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87화
초빙(02)
이제 이 손안의 터무니없는 생각을 꿰어 보물로 만들 시간이었다.
단상으로 걸어가 마이크를 들었다.
“김성훈입니다. KT 팀에 후배님들을 모시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후배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저희가 영광입니다. 선배님!”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선배님!”
“꼭 입사하고 싶습니다. 선배님!”
각자 저마다의 소리로 힘차게 답사를 했다.
50명 남짓한 그들을 보며 말했다.
“반가운 후배들을 만났으니…….”
초롱초롱한 그들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존칭은 생략하겠다.”
녀석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선배님.”
인사는 끝났다.
설문지를 뒤적이며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예!”
몇 장 넘기지 않아, 손이 멈췄다.
“벙커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 사람!”
한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접니다. 선배님. 98학번 이주영입니다.”
그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반갑다. 벙커를 만들고 싶은 이유는?”
자신이 첫 타자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 한 모습.
살짝 긴장한 모습으로 답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써내라고 하셨습니다. 구조적인 건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훗! 그랬지.’
일단 녀석이 원하는 것이 뭔지를 알아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말로 설명하라는 건 아니었지.’
피식 웃으며 녀석에게 물었다.
“밀덕(밀리터리 덕후)이냐?”
정곡을 찔렀던 것인가?
녀석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덕후라는 게 부끄러울 일은 아니겠지만, 덕후가 스스로 덕후라고 하던가?
말문이 막힌 이주영의 옆에 있던 녀석이 킥킥거리며 말했다.
“맞습니다. 선배님, 이 녀석 완전 덕후입니다.”
이주영이 인상을 쓰면서 그를 발로 툭 찼다.
“이 새끼. 감히 덕후라니…… 애호가거든!”
하지만 친구 사이에 그런 협박이 통할 리 있나?
되레 놀릴 기회를 잡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 자식. 탱크 몰고 싶어서 빽으로 기갑부대 간 또라이입니다. 얘네 외삼촌이 군단장이시거든요.”
한석이 옆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도, 서슴지 않고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쾌활한 녀석이네.’
나도 딱딱한 분위기보다는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를 원했었고.
그사이 이주영은 옆자리 녀석의 관자놀이에 니킥을 날리고 있었다.
“윽!”
“자주포 몰았거든! 새끼야, 조또 모르는 게!”
하지만 더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지는 것도 좋지 않다.
딱 필요한 만큼만 부드럽게.
“주목!”
장내가 조용해지는 걸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자주포 모느라 고생 많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벙커를 생각한 거냐?”
“돈 많은 사람이 살 거 아닙니까? 그리고 선배님 콘셉트대로라면, 산으로 이사 가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닙니까?”
“그렇지!”
하긴 어디를 가든 그건 집주인 마음 아닌가?
내 수긍에 힘이 붙은 듯, 제 의견을 말했다.
“그러면 침입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가능한 이야기지.”
“그럼 지켜야지요. 그건 권리 아닙니까?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벙커를 고안한 겁니다.”
제 흥에 겨워 신이 나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거지만, 말이 되지.
집의 가장 큰 목적 중의 하나는 편안한 쉼터다.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좋아! 그럼 어떻게 만들 건가?”
“네? 그냥 쓰라고만…….”
단순한 녀석!
시킨다고 시킨 것만 하냐?
녀석에게 눈썹을 찌그러뜨리며 물었다.
“너 소설 지망생이냐?”
“네?”
“건축가가 글로 말하느냐는 말이다.”
예상 못 한 물음에 당황하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나한테 만들어 달라? 그거야?”
“아, 아니, 그건 절대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벙커와 네가 생각하는 건 다를 거다. 안 그런가?”
“네. 아마 그럴 겁니다.”
“난 네가 상상하는 벙커를 묻고 싶었던 거다. 네 머리에서 만들어 진 벙커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녀석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벙커라는 아이디어는 좋았다.”
“정말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명작을 만들어 낸다.
녀석들이 원하는 것을 조합하다 보면, 사람들이 원하는 궁극적인 집의 형태가 나올지도 모른다.
