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96화
초빙(11)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이민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안 보였다.
운전석에 있던 첸이 차에 탄 나를 돌아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팀장님! ‘혀로 뺨 후린다!’는 말만 들었지, 직접 본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어우!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쫘악!”
정말 소름이라도 돋은 듯, 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아무 말도 못 하게 눌러버리시다니.”
호들갑 떠는 모습에 피식 웃었더니, 그가 말을 이었다.
“팀장님의 지식에는 정말 감탄했습니다.”
“지식이라뇨?”
“어찌나 설명이 찰지신지 희토류, 철근 강도, 어쩌고저쩌고 평소에는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말들인데, 팀장님 말씀은 귀에 쏙쏙 들어오더란 말이지요. 하하.”
절로 웃음이 피식 나왔다.
‘난 바닥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했는데.’
내가 말한 건, 사실 두 가지뿐이었다.
LED나 영구자석에 희토류가 쓰인다는 사실.
그리고 합금의 강도가 너무 강하면 가공이 어렵다는 사실.
그럴싸하게 말을 이어붙이니, 말이 되어 보이는 것뿐, 첸의 말처럼 전문지식은 전혀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첸에게는 그렇게 보인 모양!
‘닳고 닳은 첸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으면, 이민호가 눈치채기 어렵겠군.’
신이 나서 떠벌이는 첸의 눈빛이 아까와는 또 달랐다.
감탄이랄까? 존경이라는 감정이랄까?
일단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나중에 이민호가 오늘의 대화를 복기해 본다고 한들,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이미 뇌리에 박혀버린 이미지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그 충격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그만큼 이민호가 느낀 실망은 클 터!
‘이젠 달래야 할 시간인가?’
천재의 재능을 고작 이런 일로 주저앉히는 건 엄청난 낭비다.
첸은 여전히 존경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쉽게 설명한다는 건, 그만큼 이해도가 깊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이민호의 풀죽은 모습에 신이 난 첸은 아직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그의 말을 끊었다.
‘딱히 설명할 것도 없고.’
“민호가 안 오네요?”
“아까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있는 걸 봤습니다. 우는 것 같던데, 시간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날씨가 춥네요. 목도 마르고.”
“캔 커피라도 뽑아올까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첸이 환하게 웃으며 차를 뛰쳐나갔다.
“네! 따꺼! 즉시 대령하겠습니다.”
잠시 후 이민호가 돌아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형님.”
고개를 든 녀석의 얼굴에 물기가 촉촉했다.
하지만 눈의 흰자에는 벌겋게 핏줄이 서 있었다.
마침 첸이 돌아왔고, 캔 커피를 내게 건넸다.
“따꺼! 여기 따끈따끈한…….”
환하게 웃다가 이민호의 표정을 보고는 목소리를 죽였다.
“여기 있습니다.”
커피를 받아들고, 이민호에게 건넸다.
“마셔라. 추운데.”
“네, 감사합니다.”
첸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따꺼, 출발하겠습니다.”
* * *
“미안하다.”
무슨 말이냐며, 힘없이 돌아보는 녀석에게 말을 이었다.
“네가 너무 경거망동하는 것 같아서 잔소리한다는 게 흥분하고 말았구나.”
“아뇨. 틀린 말 하신 것도 아닌데요, 뭐.”
침울한 얼굴로 민호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갈 데는 있냐?”
“포항으로 돌아가야죠.”
“가도 별로 안 반길 텐데?”
“그래도 일단은…….”
“너, 소장이 수배 걸은 건 알고 있냐?”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회의하다가 뛰쳐나왔다면서?”
“중국 간다고 얘기했는데요?”
“중간에 연락은 했고?”
그가 눈알을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희토류도 못 구했는데…… 무슨 염치로…….”
“성과가 없어도 보고는 해야지. 그게 회사인데.”
풀죽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기 싫은 얼굴.
‘아직 애네, 애.’
근태 불량, 원만하지 않은 대인관계, 공금 유용, 밀수까지.
23년을 살아오면서, 접해본 사회라고는 학교가 전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공부뿐이었던 아이!
유학을 중간에 관두지 않고 정상적으로 졸업했더라면, 괜찮은 연구소에 취직했을 것이고, 천천히 사회에 적응하며 정상적인 직장 생활이 가능했으리라.
하지만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병환이 그의 인생을 비틀어놓았다.
