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81화
브리핑(02)
“준비는 다 됐냐? 지금 들어오셨다는데.”
한 교수의 물음에 성훈이 자료들을 점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끝났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회장님도 계시니까.”
염려의 말에 성훈이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 안 합니다. 안 되면 다른 방법 찾으면 되죠. 굳이 꼭 현재 계열사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긴장할 수도 있다고 염려했었는데, 성훈은 의외로 대범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좋은 웃음이 나오기는 어려우리라.
허나 걱정했던 게 무안할 정도로 대수롭지 않은 듯한 성훈의 대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미 다른 대안이 나온 거겠지.’
“그래. 사장들도 함부로 경거망동하지는 않을 거다.”
한 교수가 성훈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정 거슬리면, 회장님이랑 건설사장 보면서 해.”
그의 염려에 성훈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교수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익숙한 얼굴들이 브리핑실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건설사장이 회장과 사장단을 안내하며 자리로 인도하고 있었다.
불퉁한 얼굴들로 보아, 회장에게 끌려온 것이 분명했다. 코뚜레 꿰인 소처럼.
안내받은 맨 앞 책상에서 철제 의자를 당겨 앉으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사판 인부들 불렀어? 의자가 이게 뭐야?”
유치한 투덜거림에 중공업 사장이 그를 타박했다.
“막내! 대접받으러 왔냐? 어린애도 아니고!”
“아버지도 계시는데. 이건…….”
이어지는 불평에 중공업 사장이 인상을 쓰며 끓는 소리를 냈다.
“어허! 아버지 들으시겠다. 간만에 기분 좋으신데, 분위기 망치지 마라.”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이사들도 있는데, 흰소리하지 말고. 일 이야기만 하라고! 알았어?”
“그래도 형님. 우리가 KT 꼬붕도 아니고. 너무 눈치…….”
“쓰읍! 그만하래도.”
성훈이 방문자들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바쁘신 와중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접었던 허리를 들고 곧바로 스크린을 켰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스크린에 집중해 주십시오.”
회장이 도면을 뒤적거리자, 성훈이 말했다.
“브리핑 후, 설명이 미흡하다고 판단되실 때, 책상 위 도면을 참고하시면 좋으실 것 같습니다.”
회장이 머쓱한 표정으로 도면을 놓았고, 사람들의 시선이 스크린으로 향했다.
사장이 성훈에게 비장한 눈빛을 보냈다.
‘어련히 알아서 하리라 믿네만, 그래도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네.’
그의 당부를 듣기라도 했을까? 성훈이 슬쩍 눈웃음쳤다.
그리고 조명이 꺼졌다.
***
거대한 홀.
천장에 달린 거대한 샹들리에.
그리고 앞쪽에 미려한 색감의 대리석 벽이 건설 사장의 눈에 들어왔다.
‘뭐지?’
내부 인테리어부터 보여 줄 생각인가?
‘쩝, 고급스럽긴 하지만 뭐, 이걸로는…… 엇?’
짧은 감상을 떠올리는 사이, 카메라는 스르륵 뒤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유리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아! 일층 로비였구나.’
잠시 눈을 스친 그것은 안내 데스크였던 모양.
이내 매끄럽게 왁싱된 바닥의 화강석이 눈에 들어왔다.
‘현관이로군.’
잠시의 덜컹거림.
‘단이 있는 건가?’
생각도 잠시,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가 눈앞으로 끊임없이 생겨났다.
‘이제 건물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인가?’
한참이나 뒤로 물러났는데도, 아직 건물의 좌우 양쪽 끝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큰 거야?’
변화라고는, 현관문이 점점 작아지는 것과 유리 격자수가 급격히 늘어난다는 것뿐.
뒤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이럴까?
‘뭐야. 등 뒤에 블랙홀이라도 있는 거야?’
으스스 밀려드는 멀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멀미가 날 리가 없잖아.’
그리고 의문.
‘아직도 안 보이네.’
여전히 눈앞을 장악하는 것은 셀 수 없는 유리의 행렬.
일 층이 이 정도 너비라면?
‘도대체 몇 층이야?’
그 속내를 알아채기라도 했을까?
렌즈가 서서히 위로 향했다.
시작은 느긋했지만 이내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은 걸까?
방향 전환에 가속도를 붙였다.
‘허허. 이것 참! 또 유리!’
