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89화
초빙(04)
보람에게 물었다.
“너도 동의했던 부분이잖아. 그런데 왜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내 추궁에 그는 자신이 그린 도면 옆에 원래 도면을 놓고는 내 앞으로 밀었다.
“사실 수정해서 작업하려고 들면 안 될 건 없는데…….”
단순히 도면 품질을 비교해 달라는 말은 아닐 터, 두 도면을 들고 찬찬히 비교했다.
“흠…… 자세히 보니 꽤 바뀌었네?”
눈치챌 줄 알았다는 듯, 보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를 이해 못 한 한석이 물었다.
“도면이 바뀌다뇨? 왜요?”
하지만 지금은 도면 비교가 더 급했다.
보람의 의도가 뭔지를 알아야 하니까.
미세한 변화를 하나하나 짚어갔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전문가다운 손길로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 썼다는 게 느껴지는 변화였다.
‘많이도 바꿨네.’
하지만 모든 변화가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절대로 바뀌면 안 되는 것도 있었으니까.
보람의 입장에서는 당연할지 몰라도, 건축가의 입장에서는 당연하지 않은 것!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면의 깔끔함에 가려 본질을 무시하는 우를 범할 뻔했군.’
이런 것 때문에 후배들을 직접 대면하지 말라고 했던 건데.
하지만 보람들에게 무작정 효율성 없는 작업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도면을 내려놓고 보람에게 물었다.
“결론은 너희들이 작업할 공간이 없다는 거지?”
“역시! 척하면 척이네. 설계 원본은 최대한 안 건드리려고 했는데도, 그게 한계야.”
한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선배님들…….”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한석이는 이따가 얘기하자. 보람이랑 얘기 먼저 끝내고.”
단호한 말에 한석이 입을 다물었다.
“네 말은 설계 프로세스를 완전히 바꾸자는 말인 것 같은데.”
“그래, 매번 이렇게 수정하면서 작업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
지금까지의 전형적인 건축계의 일 처리 방식은 협업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상하 관계였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각 공종 전문가는 건축가의 의도대로 관련 첨부 도면만 그려주면 되는 것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까, 처음부터 공조를 해야 한다?”
“그렇지. 움직임이 없는 건축물이라면 이런 도면으로도 가능해.”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보람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엔 이건 집이 아니라, 기계의 집합체라고 봐야 돼.”
“그런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
내 수긍에 보람이 도면을 비교하며 설명했다.
“여기 이 덧문만 봐도 그래.”
아까 보람이 내민 건, 어제 이주영이 말했던 벙커의 개념을 도입한 도면이었다.
기존의 건물에서 벗어나는 개념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건물 외벽이 움직인다는 것.
’벙커답다고 해야 할까?‘
평소에는 외벽에 붙어 있다가, 비상시에는 내부 보호를 위해 창문을 덮는 덧문이 그것이었다.
덧문이라기보다는 그냥 벽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외부 공습으로부터의 철저한 차단!
거기에 충분히 방탄 역할을 할 수 있게끔, 철판으로 두껍게 보강되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육중한 무게감!
원도면에서는 벽과 딱 붙어 있던 부분이 지금은 30㎝ 정도의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기계장치가 삽입될 공간을 준 거?”
보람이 나를 힐끗 보고는 설명을 이었다.
“그래. 네가 허락 없이 도면 변경하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만…….”
아마 졸업박람회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현재 그룹 입사라는 미끼가 있었으니, 보람은 꼼짝없이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녀석들은 일주일 동안의 고생을 몇 번이나 허사로 돌렸어야 했었다.
그때 일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자, 보람이 억울한 듯 변명 섞인 말을 이었다.
“그때 된통 당해봤으니까.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는 변경이라고! 도면 보내올 때마다 설계자한테 ‘여기는 30㎝ 공간 만들고, 저기는 10㎝ 전후로 유격을 줘야 하고.’ 그렇게 일일이 코멘트 달아서 도로 넘길 수는 없잖아?”
‘일이 일을 만드는 꼴이 아니고 뭐냐?’고 보람은 눈으로 묻고 있었다.
“내가 너희한테 맡긴 건 옵션이야. 알지?”
