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축의 신-390화 (390/427)

건축의 신 390화

초빙(05)

한석이 나가고, 보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간만에 긴장했네!”

“왜? 까일까 봐서?”

보람이 말 대신 실소를 흘렸다.

“응. 거기서 너한테 깨졌어 봐.”

그의 생각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가르치는 자가 권위를 잃으면, 그의 말도 신뢰를 얻지 못하는 법이다.

‘나도 그걸 바라지는 않는다고. 이 친구야!’

미소 지으며 도면을 접어 그에게 넘겼다.

“그랬으면 보람이, 네 체면이 많이 상했겠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보람에게 말을 이었다.

“몇 개 더 있었는데, 일부러 말 안 한 것도 알고?”

보람이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고마워. 쩝. 전기난로는 어떻게 찾았냐? 그것도 찾았는데 다른 거야. 뭐! 네 눈썰미에 어련히…….”

‘어련히 찾았겠냐’는 말이겠지.

“길게 말하지 않을게. 아직 부족한 놈들이다. 네가 잘 챙겨서 괜찮은 설계도 뽑아내라.”

“알았어.”

“그렇다고 너무 봐줘서, 쓸데없이 기 살리지도 말고. 깰 때는 확실하게 깨라고!”

보람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라. 잘 조절할 테니.”

“잘해 내리라 믿는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보람은, 긴장이 풀렸는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민수랑은 완전히 다르네? 저 녀석은?”

“그렇지?”

“민수도 사람 긴장시키는 카리스마가 있었거든. 너하고는 좀 다르지만.”

“의지가 되는 녀석이지, 민수는.”

날 대신해 미국에서 고생하는 민수를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응! 그런데 한석이 저건 그런 게 없어. 말하는 것도 약간…… 건방지다고 할까?”

아까 생각이 나서 피식 웃었다.

“말버릇?”

보람은 눈치를 살피면서도, 어이없게 웃었다.

“그렇지. 하늘 같은 선배한테 발 버릇이 뭐냐? 내가 나중에…….”

“내버려 둬. 그 녀석 천성이니까.”

‘그런 천성이라 대놓고 내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내 얼굴에 어린 흐릿한 미소에 보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천성이라고? 별 이상한…….”

‘좀 특이하긴 하지. 녀석이!’

로우 킥에 내성이라도 생긴 건지, 유독 한석이만은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것도, 맞는 것도.

움찔하며 웅크리는 것도 맞는 그 순간뿐.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만.’

“흠…….”

묘한 표정의 보람이 팔짱을 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보람에게 설명할 마음은 없었다.

이건 내 문제니까.

내가 안고 있는 고민, 일과는 별개의 문제.

KT는 수많은 인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들 중에서 내게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손 위로는 대목장과 귄터, 그리고 한 교수 정도.

손 아래로는 민수와 한석이 정도랄까?

‘대목장 어르신과 한 교수는 나와 항상 함께하기 어렵겠지만, 이 둘은 아니거든!’

건설 사장도 나를 터치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말해 무엇하랴!

특히나 존경받는 교두들이 나를 떠받드는 상황이니, 팀에서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 맘대로 폭주해도 막을 사람이 없다는 말!

‘자칫하면 고립되기 딱 좋지.’

내 말 한마디에 일의 진행이 결정되며, 그 결과는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보람에게 어떻게 말하겠는가?

입 끝을 올리며 말했다.

“그 녀석 장점이야. 민수와는 다른.”

보람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쩝! 민수하고는 다른 장점이 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민수가 신중한 단어를 택한다면, 한석은 직설적이고 적나라하다는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말이 거칠고 서툴러서 그렇지. 틀린 말을 하는 놈은 아니야.”

“그래?”

여전히 미심쩍은 눈치의 보람에게 말했다.

“겪어보면 알 거야. 촐싹대도 제 몫은 다 하는 놈이야.”

“네 새끼라고 좋게 보는 건 아니고?”

“훗! 그런 놈을 뻑 하면 패겠냐?”

내 기분을 알았는지, 보람이 말했다.

“하긴. 아까도 그렇더라.”

“아까, 뭐?”

“어린 녀석이 홧김에 대들만도 한데. 얻을 게 있다 생각했는지, 넙죽 고개 숙이더라고. 그렇다고 쫄은 것도 아니고.”

“넉살이 좋지. 녀석!”

“그러게…….”

묘한 표정의 보람에게 물었다.

“네 후배도 너랑 같은 용건으로 온 거지?”

“응. 그렇지 뭐.”

보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협업 부분은 대충 정리가 된 거군.’

손목시계를 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이럴 시간 있냐? 코어 설계 건으로 최 과장이 회의 소집했다던데?”

느긋하던 보람이 흠칫하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 맞다. 최 교두님!”

다급히 시계를 확인하며 보람이 뒤로 물었다.

“야! 회의, 세 시랬지?”

