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88화
초빙(03)
화상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네, 들어오세요.”
한석이 빼꼼 머리를 들이밀었다.
“선배님, 회의 끝나셨습니까?”
설문지 회의 관련으로 왔으리라.
‘미국 시각으로 아침이면 아직 시간이 있지?’
“들어와라. 도면은 잘 전달했고?”
“네, 오전에 박람회 팀에 넘겼습니다.”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보람이가 그냥 알았다고 할 리가 없는데?’
“줘 봐.”
한석이 들고 있던 도면을 내밀었다.
쓱 보고는 한석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대로 갖다 준 거냐?”
“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당당한 표정.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한석에게 물었다.
“보람이는 없었던 모양이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답이 나왔다.
“네. 안 계셔서, 부하 직원에게 넘겼습니다.”
그럼 그렇지.
보람에게 깨졌으면 저렇게 웃고 있을 리도 없고!
“흠. 그래서 보람이는 못 보고 왔다?”
녀석이 건들거리며, 옷깃을 세웠다.
“훗! 보람 선배가 봐도, 할 말은 없을 겁니다. 제가 봐도 완벽한 도면이었는데!”
“오! 대단한 자신감!”
“저만 믿으시라니까요.”
“언제 갖다 줬는데?”
“출근 시간에 맞춰서 갖다 드렸죠.”
“보람이는 언제 온다디?”
“점심 전에는 온다고 했습니다. 지금 두시니까…….”
“흠. 그러냐?”
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쯤 올 때가 됐는데…….”
“누가 말입니까?”
“누구긴. 보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야! 팀장!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
들어오기 무섭게, 대뜸 보람이 따지고 들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의 그에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
보람이 콧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지금 이걸 만들라는 건 둘째 치고…….”
말하던 중간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걸 지금 도면이라고……. 어떤 놈이 그린 거냐?”
한심하다는 보람의 말에 한석이 반박했다.
자신했던 도면인데 타박을 받으니 당연한 이치.
“도면이 어째서 말입니까?”
보람이 나를 보며 한석에게 눈짓했다.
‘누구냐?’
한석이야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지만, 보람의 입장에서는 3년 전에 잠시 본 것뿐이니, 기억할 리가 만무했다.
한석이 얼른 나서며 말했다.
“저 한석입니다. 예전에 서울에서 졸업 작품전 할 때 뵀습니다. 그때 군복 입고 있던…….”
“아! 그때! 한석이구나. 오랜만이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네가 반박하는 거냐?”
무슨 상관이냐는 의미였다.
“제가 도면 제출한 겁니다. 그건 저희 과 친구들 도면이구요.”
그의 말에 내가 설명을 덧붙였다.
“한석이 얘, 지금은 우리 과 학생회장이다.”
“아! 맞다. 팀장 후배였지. 깐죽대다가 맞던…….”
한석은 불쾌한 듯 말을 끊으며, 다시 물었다.
“그렇습니다. 선배님! 도면이 뭐가 문제인지나 말씀해 주시죠.”
보람은 찝찌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가 그린 거였냐? 이 도면?”
“네!”
“어쩐지…….”
보람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석은 오히려 더 기분이 나빠진 모양.
꾹 다문 입술로 심기 불편함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다고 진작 말을 하지. 난 또 다른 팀 신입인 줄 알고 작살을 내놓으려고 했더니. 쩝.”
한석의 표정이 더욱 굳어갔다.
‘대체 얼마나 마음에 안 들었으면 작살까지 말하는 거냐?’ 하는 표정.
나름 한가락 하는 녀석들의 수장.
꾹 참던 한석이 결국 입을 열었다.
“보람 선배, 말씀이 심하십니다. 그럼 신입이 아니라서 작살 내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보람이 눈짓으로 물었다.
‘팀장, 이거 어떡하냐? 한 번 조져 봐?’
그의 난감한 표정에 눈썹을 으쓱하며 대꾸했다.
‘한판 하자는데, 무시하면 예의가 아니지.’
내 눈짓을 이해했는지, 보람이 미간을 좁혔다.
‘실전 모드로?’
어이쿠! 이 친구야! 진짜로 해서 되겠어?
프로에게 내상을 당하면, 그 상처는 오래간다.
‘써먹기도 전에 망가뜨릴 셈이냐?’
