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73화
건축가란? (01)
선우의 간단한 인사가 끝났다.
거만하지 않으면서도, 꼭 필요한 정보 그리고 자신들이 이 프로젝트에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지를 말하며 인사를 마무리했다.
“깔끔하네요. 형.”
선우가 위트 있게 인사를 마치자, 성훈이 단상으로 나가며 말했다.
선우가 머쓱하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말발만 늘었지. 누구 덕에 팔자에도 없는 CEO 노릇을 하느라 말이지.”
“수고하셨어요.”
성훈을 지나쳐 들어가며 선우가 중얼거렸다.
“난 분명히 얘기 안 했다. 앞으로도 안 할 거고.”
“네. 그거면 돼요.”
그의 말에 선우가 넌지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네가 우리 회사 사장이니 하는 얘기가 나와도 내 책임이 아니라는 말이야.”
선우는 단호하게 책임 소재의 경계를 그었다.
성훈이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정희는 내가 입단속할 테니까, 형은 일이나 신경 써 주세요.”
‘흐흐흐. 정희 말하는 거 아닌데.’
의미심장한 미소에 성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더 하실 말이라도 있어요, 형?”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남은 이야기는 브리핑 끝나고 하자고요. 시간은 많으니까요.”
“응. 그래. 이따 보자.”
선우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여기까지가 딱 좋아. 자칫 하다가는 톰과 제리의 입까지 막아버릴 수도 있으니까.’
저 둘이 말 많은 떠버리임에는 분명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녀석들은 날 그저 월급 주는 고용주로밖에 생각 안 한다고.’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그만인 평등한 관계.
‘하지만 성훈이는 다르거든. 성훈이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을걸. 저 녀석들은.’
자리에 앉으며 좌우의 톰과 제리에게 말했다.
“열심히 하자고. 이 친구들아.”
선우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성훈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건성건성 답했다.
“걱정 마십셔. 보스. 우리가 언제 실망시킨 적 있습니까?”
“그러게요.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네.”
둘의 심드렁한 대응에 기가 찬 선우가 말했다.
“이거 봐.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 이따가 말씀하세요. 지금 빅 보스께서 시작하시잖아요.”
“그래요. 보스. 그리고 톰. 네 목소리가 더 커. 플리즈, 셧업!”
성훈이 스크린을 몇 번 체크하고는, 마이크를 뽑아 들었다.
“방금 김선우 CEO께서 말한 것처럼, ‘KT 홈 시스템’은 우리 설계 전반에 걸친 네트워크를 계획할 겁니다. 설계의 최종 단계까지 무리가 없도록 관련 종목들을 서로 협조 바랍니다.”
그리고 스크린의 스위치를 켰다.
“자! 이제 잡담들은 그만하고, 스크린을 주목해 주십시오.”
***
<쿠웨이트 : 건설적 미래>라는 주제를 가진 공모전 브리핑이 끝났다.
청중을 보며 성훈이 말했다.
“다소 광범위한 주제를 가졌습니다만…….”
보람이 내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음. 팀장, 제가 들은 게 맞는다면 제가 익히 알고 있던 공모전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보통 공모전 하면, 정해진 주제가 있죠. 예를 들면 도시계획 공모전이라고 하면, 도시를 녹화할 것인지, 아니면 무역에 적합한 도시를 만들 것인지!”
보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포항 제철이 공모전의 주체라면 그들은 철을 주제로 내놓겠죠.”
공모전에는 상금, 혹은 그 결과에 따른 보상이 따르기 마련이며, 투자가 있는 만큼 주최 측의 관심사는 주제에 함축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당연히 주최 측이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면, 과녁도 명확해지는 법이고.’
“그런데 이번 공모전에는 그게 잘 안 보인다는 말씀이신 거죠?”
“네. 그렇습니다.”
그의 명확한 지적에 작은 한숨이 나왔다.
‘이것도 나름 압둘이 많이 고민한 거라고.’
***
“압둘. 원하는 게 뭔가요?”
공모전 서류를 검토하자마자 압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의도를 명확히 알고 싶었기에 대화는 직설적일 수밖에 없었다.
내 물음에 압둘은 잠시 말을 얼버무렸다.
-성훈. 그게 말일세…….
“‘건설적 미래’라는 말만으로는 당신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렵다고요.”