내가 원한 것이 이런 거니까,
얼굴이 밝아진 그에게 말했다.
“시도해 볼 만하다. 네 녀석이 제대로 된 디자인만 가져온다면…….”
“네, 알겠습니다. 당장.”
“그럼 앉아.”
“네, 선배님.”
이주영이 시시덕거리며 앉더니, 주섬주섬 종이를 모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뒤에 나온 의견은 물에 반쯤 잠긴 집.
복층 구조로, 아래층은 물에 잠기고, 위층은 하늘을 보는 구조였다.
이 의견을 제출한 녀석은 낚시 광이었다.
단지 집 밖으로 바로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이것을 제안한 것이다.
그 뒤로도 이와 비슷한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무 위의 집.
허클베리 핀의 광팬인 녀석의 의견.
어떻게 지을 것인지는 도외시한 상상속의 작품들.
마지막 페이지까지 발표가 끝났다.
아직은 전혀 가공되지 않은 아이디어지만, 이제 녀석들의 손을 거치면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
손에 든 설문지를 정리하며, 후배들에게 말했다.
“좋다. 이걸 제안한 너희들이 그 건물의 장점에 대해서 가장 잘 알 거라 생각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또한, 그 장점을 살리려면 어떤 디테일이 표현되어야 하는지도 누구보다 잘 알겠지?”
당연한 말씀.
녀석들의 눈이 빛났다.
“앞서 말했다시피, 구조적인 부분은 생각하지 마라.”
건축에서 구조란, 건물을 구성하기 위해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 것!
건축 구조는 인간이 존재했던 그 시절부터 발전을 거듭했고, 누적된 기술은 인간에게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를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구조에 너무 얽매이다 보면, 상상력의 한계에 부딪히지.’
지구의 중력을 이기기 위한 것이 구조.
하지만 건축가에게 구조란 양날의 검이 아닐까?
상상하는 것의 대부분은 구조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래서 일부러 구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었다.
녀석들이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창문이 얼마나 커지던, 그래서 창의 경첩이 창 무게를 못 버티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 따위는 하지도 마라. 그냥 그려라.”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머리에서 상상한 것들이 현실로 구현되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요는 시간문제가 아닐까?
과학과 기술은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하며, 어제의 불가능은 오늘의 당연함으로 바뀐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었다.
회의를 마치며, 한석에게 말했다.
“넌 이 녀석들 도면이 정리되는 대로, 박람회 팀에 넘겨라.”
“넘기기만 하면 됩니까? 보람 선배한테요?”
“응. 녀석들이 보고 나면 반응이 있을 거다.”
한석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어이없다고 하지 않을까요?”
‘어이없다고만 할까? 이걸 어떻게 만들라는 거냐며 따지고 들걸!’
생각은 별개로 하고, 한석을 보며 말했다.
“내 후배가 그런 소리 들어서 되겠어? 어떻게 해야 비웃음당하지 않을지 고민해 봐. 또 알아? 너희들이 만든 걸 보고 보람이가 놀래 자빠질지?”
내 격려에 한석은 의욕을 불태웠다.
“염려하지 마십쇼! 선배님의 이름에 절대!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훗, 녀석!’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힘내. 좋은 경험이 될 거다.”
한석에게든, 박람회 팀에게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경험이!
다른 누군가에겐 인내심의 끝을 확인하는 경험이.
***
“라스베가스 현장은 공기에 차질 없겠습니까?”
“아! 귄터와 대목장 어르신이 빠진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수인계가 잘된 모양이죠?”
“네. 덕분에 민수가 좀 바빠졌습니다만, 그래도 마감까지는 무리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이봐! 박 과장! 민수 좀 적당히 부려 먹어! 우리 일도 봐줘야 하는데, 거기서 오버 워크 해버리면, 여기 와서 퍼질 거 아냐?”
“그럼 거기서 좀 쉬게 하던가? 우리는 현장이 빡빡해서 안 돼. 정 할 말 있으면 대목장 어르신한테 직접 말씀드리던가!”
각 현장의 전통 건축 인테리어를 총괄하는 대목장의 이야기가 나오자, 천 과장은 투덜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 시간 안 늦게 보내줘. 모스크바 호텔 사장이 몸 달았다고.”