내 설계의 코어 부분은 여타 건물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저 객실을 부착해도 흔들림이 없게 튼튼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동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지는 하지만, 이사를 안 하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고!’
그런 평범한 집에 누가 흥미를 느낄 것인가?
그 평범함을 극복하고 입주자들의 다양한 취향에 어필하기 위해서 객실에 색다른 특징을 첨가하기로 한 것이었다.
‘전통건축이라는 큰 옵션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는 객실만 천 개가 넘는다고!’
만 명의 사람이 있으면, 만 개의 서로 다른 욕망이 있는 법!
게다가 가진 자들의 욕망은 더더욱 다양하리라.
그들은 내 건축물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집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다.
‘선택의 기회가 많은 곳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지.’
너만의 집을 만들어 주겠다는데, 싫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스스로 인테리어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런 집은 가져갈 수 없지!’
보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설계의 백미는 바로 객실이야! 나만의 집을 가진다! 남들과 같은 게 아니라.”
“네가 여기에 얼마나 신경 쓰는지는 잘 알지.”
“그래서 너희들을 불러 모은 거야. 지금까지 없던 신개념 주택을 만들기 위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말을 이었다.
“보람이 네가 원하는 건, 후배들과 처음부터 같이 작업하는 거지?”
“훨씬 시간이 절약될 거고, 능률도 오를걸.!”
“맞는 말인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
무엇이든 맞춰주겠다는 표정의 보람이 물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객실 간의 서로 다른 분위기를 잘 살리는 게 관건이라고.”
“그것도 알고 있어. 노력할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설계자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되어야 해.”
“그건 나도 알지. 네가 항상 하는 말이니까.”
하지만 아는 것과 그걸 실행하는 것은 엄연하게 다른 일이다.
또한, 그 ‘아는 것’은 때로는 상대에 따라 다르게 반영되기도 한다.
‘아직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단 하나였다.
설계자의 의도에 따라 네 전문적인 지식을 적용해 달라.
보람이 내 말에 무조건 수긍하는 이유는 지금의 작업 진행의 답답함을 해소하는 것.
그래서는 내 의도와 빗나가는 설계가 될 터.
후배들을 보람과 일대일로 붙여놓으면, 누가 설계의 메인이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주객전도 되는 건 단 십 분도 안 걸릴 테니까.
‘말보다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는 게 좋겠네!
나는 보람과 언쟁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보람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왜 바꾼 거냐?”
내 물음에 보람이 도면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어디?”
내 손가락을 확인하고는 되물었다.
“이거? 벽난로?”
“응.”
벽난로에서 전기 벽난로로 변경되어 있었다.
많은 가구 명칭 중에서 ‘전기’ 두 글자가 첨가된 것뿐이었지만, 내 눈에는 크게 보였다.
보람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되물었다.
“이거 호텔식 아파트야. 어떻게 정말로 불 때는 벽난로를 쓰냐? 화재 위험이 있다고.”
“그래서 전기식으로 바꾼 거냐?”
왜 그랬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보람의 입장에서는 그게 지극한 상식이리라.
전문가가 우위에 서는 것.
이게 일반적인 상식의 한계!
어깨를 으쓱한 보람이 답했다.
“당연하잖아. 오해는 하지 마. 전기난로도 요즘은 품질이 좋아서 벽난로 분위기는 확실하게 낼 수 있어. 훌륭한 대체품이라고!”
팔짱을 끼며 보람에게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냐?”
고개를 갸웃한 보람이 말했다.
“상식이잖아. 주영이 얘가 몰라서 이렇게 한 거겠지.”
그의 말처럼 어쩌면 상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은 전혀 달랐다.
“주영이는 안락함을 목적으로 이 난로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고. 안 그러냐?”
보람이 반박했다.
“생각해 보라고. 무슨 아파트에서 장작을 때고 앉았냐? 굴뚝은 어떡하고? 게다가 거기 모래벌판인데, 장작은 무슨 수로 구하고?”
그의 상식과 내 상식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물론 주영이도 마찬가지일 테고.
차분하게 말했다.
“보람아, 안락함이란 그저 시각과 촉각이 아닌, 온몸으로 느끼는 감각이다. 그렇지 않냐?”
내 의도를 모르는 보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지.”