“네!”

보람이 다급히 탁자 위 도면을 챙기며 일어섰다.

“먼저 일어설게. 일 봐라!”

쾅!

문밖에서 보람의 투덜거림이 들렸다.

“말을 해야지. 자식들아. 오 분밖에 안 남았잖아?”

“그래도 팀장님이랑 얘기하다가 늦었다면 봐주시지 않을까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보람의 고함이 들렸다.

“빨랑 안 뛰어? 이것들아!”

‘최 과장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 적응이 안 됐군!’

피식 웃으며 전화기를 들었다.

쿠웨이트 국가가 수화기에서 울려 퍼졌다.

‘이 양반! 하여간…….’

잠시 후, 압둘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쇼?

누군지 뻔히 알면서도, 무뚝뚝하게 던지는 투에서 그의 기분이 느껴졌다.

‘기껏 전화해 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압둘이 다시 말했다.

-이 친구야!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아함! 깜빡 잠이 와서…….”

너스레를 떨며 크게 하품도 했다.

약이 오른 듯, 압둘이 투덜거렸다.

-미스터 박이 전화 올 거라고 해서 한참을 기다렸는데…… 지금 새벽 한 시야. 한 시! 미안하지도…….

대뜸 그의 말을 잘랐다.

“아! 그런가요. 거기는 한 시구나. 정신이 없어서.”

그의 사정까지 봐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을뿐더러, 지금 미안한 마음에 끌려갔다가는 통화가 끝날 때까지 압둘에게 이리저리 휘둘릴 터!

‘당신한테 휘둘리면 밑천이 드러난다고.’

딱 잡아떼며 말을 이었다.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겨서 전화 드렸어요.”

궁금하다는 말에 그가 물었다.

-뭐가 궁금한가?

“옛날에 압둘이 했던 말이 생각나서요. 처음 만났을 때 당신 비행기에서 했던…….”

-무슨 이야기?

의아해하는 압둘이었다.

‘그럴 수밖에. 내게 말한 게 아니라, 당신 혼자 읊조린 거에 가까웠거든.’

“알리가 부럽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예끼! 이 친구야? 내가 알리를 왜 부러워해?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듯,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제 기억에는 아닌데요? 알리의 집을 보며 이렇게 말했잖아요.”

-어떤 말을?

“그 집에는 알리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고.”

세상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그가 누구를 부러워하겠냐만은, 그런 그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지 않을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저는 확실히 들었습니다.”

-허허허. 거참! 자네 앞에서는 흘리는 말도 조심해야겠군.

허를 찔렸다는 듯,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니.

“그때 당신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었죠.”

-흠…… 왜 그때 묻지 않고?

“그땐 그걸 물을 사이도 아니었고, 당신도 더는 말하지 않았거든요.”

-이렇게 배려 깊은 사람이었나?

그의 놀리는 말에 코웃음 치며 응수했다.

“남의 아픈 기억을 후벼 팔 정도로 야비한 놈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묻나?

“당신의 이번 숙제는, 압둘이라는 사람의 껍데기만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호오.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을 아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지금이야 그 이유를 대충 짐작하지만.”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니면 공모전 주제를 명확하게 하든가!’

-자네의 짐작은 뭔가?

“이라크 공습과 관련된 그 무엇? 아마도…….”

-…….

“당신이 고작 돌덩어리의 역사를 부러워할 이유는 없잖아요?”

그의 굵직한 음성이 한층 더 낮아졌다.

-허허. 자네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이야. 잠시만 기다리게.

찰칵! 찰칵!

물담배인지 파이프인지 모르지만, 라이터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압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후! 우리와 이라크가 앙숙인 건 알고 있겠지?

그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

-하지만 내게는 좀 더 특별한 이유가 있다네.

그의 차분한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때…….

이라크가 침공하던 1990년을 말하는 것이리라.

-나는 부왕의 명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방문 중이었다네. 그리고…… 두 번 다시 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지.

한참 후, 그의 말이 이어졌다.

-다시 돌아갔을 때,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지. 내 자식들이 나고 자란 그 집은 폐허로 변해 있었네. 기둥뿌리 하나도 남김없이 말이야. 후우!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던 쿠웨이트 왕세자가 공허한 웃음을 흘렸다.

“억울했겠군요?”

-그나마 가족이 다치지 않았으니, 그것만 해도 알라의 가호인 게지.

압둘의 숨소리가 들렸다.

-후우. 그렇게 자위했지만……. 밀려드는 허무는 막을 도리가 없더군.

“삶의 한 부분이 송두리째 사라졌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겠죠.”

그것도 남의 손으로…….

-그 뒤로 부왕의 대(對)이라크 정책은 더욱 강경해졌네. 철천지원수를 대하듯 하셨지.

그럴 수밖에.

-그 사건은 내 생애를 통틀어, 알라께서 주신 가장 커다란 시련이었다네.