유리! 유리! 유리!
끝없이 반복되는 유리의 나열.
‘목 꺾이겠다. 담 오는 거 아니야? 엇!’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유리판 위로 투명한 하늘이 반사되어 비친다.
‘훗, 한 폭의 수채화 같네!’
하지만 사막의 열기 때문일까?
쪽빛 하늘에 새겨진 양털은 신기루처럼 일렁거렸다.
‘오!’
실제로 올려다보기라도 한 듯, 사장은 저도 모르고 목덜미를 주물렀다.
계속될 것 같았던 반전의 하늘은 첨예한 유리의 끝에서 실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끝난 건가? 엇!’
수면 위를 가르듯 뒤로 미끄러지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작은 떨림은 사라지고 바람이 지나는 소리가 고막을 스친다.
‘훗. 이륙인가?’
이제 목을 꺾지 않아도 전경이 보일 터.
사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모래냐?’
사이트를 제외한 것은 모두 모래로 설정하기로 작정한 듯.
덕분에 성훈이 만든 세상의 모습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와! 크네.’
이 건물의 웅장한 위용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이 있을까?
‘그리고 늘씬하네.’
한 마디 더 있었군.
어느 정도 날았을까?
사이트가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뒤편으로 바다가 모습을 드러낼 무렵, 카메라는 부드럽게 선회하며 건물의 측면을 비추기 시작했다.
‘어! 저 레일은 뭐지?’
아까는 유리에 압도되어 미처 발견하지 못했지만. 정면에서도 저게 얼핏 보였던 것 같았다.
사장이 미간을 모았다.
‘엘리베이터?’
하지만 덩그러니 레일만 보이니, 정확히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엘리베이터를 굳이 외부에 설치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생각은 잠시, 사장은 다시 전체적인 모습에 신경을 기울였다.
‘흠. 삼각별 평면?’
평면은 단순한 삼각별이지만, 비스듬히 하늘로 향하는 벽선 때문인지, 회오리치는 뿔의 느낌!
게다가 중간중간 평면이 좁아지는 것이, 어찌 보면 일렁거리는 불길 같았다.
‘흠. 저녁때 보면 장관이겠군!’
저 유리들이 붉은 석양을 만나면 어떤 모습일까?
‘응? 저건 뭐지?’
묘한 이질감에 사장은 눈매를 좁혔다.
‘틈새인가?’
유리가 이어지는 부분, 일정한 간격으로 틈이 벌어진 것이 보였다.
목을 앞으로 쭉 빼며, 그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허! 정말인걸?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녀석이 실수를?’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사장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지어졌다.
‘이런 어쭙잖은 실수를 하는 녀석이었다면, 지금까지 KT가 이토록 승승장구할 수가 없었지.’
성훈은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일직선으로 정상을 차지했다. 단 3년 만에.
그리고 사장들을 불러 모은,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실수 따위를 할 녀석이 아니지. 절대!
‘그리고 신소재는 어디에 쓰려고?’
저번 통화에서 성훈은 신소재를 언급했었다.
‘이 현장 어딘가에 그걸 적용할 거라는 건데? 어디냐? 그게?’
곁눈질로 살핀 형제들은 말없이 화면에 몰입하는 중이었다.
투덜거리면서도 군말 없이 회장의 호출에 응한 형제들.
‘아버지가 두려워서?’
이미 경영권 승계는 마무리된 거나 마찬가지.
회장도 이제 계열사의 경영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의중을 내비쳤고.
‘지금 아버지가 계신다고 해도 큰 도움은 줄 수 없다는 거지.’
그렇다면 존장에 대한 예우?
얼토당토않은 소리!
자신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회사의 미래를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
그게 설령 아버지라 할지라도, 같은 편이 아니면 이빨을 세워야 했다.
투쟁 없이 지킬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런 형제들이 군소리 없이 따른다는 건, 여기에 돈 냄새가 난다는 거지.’
사장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저렇게 무난하게 콘크리트의 누적으로 이뤄지는 공사에서 신소재를 사용한다고? 왜?’
물론 공기를 좀 단축할 수 있고, 자재를 좀 더 절약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 반드시 필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사장의 이런 생각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왜냐고?’
KT 팀이 인정을 받는 것 중의 하나는 공사 기간이 어느 건설사보다 빠르다는 거지.
공사를 급하게 해서?