눈을 부라리며 보람을 얼렀다.
‘적당히 해라! 내 일에 지장 가지 않게끔.’
내 어정쩡한 허락에 보람은 뻘쭘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하긴. 그래도 우리 성훈이, 아니, 팀장님의 귀여운 후배들인데, 내가 어떻게 그러겠냐?”
우리 둘의 의견 교환을 알 리 없는 한석이 심통을 부렸다.
“보람 선배! 제가 선배님 후배란 게 이 건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선배님이란 존칭까지 생략하고 있었는데도, 한석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흥분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 그리 중요하랴.
한석이 투덜거리면 말을 이었다.
“KT 신입으로 생각하시고 말씀해 주십쇼!”
보람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한석이 전달한 도면을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어이가 없었으리라.
‘다른 회사도 아니고, KT 신입하고? 당치도 않은 소리를…….’
하나 보람의 입장에서, 어찌 까마득한 후배와 말싸움을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휴, 한석아.”
“네!”
도전적인 한석에게 그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쩝. 도면은 말이야, 약속이야.”
“그런 건 저도 압니다, 선배.”
“네가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알아들어야 한다고.”
“당연하죠.”
안다는 데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보람은 자신이 들고 온 도면을 책상에 올렸다.
그리고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냐?”
깔끔하게 정리된 도면.
‘새로 그린 도면이군.’
한석에게 받은 것에 비해, 불필요한 선들은 정리되고, 꼭 필요한 항목만이 나열되어 있었다.
아까의 도면이 잡다한 설명과 장식으로 눈이 어지러웠다면, 지금은 눈에 쏙쏙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전문가가 아니라도, 이렇게 느낄 것이다.
‘도면에서 빛이 나네?’
한석이라고 그걸 모르랴!
보는 순간 녀석의 얼굴이 굳었으니까.
보람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니들끼리만 알아보면 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 관련자 누가 봐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어야 하는 거라고.”
보람은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보여주고 깨닫게 할 따름이었다.
삼 년 전 보람의 모습만 기억하고 만만하게 여기던 한석에게는 이런 상황이 충격이었던 모양!
뻣뻣하게 들고 있던 녀석의 고개가 한층 수그러졌다.
그 둘을 보며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실력 차이란 이런 거지.’
진정한 실력자는 말을 앞세우지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
한석이 뻘쭘하게 웃으며 물었다.
“아까 제가 드린 도면하고 다른데요? 완전히!”
내 앞에 놓인 도면을 힐끗 보며 하는 말이었다.
“당연하지!”
보람이 입술을 쭈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 도면 보고 처음부터 새로 그렸다.”
“엥! 그러실 거면, 원본 파일을 달라고 하시지.”
미안한 표정의 한석에게 보람은 기가 찬다는 듯 혀를 찼다.
“그거 보고 뭘 하라고? 레이어 다 찾아서 늘리고 줄이라고? 돌았냐?”
책상의 도면을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그럼 하루 꼬박 새워도 이거 못 그린다. 그냥 새로 그리는 게 더 빨라.”
동기들이 애써 그린 도면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말!
하지만 이번에는 한석이 대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석은 급 공손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아냐. 학생들한테 이런 걸 바라는 건 무리지.”
순간 한석이 움찔했지만, 다시 공손하게 물었다.
“그런데……. 선배님.”
“응? 왜?”
돌아보던 보람이 옆으로 스윽 비켜섰다.
“왜 이래? 징그럽게. 저리 안 가, 자식아!”
손 비비며 다가서는 한석을 향해 삿대질했다.
“야! 거기 서서 말로 해!”
“킁!”
접근을 저지당하자 못내 아쉬운 듯, 한석은 콧방귀를 끼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겁니까?”
“엥? 그걸 몰라?”
한석이 쑥스러움에 헛기침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큼! 수준이 다르다는 건 알겠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 과정을 모른다는 말.
‘훗! 인정은 빠르네.’
콧잔등을 찡그린 보람이 타박하고 있었다.
“야…… 이거 우리 과 신입이면 대가리부터 심어놓고 시작하겠는데, 그럴 수도 없고. 원 참!”
그러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는 듯, 보람이 말을 이었다.
“안 보이냐? 눈은 놔두고 뭐해? 선 굵기 다 다른 거 안 보여?”
