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축의 신-383화 (383/427)

건축의 신 383화

브리핑(04)

그는 성훈에게 말을 이었다.

“확실히! 설계는 파격적이네만, 압둘은 이걸 어떻게 볼까?”

성훈은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역시 묵은 생강이 맵군.’

예상하던 첫 번째 관문!

솔직히!

돈 냄새에 취해서, ‘왜’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칫! 스리슬쩍 넘어갔으면, 그다음은 식은 죽 먹기였는데.’

욕망에 눈먼 자들 다루는 건, 일 축에도 못 낀다.

허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들을 이해시키지 못하면 어떤 지원도 기대할 수 없으리라.

물론!

압둘을 이해시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고!

회장도 같은 마음이었던지, 아까의 감탄한 표정을 지우고는 매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얼른 대답해 보라는 듯이!

성훈이 쓴웃음을 지었다.

‘쩝. 사실 이게 제일 자신 없었는데.’

솔직한 마음을 말하자면, 건물의 움직임과 돈 냄새를 맡고 눈이 돌아가기를 바랐다.

기존의 관념을 깬다는 것이 말이 쉽지, 쉬울 리가 있나?

‘그래도 일단 관문은 넘어야겠지?’

***

몇 년 전이었더라?

도산건축소장이 말했었지.

그날 시청 공모전을 수상하고는 기분이 좋았던지, 자신만의 ‘고객 응대법’에 대해서 썰을 푼 적이 있었다.

막걸리를 양푼으로 들이키면서 말이다.

“성훈아. 공포나 힘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거는 하책 중에서도 하책이다.”

자신을 뿌듯하게 여기며 내뱉는 말에 옳다구나 맞장구쳤었지.

내가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소장은 담당자들을 잘 구워삶았거든.

그 비법을 알고 싶었지.

“그럼요? 중책, 상책은요?”

그는 잔뜩 거드름 피우며 말했었다.

“이익으로 당기는 게 중책이고, 감동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최고란 말이지!”

그때 성훈은 웃으며 대꾸했었다.

“감동이요?”

이 어인 뜬금없는 감동인가?

틈만 보이면 약점 잡기 바쁜 사람이!

“그 사람의 가슴을 아련하게 만드는 뭔가를 떠올리게 하라는 말이지.”

“예를 들면요?”

고개를 갸웃하던 그가 말을 이었다.

“흠. 첫사랑이라던가……. 아니면 어릴 적 추억…….”

취중이라 더는 생각이 안 떠오르는지, 손을 휘휘 저으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그런 거 있잖아? 너도 그런 거 있을 거 아니냐?”

그때 배시시 웃으며 결론을 내렸었다.

“쉽게 말하면, 감성팔이네요?”

“예끼. 이 친구야! 없어 보이게, 감성팔이라니! 고객에게 감동을 주란 말이다. 그럼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야.”

동양고전 어딘가에서 인용한 거겠지만, 당시의 내게는 작은 깨달음이었고, 그의 말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었다.

이런 곳에서 써먹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었지만.

***

사장들의 눈이 성훈을 주시하고 있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그들의 눈동자는 욕심으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하긴 이 상황에서 건물의 컨셉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있어?’

다른 설명은 필요 없었다.

이 정도까지 보여줬는데, 돈 냄새를 못 맡는다면 진작 회사를 접었을 사람들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성훈은 말을 시작했었다.

“일단 이 프로젝트의 대략적인 핵심이 뭔지 이해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움직이는 것!

눈 달린 사람인데, 그걸 모를 리 있으랴?

회의장에는 조용한 정적만이 흘렀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저는 집이란 한 사람의 평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추억을 묻혀가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죠.”

일례로, 대다수의 한국인은 집 한 채를 마련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땀을 흘린다.

그러므로 한 개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

차분한 목소리로 성훈이 말을 이었다.

“태어나서는 손때를 묻히고,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집을 가꾸죠. 소중한 가족들의 추억이 스며있는 곳이니까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상적인 집을 꿈꾼다.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품을, 어떤 이는 외부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편하게 몸을 누일 수 있는 곳.

사람에 따라 이미지는 다를 수 있지만, 공통적인 사실은 자신만의 집을 원한다는 것이다.