카펫 쓸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일어나서 창으로 향하는 모양이었다.

차분한 압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아까 성훈, 자네가 말했다시피, 부러워한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네만…….

한참이나 지난 후에 압둘이 다시 말을 이었다.

-미망이지. 이제는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어리석은 미련.

원래는 내가 원하는 것만 듣고 끊을 생각이었다.

만약 압둘이 진행 상황을 물으면?

‘왜 체통 없이 그걸 궁금해하세요?’라며 타박하려는 계획이었다.

명분은 충분했다. 그는 심사위원이니까.

‘이러면 공정 심사에 어긋나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화려한 뉴욕의 야경이 그를 감상적으로 만들었던 걸까?

압둘이 말했다.

-성훈.

“네. 압둘.”

-내가 왜 자네를 공모전에 끼워 넣은 줄 아나? 부왕과의 마찰을 감수하면서 말이야?

“부왕과 마찰이요? 그런 소린 못 들었습니다만.”

-자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네. 그저 내 결정이니.

“부왕께서 반대하신 모양이죠. 저를?”

-노파심이시지. 부왕께서는 내 존재가 더 돋보이길 원하셨고, 내 명성에 걸맞은 건축가들을 씀으로써 결과의 불확실성을 없애고자 하신 것이지.

‘내가 불확실성이라 그건가?’

“그걸 감수할 가치가 있는 일인가요?”

-암! 여기서 자네가 당선을 차지해 봐! 더는 조정 중신들의 잘난 척하는 꼴을 안 봐도 되겠지!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아직 중신들의 신뢰를 받지는 못하는 모양이군.

압둘이 왕이 되는 건 기정사실.

거기에 더해서, 제대로 된 왕이 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리라.

“왕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네요?”

-중신들은 아직 내 안목을 신뢰하지 못해. 부왕과 그들은 입장이 엄연히 다르니까.

“그렇겠죠. 부왕의 사후에 남겨지는 자들이니까.”

-그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계속 간섭이 들어올 수밖에 없게 되지. 그런 허수아비 왕이 되고 싶지는 않네!

“저번에는 일체 그런 말씀 안 하시더니.”

그는 무슨 소리냐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모르고 있었나? 자네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그걸 알면, 다른 식으로 거래를 진행했을 테니,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거겠지.

역시 노련한 장사꾼이라고 해야 할까?

‘살짝 약 오르는데…….’

내게 이걸 밝히는 건, 목적을 달성했다는 말!

이미 발 빼기에는 늦었다고 확신하는 거겠지.

하지만 배 아파할 필요는 없다.

압둘이 강해지면, 나도 좋은 거거든!

지금도 꽤 든든한 후원자가, 더 강해지려 하고 있었다.

‘일단 파이는 키워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사실대로 말했어도 전 아마 적극적으로 협조했을 겁니다. 아무 조건 없이!”

-조, 조건 없이? 진심인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사탕발림하는 것 따위 내겐 일도 아니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강력한 왕권을 위한 디딤돌이 되는 건데, 제가 싫어할 리 없잖아요!”

-호오.

그는 작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뜻밖이로군! 속았다고 약올라 할 줄 알았는데?

그와 나는 손해 보지 않으려고 서로 줄다리기하는 사이였으니, 어쩌면 그게 당연한 생각이리라.

그의 기대를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전 당신이 역대 어느 왕보다 더 강력한 왕이 되길 가장 바라는 사람입니다.”

잠시 침묵하던 압둘이 입을 열었다.

-흠. 진심이군.

길게 말할 필요가 뭐 있을까?

“압둘!”

-응?

“이 공모전 반드시 성공시켜서, 당신의 안목이 틀림없다는 걸 증명하겠습니다.”

-그, 그래.

“부디 존경받는 왕이 되어주세요! 대신들이 찍소리 못하는!”

생각해 봐!

왕이 아니라, 왕세자 나부랭이라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그냥 나한테 맡기면 되는 걸, 귀찮게 공모전 따위를 하고 있잖아?

‘어벙한 왕이 되었다간, 내가 더 곤란하다고!’

일 하나 하겠다고 말 많은 대신들을 일일이 상대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지 않은가?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그는 강력한 왕이 되어야만 했다.

‘이 정도까지 추켜세우는데, 왕이 되어서 신세 안 졌다고 하기는 어려울걸!’

내 바람이 자신의 그것과 일치했기 때문일까?

그의 대답은 상기되어 있었다.

-자네의 그 마음, 내 결코 잊지 않겠네!

“그런 말씀 마세요. 우린 친구잖아요.”

-그, 그렇지. 친구.

그의 멋쩍은 듯한 맞장구를 들으며, 내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행동에는 응당 대가가 따르기 마련!

이 상황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떠올랐거든!

‘그렇죠. 친구! 친구 사이에 함부로 약 올리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압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