저도 그게 제일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그렇지?”
“그래서 올 때 할머니께 말씀드렸어요. 급한 일이 있어서, 어르신 좀 더 빌리겠다고.”
“너, 너. 이 녀석!”
눈을 부라리는 대목장에게 말을 이었다.
“요즘도 약주 많이 드시냐고 물으시던데요?”
성훈이 사실대로 말했다면, 부부 상봉은 잔소리부터 시작되리라.
뜨끔한 대목장이 물었다.
“그래? 그, 그래서 뭐라 하였느냐?”
성훈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제가 그렇게 눈치 없어 보이세요?”
뚱하게 시선을 돌리는 대목장에게 말을 이었다.
“막걸리 이렇게 드신 건, 할머니께 말씀 안 드릴게요. 평생.”
“크험!”
“저도 할머니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거든요.”
“고맙구나.”
대목장이 검지를 세우며 간절히 말했다.
“그래도 성훈아. 하루만 시간을 주면 안 될까? 딱 하루만.”
그 말에 성훈이 대놓고 표정을 구겼다.
“어르신 때문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얼만데, 어림없는 소리일랑 하지도 마세요.”
“어제 미국에서 돌아온 사람에게 또 일을 맡기다니. 대체 얼마나 일이 많기에 그러느냐?”
“흠…….”
성훈이 말없이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모전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서 있지는 않은 모양.
대목장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다행이구먼. 여기서 협상을 잘하면?’
성훈이 입을 열었다.
“한……. 30개 정도는 디자인이 나와야 구색이 맞겠네요.”
대목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말로! 내려가기는 다 틀렸구먼…….’
마감까지 석 달이 남았으니, 사흘에 하나씩은 완성을 시켜야 할 터!
대목장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이놈아! 뭘 그렇게 많이…….”
성훈이 멀뚱거리며 대응했다.
“귄터한테도 그 정도는 맡길 생각인데요?”
그러고는 되물었다.
“자신 없으세요? 귄터보다 잘할?”
비록 의형제의 연을 맺기는 하였으나, 실력에서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의형제도 실력이 대등하니 맺을 수 있었던 것!
“자신이 없다니! 내가 언제 그러더냐?”
“하실 수 있으세요?”
대목장이 호언장담하며 콧방귀를 꼈다.
“당연하지!”
허나 생각해 보니, 억울하지 않은가?
대목장이 투덜대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 녀석은 어찌 나만 닦달을 하는 것인고? 나 혼자 돌아온 것도 아닌데?”
성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뭘?”
성훈이 수화기를 꺼냈다.
“소피? 나야. 귄터 깨워서 사무실로 모시고 와!”
-저 지금 바쁘다고요! 할아버지 깨울 시간이 어디 있어요?
아직도 근육통의 탓인지, 소피아의 음성에는 날이 서 있었다.
“너 아니면 깨울 사람이 누가 있어? 그 영감님 성격 알면서? 더 바쁜 내가 가?”
소피의 한숨 소리가 수화기에서 터져 나왔다.
-휴……. 내 할아버지고, 남의 할아버지고…….
“참! 그리고! 귄터가 맡을 디자인은 30개야.”
-네? 왜 늘었어요? 스무 개였잖아요?
귄터의 프로젝트는 소피아가 관리한다. 허니 그녀라고 일이 많아지는 게 좋을 리 없을 터.
“대목장 어르신도 서른 개를 하시겠다는데, 그보다 적으면 귄터가 자존심 상해하시지 않을까?”
새침한 소피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 아닐걸요?
하지만 그 음성에 확신은 없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됐어. 그렇게 전해!”
-흥! 알았어요.
“나 도착할 때까지 모시고 와.”
다시 한번 소피의 한숨이 들려왔다.
-휴! 정말 도움 안 되는 할아버지들이야. 정말!
통화를 끝내자, 대목장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야! 이놈아!”
“하실 수 있다면서요? 못 하세요?”
“아까는 성님께…….”
“네. 맡길 거라고 했었죠! 분명히.”
“아까는 이미 그리 정해진 것처럼 해놓고는…….”
하지만 성훈은 뻔뻔스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맡겼죠. 지금!”
“끙, 그것이 어찌?”
성훈이 빙글거리며 말했다.
“남아일언 중천금! 어르신께서 항상 강조하시는 말이죠. 아마?”
“끄응!”
남아일언 중천금!
그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그가 여기서 꼬리를 말아서야!
대목장이 호언장담했다.
“한다! 이 녀석이 나를 뭐로 보고!”
거부할 명분을 찾으려면 불가능하랴?
하지만 대목장의 가슴에는 소피의 한숨 소리가 남아 있었다.
‘여기서 일을 어그러뜨려서야, 절대로 안 되지.’
대목장이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
“추가된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이 일이 끝나고,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할 것이야! 스무 개에서 열 개가 더 늘었으니!”
타당성 있는 말이었다.
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죠, 뭐든지!”
“가자! 시간이 없다!”
대목장이 앞장서며 숙소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