도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0.1㎜, 0.01㎜의 미세한 차이일지라도, 도면에는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건 저도 보입니다. 눈 있으니까.”
“용도에 따라서 적절하게 구분해서 써야지. 막무가내로 선 설정만 한다고 도면이 정리되는 게 아니야.”
보람이 선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콘크리트 벽의 외곽선은 0.2㎜, 미장 마감선은 0.03㎜, 중심선은 0.1㎜ 일점쇄선…….”
한석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으흠! 그런 식으로 정리하셨구나.”
“적어도 이 도면을 보는 사람이 우리란 걸 알았다면, 우리에게 맞췄어야지. 그게 대화 아니냐? 독일인한테 중국어 쓴다고 통하냐고?”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선배님.”
거듭 사과하는데, 보람이라고 더 말할 수 있으랴.
톤을 낮추며, 설명을 이어갔다.
“도면 정리하기 전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 물어봤어야지. 안 그러냐?”
보람이 한석의 도면을 가리켰다.
“특히 이 지시선, 너희 딴에는 친절하게 설명하려 했다는 건 알겠는데 지저분하다고. 아무 데나 마구 남발하지 말고, 특별히 상대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우측 상단에 넘버 별로 정리. 폰트는 깔끔하고 눈에 잘 띄게 맑은 고딕체로!”
“네. 알겠습니다.”
“이게 약속이란 거야. 어, 왜?”
한석이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존경의 시선으로 엄지를 세워 들었다.
“와! 선배님. 대단하십니다. 확실히 그렇게 들어가니까 도면 느낌이 팍 사네요!”
“훗. 당연하지.”
“역시! 선붸…….”
채 말이 끝나기 전에 보람이 말을 이었다.
“내가 이거 때문에 성훈이한테 얼마나 갈굼 당했는지 알아?”
한석이 콧잔등을 찌그러뜨렸다.
“엑! 보람 선배가 만드신 거 아니었어요?”
“일일이 배워서 만든 거니까, 성훈이가 만든 거나 진배…. 어쭈! 요 녀석 봐라! 대번 눈빛이 바뀌는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석이 그에게 다가갔다.
“잠시만요. 보람 선배.”
“어! 왜? 저리 안 가?”
보람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지만, 한석은 재빨리 따라붙었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도면 파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CTB 파일도.”
CTB 파일이란, 프린터에 출력할 때 선을 어떻게 출력할 것인지, 그 색상과 굵기, 종류 등을 설정해둔 파일을 말한다.
적어도 그게 있으면, KT 팀과의 정상적인 교류는 가능하리라.
그래도 도면 기법은 좀 더 가다듬어야겠지만.
‘그게 무슨 기밀도 아니고.’
보람도 그에 화답하듯 작은 소리로 응했다.
“직접 얘기해. 자식아! 성훈이한테.”
‘그렇지! 녀석! 나한테 달라고 하면 될…….’
내 귀로 녀석의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아시잖습니까? 우리 선배님 발 버릇 안 좋은 거.”
그 말에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등 돌린 녀석에게는 안 보이겠지만!
‘저게 아주……. 뭐! 발 버릇?’
내 표정을 봤는지, 보람이 눈썹을 으쓱했다.
‘성훈아. 이렇게 말하는데? 줄까?’
그의 물음에 한숨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휴. 그래. 줘라. 잘해보겠다는데.’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어느 회사나 다 자신들만의 플롯 형식이 있다.
보기 좋은 도면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엄연한 수준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보람이 선심 쓰듯 말했다.
“이따 시간 날 때, 우리 과에 들러.”
한석이 싱글벙글하며 허리를 넙죽 숙였다.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보람에게 물었다.
“단지 이거 때문에 온 건 아닐 테고.”
도면 정리는 기본 중의 기본!
캐드 사용자라면 약간만 적응하면 되는 일.
보람이 당연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쩝. 뭐 이건, 말 나온 김에 하는 거고!”
보람이 한석을 힐끗거렸다.
‘쟤 있는 데서 말해도 되냐?’는 거겠지.
“우리 애들 관련된 거냐?”
보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말해, 어차피 녀석이 대표니까, 전달도 이 녀석이 할 거고.”
“이번에 진행하는 콜라보 방식 때문에 말이야.”
“그게 왜? 애들 직접 만나지 말라고 한 거?”
“그렇지.”
보람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