“네가 말이야. 엄청난 부자라고 치자. 그럼 넌 뭘 쓰겠냐? 화재의 위험 같은 건 모른다 치고 말이야.”
“그건 너무 나가는 거지. 난 상식을 말하는 거라고.”
‘아직 이해를 못 하고 있군. 우리 고객이 어떤 사람들인지.’
“보람아, 눈 감아 봐.”
“응?”
영문을 모르면서도 보람은 눈을 감았다.
“네 앞에서 장작이 타고 있다. 뭐가 떠올라?”
“따뜻함?”
“그것만이 아니지. 지금 앞에서 장작이 타고 있다고, 탁탁 튀는 소리 들리지 않아? 나무 내음도 날 테고.”
“으, 응.”
“불길이 흔들리네. 네 앞으로 온기가 왔다리갔다리 하지? 가끔 숨이 막히기도 하고 말이야.”
타는 장작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와 일산화탄소의 조합, 그 묘한 열기를 감히 디지털 난로가 흉내 낼 수 있을까?
그로 인해 생기는 신체적 변화들.
상기된 얼굴, 반복되는 소리에 편안해지는 기분, 노곤해지며 스르르 잠들어 버리는 몸 등.
가만히 눈을 감은 보람에게 물었다.
“어때? 아무리 뛰어난 전자제품이라 해도 아날로그의 구식 감성을 완벽히 재현한다는 건 무리가 아닐까?”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이제 네가 정말 부자라면? 어떤 걸 선택할래?”
“…….”
한석도 눈을 감고 있었다.
“한석이 너는?”
“저는 장작 때는 벽난로요.”
대체품?
그건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이제 답을 들려줘야 했다.
보람을 혼내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협업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야. 그 대상이 문제지.”
눈을 뜬 보람에게 말했다.
“보람이 네 실력은 인정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너무 차이 난다는 거지. 아마 내 후배들은……. 너희들 말에 한마디도 반박 못 할걸? 안 그러냐, 학생회장?”
제 딴에는 한가락 한다고 깐죽거리던 한석이 아까는 찍소리 못하고 당하지 않았던가?
“네, 아마도 그럴 겁니다.”
한석이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 당연한 거니까.”
한석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선 제압 같은 건 필요도 없을걸? 쟤들 입장에서는 무조건 보람이 네 말이 맞을 테니까.”
보람은 내 의도를 알겠다는 듯 답했다.
“수준을 후배들에게 맞추도록 하지.”
“그걸론 부족해.”
“그럼…… 더 뭐가…….”
“이렇게 물어볼게.”
보람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만약 그게 내가 직접 친 도면이었더라도, 네 마음대로 수정했을까?”
보람의 표정이 움찔하며 굳었다.
“아, 아니.”
“다시 한 번 말하지. 설계자의 의도가 최우선시되어야 해.”
후배를 나로 생각하는 건 무리겠지만, 적어도 한 번은 더 생각하게 될 터!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보람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알았어. 설계자 의도를 최우선으로 하지.”
보람의 약속을 받아내고, 한석에게 말했다.
결정한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그럼 넌 지금 바로 가서 다섯 명씩 조 구성해.”
“조는 왜요? 사람 수도 비슷한데 한 분씩 붙여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녀석의 황당한 바람에 코웃음 쳤다.
“너희가 상전이냐? 선배들이 찾아가서 개인지도 하게?”
“그럼…….”
“열 개 조로 해서, 로테이션 돌릴 거야.”
“로테이션요?”
“전기, 설비, 내장, 기계……. 하여간!”
내가 열거한 것 말고도, 녀석들이 협력해야 할 공종은 수도 없이 많았다.
내 의도를 눈치챈 한석이 배시시 웃음 지었다.
그만큼 경험이 쌓이는 것 아니던가?
“알겠습니다. 그럼 일정은 어떻게?”
“선배들 비는 시간에 일정 끼워 넣어. 바쁜 사람들이니까, 시간 철저하게 지키고.”
“네! 알겠습니다. 선배님!”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녀석에게 말했다.
“뭐하냐? 안 가고?”
“네? 네!”
녀석이 나가기 전,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보람 선배님, 파일 감사합니다.”
허리를 꾸벅 숙이는 한석에게 보람이 손을 휘휘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