인부들 손이 번개처럼 빨라서?
‘흐흐. 그건 모르는 사람들의 편견이지. 결과적으로 그리 보이는 것뿐.’
KT 팀의 현장에서 작업자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꼼꼼하지. 미련할 정도로.’
대신 한 번 손댄 곳은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진정한 KT 팀의 힘은 숙련공의 손에서 비롯되는 꼼꼼함이었다.
두 번 작업하는 일이 없으니, 이는 당연히 공기의 단축이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미 공기 단축에서는 건드릴 게 없다고. 저 팀은.’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아는 성훈이 공기 단축을 위해서 신소재를 요청한다고?
그걸 사용해서 얻는 이익이 단지 며칠의 단축이라면?
그걸 위해서 거래를 청할 녀석이 아니다.
‘거래란 등가의 가치를 교환하는 행위지.’
신소재를 제공하는 측이 얻는 이득은 명확하다.
자사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공사의 효율을 올렸다고 하면, 납품만으로도 충분한 홍보가 된다.
그게 이슈가 되는 건물이라면 그 광고효과는?
그 건축물에 사용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은 그 존재를 알게 되며, 품질의 검증은 이미 끝난 것이나 진배없으니까.
하지만?
‘녀석이 얻는 것이 뭐지?’
그가 아는 성훈은 일방적으로 요구하지도 않지만, 반대로 거저 주는 놈은 더더욱 아니었다.
거래가 뭔지 아는 녀석!
성훈의 목적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브리핑 안에 있을 터였다.
카메라의 공중 선회가 반쯤 진행되고 있었다.
‘흠. 그나저나 너무 무난한데…….’
독특하고 멋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디자인은 디자인일 뿐이다.
일시적으로 사장들의 시선을 휘어잡는 것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이게 끝이라면 협상은 실패다.
‘좀 더 특별한 게 필요해.’
그들이 흥미가 동할 만한 그 무언가!
아까 만났을 때도 확인했지만, 결코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흠이라도 잡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일 터.
‘어울리는 준비를 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사장들의 투덜거림이 쏙 들어갈 정도의 준비.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미동도 없이 스크린에 집중하는 회장의 옆모습이 보였다.
‘무난하다 라……. 내가 잘못 판단한 걸 수도.’
그럼 다른 사장들의 반응은 어떨까?
중공업 사장도 자신과 같은 예감이 들었던 걸까?
건설사장과 눈을 맞춘 그는, 미적지근한 표정에 떠오른 씁쓰름한 미소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있었다.
‘되겠어? 이 정도로?’
건설사장은 순간 당황했지만, 태연함을 가장하며 눈썹을 으쓱했다.
‘설마요? 더 있을 겁니다. 형님. 좀 더 지켜보시죠?’
머쓱한 웃음을 지어주고는, 다시 스크린으로 눈을 돌리는 사장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게 끝이어서는 안 돼.’
그나마 호의적인 형이 저런 반응이라면, 다른 형제들의 반응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어느새 한 바퀴를 돌아, 사이트 전체를 조망하던 카메라가 서서히 느려지고 있었다.
‘벌써 엔딩인가?’
긴장이 풀린 듯, 곳곳에서 아쉬움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갈증이 나는 듯, 회장은 음료수 쪽으로 손을 더듬거렸다.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이다.
건설 사장이 재빨리 회장의 손에 잔을 건넸다.
‘첫 방문이라 기대가 크셨을 텐데…….’
눈만 어지럽힌 것 같아 죄송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아버지, 저…….”
회장이 귀찮은 듯 대꾸했다.
“와?”
한참 재밌게 영화 보는데 왜 훼방 놓느냐는 투!
“이제 끝났…….”
회장이 코웃음 쳤다.
“이기 끝이라꼬? 택도 아인 소리하고 앉았네.”
“하지만…….”
“니는 대학꺼정 나온 놈이! 영화 끝나믄 화면 컴컴해지는 것도 모리나?”
회장의 입버릇이었다.
‘대학꺼정 나온 놈이.’
허나 꼭 끝을 봐야 끝인 줄 아는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사장이 무안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허허. 참 아부지도…… 대학 나온 거랑 그게…….”
하지만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회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스크린으로 삿대질했다.
“저 보래이! 저 보라카이!”
영문 모를 그의 행동에 사장도 서둘러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