“결국, 빅토르 집에 인테리어 해 주기로 얘기된 거냐?”
“어쩌겠어? 안 해 주면 호텔 공사 안 주겠다는데! 대신에 호텔 인테리어 통째로 다 먹었으면 남는 장사지, 뭐! 그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팀장님?”
이미 보고받은 사항이지만, 다시 들어도 뿌듯했다.
‘현장에서 바로 영업을 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단 증거라고.’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유라시아 지부장께서 저한테 그런 걸 물으시면 안 되죠. 그 정도는 재량껏 하십쇼?”
각 현장의 인원 배치에 대해서는 내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각 교두간의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최 과장, 유라시아권은 방금 천 과장, 미주대륙은 박 과장, 유럽은 심 과장이 각각 맡아서 현장을 돌리고 있었다.
내가 하는 거라고는 전체적인 총괄과 급해진 현장의 지원 정도랄까?
‘좋아.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군.’
회의를 마칠 시간이었다.
“그럼 이걸로…….”
“아 참! 팀장님.”
박 과장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압둘 왕자 좀 어떻게 해주시면 안 됩니까?”
‘응? 미국에서 갑자기 압둘이 나와?’
의아해하자 그가 설명을 이었다.
“아까 저녁에 압둘 왕자가 절 찾아왔습니다.”
“왜요?”
“미국 순방 중인데, 잠시 들렀다고요.”
“아! 맞다. 그랬지. 그런데요?”
압둘이 그를 곤란하게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박 과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씹으셨다던데요?”
“훗! 귀찮은 전화가 몇 통 오기는 했죠.”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박 과장이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셨기에, 그 양반이 공모전 때문에 그리 안달을 낸답니까?”
“글쎄요? 별말은 안 했습니다만.”
맘에 들면 인센티브를 더 달라는 말밖에 더했나?
“하여간 내일 아침에도 같이 식사하자고 조르는데, 공모전 얘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아는 것도 없는데, 영 불편합니다.”
투덜대는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왜요? 만들어 두면 도움이 되는 인맥인데. 대하기도 편하고.”
“대하기가 편해요?”
그가 콧방귀 끼며 말을 이었다.
“팀장님한테나 그렇지. 전 압둘 왕자 그 양반, 영…….”
“왜요?”
“깍쟁이기도 하고, 하여간 전 싫습니다. 그래도 차기 왕인데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이제 압둘도 충분히 뜸이 들었겠지. 저렇게 안달을 낼 정도면 말이야.’
대놓고 인상 찌푸리는 그를 안심시켰다.
“알겠습니다. 제가 이따 전화할 테니까, 그 스케줄은 없는 걸로 여기시면 됩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팀장님, 아우. 그 양반, 어찌나 집요하게 묻던지, 진땀을 뺐습니다. 하하하.”
큰 걱정을 놓은 듯, 그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다른 분들은 더 하실 말씀 없으세요?”
“네! 끝났습니다.”
“그럼 각 현장 간의 인원 이동은 과장님들이 협의하시고,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미리 연락 주세요.”
“알겠습니다. 팀장님.”
모니터에서 팀장들의 얼굴이 하나씩 사라졌다.
의자를 뒤로 젖히며, 시선을 천장으로 향했다.
‘이제 입주자 대표하고 통화를 해봐야 할 시간인가?’
며칠 전 압둘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는 건축물의 확실한 모양이 나오지 않아서,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었다.
‘이미지가 확실하지 않으면, 말하기 곤란하다고.’
압둘에게는 그 이미지조차 없을 터!
이제는 내 쪽으로 잘 끌어오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압둘이 완성 전에 또 전화를 해대기에, 그때는 아예 착신 거부를 했었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굴렸다.
‘현재 사장단에게는 감성팔이가 먹혔는데, 압둘에게도 먹힐까?’
일단 해 보고, 안 되면 다음 수를 쓰면 될 터.
‘세계 최초, 유목민, 뻗어 가는 미래…….’
압둘이 혹할 만한 단어를 머릿속으로 나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