성훈의 말에 동의하는지,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표했다.“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으로부터 그 공간을 떠나보냅니다.”

“분가, 혹은 경제적 이유로, 그도 아니라면 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겠죠.”

“과연 떠나고 싶었을까요?”

무책임하게 살면서 인생이 망가진 사람이야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나,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은?

성훈이 물었다.

“여러분은요? 자신만이 간직한 추억과 이별하고 싶습니까?”

물어 무엇하랴!

할 수만 있다면, 함께 있고 싶지 않을까?

성훈의 질문이 이어졌다.

“블록 담벼락을 아십니까?”

그 말에 사장들의 입가에는 피식 조소가 피어올랐다.

‘훗. 그걸 모를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 되물었다.

“자네는 아나?”

지금은 시골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옛것이었다.

성훈이 단상에서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가운데, 스크린만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영상은 이미 끝나고, 아무 내용 없는 하얀 화면에 성훈의 그림자만이 주인을 흉내 낸다.

성훈의 구릿빛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당연하죠. 제 어린 시절 좋은 친구였습니다. 스티로폼을 갈아서 눈을 만들기도 하고, 낙서도 많이 했었죠.”

사장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때때로 오래된 기억은 강렬한 감정의 폭풍을 일으킨다.

불현듯 떠오른 아련한 옛일은 가슴을 옥죄기도 하고,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걸 사람들은 ‘추억’이라 부른다.

지금이야 돈만 추구하는 수전노라 불리는 사장들이지만, 이들의 젊은 시절조차 그리 메말랐으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얄개시대’를 따라 한답시고, 담벼락이나 뒷동산 그루터기에 ‘철수 ♡ 영희’를 새기는 장난 한번 안 쳐봤을까?

처음부터 돈만 밝히는 냉혈한이었을까?

반응으로 보아,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훈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듯 슬며시 눈을 감으며 팔을 천천히 올렸다.

“특히 그 블록의 거친 감촉은…….”

그리고 옆으로 걸으며 손끝으로 허공을 훑었다.

존재할 리 없는 벽을 만지듯이.

쓰윽!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성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던 그 담벼락을 쓰다듬었다.

성훈을 지켜보던 건설사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녀석이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는 거지?’

하지만 그 행동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던 모양!

사장단 중 몇몇은 이미 눈을 감고 성훈과 동조하고 있었다.

사장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상관이야? 납득만 시키면 되는 거지.’

지켜보면 될 일, 건설 사장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음유시인이라도 된 마냥, 그들과 파장이 맞을 만한 추억을 열거하던 성훈은, 한쪽 눈을 슬며시 떴다.

성훈의 말이 끝났음이 느껴지자, 팔짱을 낀 채 자신만의 추억을 되새기던 사장들이 하나둘 눈을 떴다.

성훈은 사장들과 무심한 듯 눈을 맞췄다.

‘흠. 이제 거의 다 넘어온 것 같은데…….’

아까처럼 이글대기는커녕, 오히려 아련한 기억이 떠올랐음인가? 주름진 눈가가 촉촉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다들 그런 추억들 몇 개는 있는 법이지.’

태양은 나그네의 털옷을 벗겨내지만, 추억은 얼음처럼 차가운 냉혈한의 경계심을 무장 해제시킨다.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감성팔이가 최고군! 더 연기할 필요는 없겠지?’

물론 성훈도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전략이 반드시 압둘에게 먹힌다고는 말이다.

대상이 다르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감정에 호소한 것뿐이니까.

게다가 모든 사람이 집을 옮기는 수고보다 추억으로 얻는 게 더 크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먹고 살기 바쁜 대다수 사람에게는 추억을 떠올릴 시간조차 허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존이라는 대명제 앞에서는 대단히 사치스러운 감정이겠지.

하지만 그 대상이 압둘이라면?

그처럼 소중한 것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카미’라는 늙은 낙타가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존재이며, 그가 ‘카미’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떠올려본다면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는 전쟁과 내란이라는 투쟁을 거치며, 수많은 추억을 상실하며 살아왔다.

그런 삶을 살았던 압둘에게 ‘카미’는 단순한 애완동물이 아니라, 자신의 젊은 시절이 모두 축적된 추억의 집약체이리라.