-그럴 걸세.
“우리 사이에 이런 거로 밀당할 필요가 있겠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대놓고 말하세요.”
잠깐의 침묵 후 압둘이 말했다.
-자네는 쿠웨이트 하면 뭐가 떠오르나?
“석유? 그리고 사막? 일단 그 정도네요.”
-그래. 금방 연상되는 이미지는 그 두 개지. 사실 그게 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그렇지 않나? 풀도 자라기 힘든 사막에서 석유라도 없었다면, 쿠웨이트라는 나라가 과연 지금처럼 존재할 수 있었을까?
‘여전히 우리는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겠죠.’라는 말을 성훈은 속으로 삼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압둘, 당신이 늘 말하는 것처럼 석유는 아랍 민족의 축복이죠.”
-흐흐흐. 그렇지. 석유로 인해 산유국이 되었고, 다른 나라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있지.
“네.”
-하지만 성훈. 오늘의 축복이 반드시 내일도 축복이라고는 말할 수 있을까?
‘훗. 누구는 그것도 없어서 맨땅에 삽질하고 있구만.’
속으로야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압둘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나로 하여금 입을 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나라를 짊어진 그 고민의 깊이를 어찌 범인이 예상할 수 있겠는가?
-언젠가 부왕께서 내게 물으셨다네. ‘내가 과연 알라를 뵈올 때, 그분께 당당할 수 있겠냐?’고 말일세.
‘사후에 또 다른 삶을 산다는 걸 믿는 왕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겠지.’
완벽히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지만, 성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쇠약해지셨지.
“네. 연세가 있으시니까요.”
-그리고 내게 숙제를 주셨지. ‘언젠가는 알라께서 뿌리신 축복의 열매가 마르는 날이 올 게다. 남은 시간이 마냥 많다고 할 수는 없지. 그때를 대비해 압둘, 너는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느냐?’고 물으시더군.
“...”
-내 개인이 아닌, 왕으로서의 준비를 물으신 거로 생각한다네. 그리고 그건 내가 항상 고민하던 문제이기도 하지.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건 당신이 풀어야 할 숙제고.’
“원유로 번 자금을 재투자하겠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대신들과 논의를 해봤다네. 별별 이야기들이 다 나오더군. 금융, 미래 기술, 생명공학…….
압둘의 한숨이 한층 더 깊어졌다.
-휴. 그야말로 물정을 모르는 소리가 아닌가?
그의 푸념에 성훈이 맞장구쳤다.
“그렇게 들리네요.”
‘금융이야 돈 놓고 돈 먹기고!’
미래 기술, 생명공학?
그거야말로 뜬구름 잡는 소리나 진배없었다.
-지금 그런 원천기술을 누가 내놓겠나? 돈으로 팔라고 한들, 그들이 팔겠나?
“그건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죠.”
선진국들이 수십 년간 큰 성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한 분야일 터!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간과 인재가 아닐까?
그건 돈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니까?
-그렇지. 그걸 누가 돈 몇 푼에 팔겠어?
압둘의 한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생산의 문외한, 그들처럼 소비에만 익숙한 사람들이 생각해낼 레벨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국의 원유도 자신들의 기술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 퍼내고 있는 상황에야,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르는 건, 건설밖에 없다네. 그걸 한국에서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하던가?
“가장 익숙한 분야니까요.”
-또한, 확실하게 이 땅에 남는 거지. 집이 어디로 도망가지는 않지 않나? 허허허.
“그래서 건설로 재투자하겠다는 거네요.”
-그렇지.
“그러려면 적어도 발주처에서…….”
성훈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압둘이 선수를 쳤다.
-자네가 주제를 정하면 안 되겠나?
“네?”
순간적으로 성훈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봐요. 왕세자 양반!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니잖아!’
고개를 갸웃하며 머리를 굴려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뭐지?’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성훈을 달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설은 자네가 더 전문가잖아? 안 그래? 성훈? 요즘 KT 팀의 약진이 장난이 아니더군.
‘그거랑 주제랑 뭔 상관?’
압둘의 속내를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뭔가 장난을 치려는 것 같은데?’
“그럼 내가 주제를 정해서 하면, 그대로 받아주겠다는 말씀이세요?”
성훈의 말에 압둘이 혀를 찼다.
–쯧.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그럼 다른 건축가들은 들러리게?