‘미안하다, 민호야.’
속으로 사과했다.
나를 위해서였다고.
스스로 자위했다.
일부는 너를 위해서였다고.
그리고 다짐했다.
‘반드시 이 빚은 갚겠다.’
그에게 물었다.
“큰돈이 필요하다는 게, 어머니 뇌종양 때문이지?”
놀란 듯 고개를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떨궜다.
내가 아는 게, 이제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듯.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민호야, 아까 말했지?”
“뭐요?”
“널 괜찮게 봤던 건 사실이다.”
이제 와서 위로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눈앞에 보이던 성공이 물거품으로 변해버렸는데?
그리고 제 눈앞에 있는 나는 절대로 이길 수 없어 보일 것이다.
녀석이 4, 5년 동안 고민했던 걸, 나는 한 달에 해치웠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테니.
‘사실 그 때문에 강하게 밀어붙였고! 건방진 모습에 화가 난 것도 좀 있지만.’
울음을 참는 듯, 이민호는 어깨를 떨며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여기에 온 이유는 이번에 내가 차릴 연구소에 필요한 것을 사러 온 거야.”
침묵하는 그에게 말을 이었다.
“자리 하나 줄 테니까, 거기서 일하면 어때?”
“안 돼요.”
“왜?”
그는 숙인 고개를 재차 저었다.
“형님, 전 당장 큰돈이 필요합니다.”
어머니의 목숨이 제 손에 달렸다는 책임감인 걸까? 아니면 강박인 걸까?
“멍청아! 형이 왜 이 이야기를 하겠어? 우리 회사 의료 복지 좋다. 네 어머니 수술비 정도는 무한으로 대줄 수 있다. 완전히 쾌차하실 때까지.”
그 말에 이민호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네? 정말입니까? 돈이 얼마나 들어도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대충 오억 정도로 되겠던데? 복합 수술이라 그 정도는 들겠다고 하더라고?”
곽 부사장의 보고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네? 삼억이 아니라요?”
민호가 모르는 거로 봐서는, 그의 중국행 이후에 다른 병이 발견된 거겠지.
“뇌종양 말고도 다른 지병이 또 있으시더라. 병은 병을 부르는 법이니까.”
“그, 그런데 진짜, 진짜로 무한이에요?”
안도감 때문일까?
다시 눈물이 고이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는 건데, 절대 너만 특별 취급하는 게 아니야. 우리 회사 의료 복지는 직원이기만 하면, 누구든 100% 무한이야.”
이건 사실이었다.
KT 팀에 정착된 지는 일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첸이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민호가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입니까?”
“그럼! 가족이라 생각하는데, 그 정도도 못 하겠어?”
반신반의하는 그에게 다시 확실하게 말했다.
“방금 입사했어도! 당장 내일 죽을병이라도! 지원해준다. 직원이라면! 무제한! 대신…….”
“대신…… 뭔가요?”
“반드시 대가를 받는다.”
“어떻게요?”
“아마 본전을 뽑기 위해 혹독하게 부려먹겠지. 우리 사장이 보통 짠돌이가 아니거든!”
호의가 전해졌는지, 민호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지만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형님이 계시는데, 제가 필요하다고 하실까요? 사장님께서?”
룸미러로 첸의 시선이 느껴졌다.
‘으잉! 어떻게?’
이민호가 자신 없어 하리라고는 추호도 예상하지 못한 듯.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나와 민호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에게 물었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밤이 어둡네요. 운전에 집중해 주세요.”
“네, 네! 따꺼!”
혹시라도 안 된다는 말이 나올까 무서웠을까?
약간 겁먹은 표정이었다.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나 때문에 네가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이 폐를 끼치는 게 아니냐는 말이겠지.
“필요에 대한 판단은 네가 하는 게 아니야. 내가 하는 거지.”
‘난 네가 꼭 필요하다고!’
민호를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한테 가장 아쉬운 게 뭔지 알아?”
운전하던 첸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게 뭡니까? 티……. 따꺼!”
룸미러에 비친 첸이 이렇게 묻고 있었다.
‘당신한테도 아쉬운 게 있습니까?’
그에게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그건 쓸 만한 사람이 많이 부족하다는 거죠.”
실제로 내로라하는 사람은 다 모아놨지만, 그래도 인재에 목이 말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첸이 맞장구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암! 그렇지요. 그렇다마다요!”