아마 ‘카미’를 보면서 죽은 형제와 전우의 얼굴을 떠올리고 추도할 것이며, 전쟁에 승리한 그때의 성취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혹은 다시는 빼앗기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할 수도 있지.

그러나 만약 ‘카미’라는 매개체가 없다면?

그게 과연 가능할까?

되새기지 않는 기억이란, 물잔에 떨어진 레드 와인 한 방울과 같다.

서서히 기억 속에서 흐려지다, 이내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그걸 알기에 압둘은 ‘카미’를 애지중지하는 것이지.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다시는 치욕당하지 않으려!’

하지만 압둘이라는 인간을 이들에게 모두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강철의 군주’를 코스프레 중인 압둘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고 말이다.

겉으로 보이는 압둘은 철저한 장사꾼이었다.

서서히 눈가의 물기가 사라지고, 다시 눈빛이 살아나고 있었다.

그들의 눈이 묻고 있었다.

‘그래서 압둘은 설득할 계획은 뭔데?’

이 사람들의 관심사는 딱 두 가지일 것이다.

‘당연히 설계는 아닐 거고!’

이 프로젝트를 압둘이 받아줄 것이냐? 그리고 이 일을 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

이익은 눈에 보이지만, 압둘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염려를 하는 거겠지.

자신들의 납득이 압둘의 합격점을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

‘그저 예행연습에 불과했지.’

허나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이제 이들이 원하는 답을 줄 시간이었다.

‘이들의 바람은 압둘을 납득시킬 수 있다는 확신!’

성훈이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압둘과 요 몇 년간 각별한 관계였습니다.”

그 말에 사장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

쿠웨이트의 다음 왕, 압둘과 친한 사람을 꼽으라면, 그 첫 번째 손가락은 성훈이었다.

그의 가족들을 제치고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들도 그런 관계가 되고 싶을 정도로.

“인연의 시작은 오래전이었지만, 가장 최근은 작년의 공사였군요. 거의 6개월 정도 쿠웨이트에 머물렀던 적이 있죠.”

성훈의 움직임을 어찌 모르랴! 모두의 관심 대상인데.

이 중에 성훈이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성훈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훈이 말을 이었다.

“그는 쿠웨이트가 주변 인접국에 비해 역사가 짧은 데다, 대표할 무언가가 없다는 것에 심히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사장들도 수긍의 눈빛을 보냈다.

쿠웨이트는 작은 나라, 경상북도보다 면적이 좁고, 인구는 300만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 소국에서 석유가 나오니, 얼마나 다른 나라에게 군침이 흐르는 대상이었으랴?

그 탓일까?

적대감정을 가진 옆 나라 이라크로부터 1990년에 침공을 당한 적도 있었다.

어떤 명분의 침공이었다 해도, 석유 때문이라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터!

건설사장이 대표로 물었다.

“그런 갈증이 이번 공모전의 이유라는 거군.”

성훈이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흠. 자네 추측 아닌가?”

“맞습니다. 하지만 거의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죠.”

사장은 턱에 주름을 만들었다.

“하긴. 여기 자네만큼 압둘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없이 웃는 성훈에게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압둘을 설득시킬 근거로는 약하지 않나?”

“이 두 가지는 확실합니다.”

“뭔가?”

“첫째. 그는 쿠웨이트가 최초인 것을 찾고 있습니다.”

“흠…….”

“지나간 역사로 인접국을 이길 수 없으면, 세계 최초의 타이틀을 갖는 것도 괜찮은 대안이죠.”

“그렇겠군.”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공모전 주제로 ‘세계 최초의 건축물!’이라고 적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압둘이 갈증을 이해하는 성훈이었다.

‘쉽게 말해 자랑거리를 만들고 싶은 거죠.’

다른 나라가 우습게 볼 수 없는 상징을.

단지 산유국이며 돈이 많다는 사실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은 압둘은 알고 있었다.

‘그건 천혜의 혜택이지. 압둘이 원하는 건 자기 민족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그 원천이 기름이든 돈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능력으로 뭔가를 만들었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쿠웨이트의 기반, 역사, 전통이 생겨난다.

그게 압둘의 믿음이었다.

확신을 가지고, 사장들과 시선을 부딪쳤다.

‘난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지. 그리고 난 승산 없는 싸움에 뛰어들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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