“그럼 다른 건축가들에게도 똑같이 말할 건가요?”
응당 다른 건축가들도 의도를 물어오겠지.
‘바보가 아닌 이상, 과녁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덤비지는 않을 거라고.’
나처럼 압둘에게 다이렉트로 통화를 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건설부 대신에게는 이미 언질 줘놨네.
“한두 푼 들어가는 사업도 아니고, 그런데 이런 걸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정한다고요?”
-돈이라면야, 얼마든지…….
손해 보지 않기로 이름난 압둘이 이렇게까지 돈을 뿌릴 각오를 할 때는 그 나름의 고민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 양반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터져 나왔다.
“이건 거저먹겠다는 심보잖아요! 손도 안 대고 머리도 안 쓰고.”
말 그대로 돈만 내겠다는 심보.
“이건 장사꾼에게 어울리는 일이지, 왕에게 어울리는 처사는 아니잖아요.”
압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훈. 말하기 부끄럽지만 말일세.
“네. 말씀하세요!”
-인재가 없어.
“네? 널리고 널린 게 대신들인데, 그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돈을 쓰는 데는 다들 한 재간하는데……. 돈으로 뭔가를 만드는 데는 영…….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압둘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실망 가득한 얼굴로 말이다.
얼마나 자신들의 수하들이 실망스러웠으면 이렇게 말할까?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니 말을 아낄 뿐.
‘이런 반응이면 더 캐낼 것도 없겠네. 압둘도 머리가 아프겠군.’
빠릿빠릿하게 말귀를 알아듣는 손발이 없으면 머리만 빠개지는 법이다.
‘그래도 하나는 건져 가야지.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성훈도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래도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호텔이라든지, 아파트 단지라든지, 산업단지라든지. 원하는 용도가.”
이만한 규모, 설계비만 일억 달러가 넘는 건축물을 기획하는데, 주먹구구식으로 할 리가 없잖아!
-그야…….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 생각이 바뀐 듯 말을 이었다.
–아니! 그냥 없다고 생각하게. 자네가 그릴 수 있는 최고의 쿠웨이트를 그려줘.
“그게 무슨…….”
어이없어하는 성훈에게 압둘이 말을 이었다.
-뭐가 되었든, 우리 대신들보다는 더 나은 결론을 내릴 테니까.
“제가 알아서 주제를 정하라? 그겁니까?”
-그렇지.
네 마음대로 해라!
이게 말은 듣기 좋지만, 이것보다 어려운 게 어디 있던가?
뭘 만들어 오든, 결정권은 압둘에게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헛웃음을 토하며 성훈이 말했다.
“압둘.”
-응?
“배운 게 도둑질이라 하셨지만, 이건 완전 날강도 수준인데요?”
-미안허이. 어쩌겠나? 정 안되면 강도질이라도 해야지. 나라가 망할 게 뻔히 보이는데…….
“아주 불성실한 교수 같은데요?”
-뭐가?
“과제 내기 귀찮으니까, ‘네가 알아서 주제 정하고 답을 가져와!’라고 하는 그런 선생이요.”
머쓱해 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큼. 말이 그렇게 되나?
“그리고 채점 기준은 당신 마음이죠.”
-그야…….
“속내를 말하지 않으니, 기준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고 말이죠.”
-그래도 참가한 건축가 중에서는 성훈, 자네가 가장 유리할 거로 생각하는데? 자네만큼 날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일세.
“유리하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는 건 아니죠.”
내가 상대해야 할 건축가들의 면모를 봐서는 더더욱 그렇다.
닳고 닳은 건축가들이 아니던가?
‘클라이언트를 구워삶는 데는 다들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어쩌면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나오지 않는다면, 그 금액 때문이겠지.’
덤으로 명성까지 생각한다면, 쉽사리 포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연히 나도 포기할 수 없지.’
그러나 상황이 바뀌면 조건도 변하는 법.
압둘에게 물었다.
“예상 총면적 50만㎡, 공사비는 15억 달러로 잡으셨더라고요?”
-큼. 그랬지.
“그러면 설계비는 대략 1억5천으로 잡았겠네요.”
-그렇지. 10% 내외로 계산하지.
“흠. 그렇단 말이죠?”
‘무슨 말을 하려나?’ 하면서 그는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