‘인사(人事)가 만사(萬事).’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런 나한테 가장 쉬운 일은 뭔지 알아?”
고개를 갸웃하던 이민호가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모든 것이지.”
이보다 높은 수익률을 내는 투자가 존재할까?
돈으로 인재의 마음을 사는 것보다!
‘그들의 진심을 얻는데, 내가 쓰는 건 고작 돈뿐이라고!’
고작해야 몇 십억, 고작해야 몇 천억.
그런 거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니!
그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액수일지 몰라도, 내게는 단지 숫자에 불과했다.
“괜히 도움도 안 되는 저 때문에…….”
뻔히 보이는 사양이지만, 난 마음에 들었다.
난 아무에게나 호의를 보이지 않거든!
‘어찌 되었든, 내 호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애초에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렸으니까.
대박의 꿈이 날아가는 순간, 경우의 수는 허공으로 흩어졌고, 그는 절벽 끝으로 내몰렸다.
‘그래도 단숨에 받아들이기 과한 호의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
적어도 양심이 썩은 인간은 아니라는 증거!
이런 인간은 쉽사리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다.
‘호의에 답하면 어머니를 고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너무 염치없다. 이거에 갈등하는 거겠지.’
그의 망설임에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가 대가 치를 능력이 없을까 봐 걱정하는 거냐?”
이민호는 부끄러움에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걱정하지 마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무한 복지는 있어도, 무상 복지는 없다.
‘네 연구는 못 해도 오백억!’
하지만 거기서 그칠 생각은 없었다.
‘네 연구를 전 세계로 퍼뜨려주지! 네 이름을 세계인이 다 알도록!’
“제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래도 제가 형님보다 먼저 개발하지 못할 겁니다.”
‘훗! 개발할 자신은 있다는 거지.’
그럼 지금이 딱 좋은 기회군! 발 뺄 기회!
무슨 핑계를 대든 난 이 합금 연구에서 발을 빼내야 했다.
오로지 이민호가 주도적으로 작업을 진행하도록!
같이 있어 봐야, 내게 이득 되는 것은 없었다.
내 얕은 지식만 들통나겠지.
어깨를 늘어뜨린 그에게 말했다.
“아니! 난 이제 이 연구 안 건드릴 거야!”
“네? 왜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대신할 사람 구했는데, 내가 왜 이런 돈도 안 되는 거에 머리를 써야 해? 그럴 거면 사람을 왜 구해?”
“하지만 저보다 훨씬 더 빨리 만드실 텐데.”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며, 고개 저었다.
“빨리 안 만들어도 돼. 연습한다고 생각해! 어차피 강철합금은 시작일 뿐이니까.”
그러고는 이민호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꼴랑 이거 한 건 끝내고, 다른 회사 가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화들짝 놀란 이민호가 양손을 허우적거렸다.
“아, 아뇨! 절대,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이번에 내가 주도해서 한다 치자! 그럼 다음 프로젝트 만들 때는? 그때도 넌 나 없이 못 할 거 아니냐? 언제까지 뒤치다꺼리해줄까?”
“그래도…….”
머뭇거리는 그에게 말을 이었다.
“형!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야.”
“아! 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너, 오늘부터 내 직원이다?”
“네! 알겠습니다.”
공항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있을 터.
‘이민호 스카우트’를 마무리 지을 시간이었다.
‘빚 지울 수 있을 때는 일단 지우고 보는 거지.’
금전적 빚은 갚으면 끝나지만, 마음의 빚은 갚아도, 갚아도 이자를 낳는다.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부사장님, 뇌종양 최고 전문의가 어디 있죠?”
-아! 캘리포니아 주립대 병원이 아닐까요? 작년에 왕회장님 사모님께서 거기서…….
“그래요? 이민호 모친 캘리포니아 의대에 지급으로 입원시키고, 바로 수술 일정 잡으세요.”
-아! 벌써요? 며칠…….
하지만 그의 말은 바로 이어졌다.
-알겠습니다. 바로 전용기 띄우겠습니다.
“불편함이 없도록 최고로!”
-네, 알겠습니다. 다른 지시는 없으십니까?
“이따 공항에서 다시 전화 드리죠.”
찰칵!
“고맙습니다. 형님! 이 은혜는 평생…….”
왈칵 솟구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는 듯,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