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71화
인원 보강(05)
-교수님. 성훈입니다.
“아이고. 내 애제자 성훈이 아닌가? 나한테 전화할 정도면 이제 좀 한가한가 보네?”
-훗. 말도 마세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교수님은 잘 지내셨어요?
한 교수의 농담을 수화기 너머에서는 앓는 소리로 응수했다.
민수를 통해 성훈의 행보를 실시간으로 보고받는 한 교수였으니, 그의 상황을 어찌 모르랴?
“네 덕분에 나도 몸이 모자랄 지경이다.”
성훈이 바쁠수록 KT 팀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고, 학교와 한 교수도 덩달아 바빠졌다.
또한, 그만큼 학교의 위상과 그의 어깨도 올라갔으니까.
권력이나 연줄은 부질없이 생각하는 그였지만, 제자 칭찬을 싫어하는 스승이 어디 있으랴?
오히려 제자의 행보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끔, 한 교수 또한 죽을 힘을 다해야 했다.
수화기 너머로 능글맞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흐흐흐. 힘드시면 다른 교수님께 넘기셔도…….
성훈이 넉살을 떨었지만, 그는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바쁘다 한들, 이런 신바람이 나는 일을 놓칠 수 있겠는가?
되려 앓는 소리를 하며 말했다.
“그 생각이야 하루에 백번도 더하지. 그런데 말이다. 다른 교수들 명줄 짧아질까 봐 그렇게는 못 하겠더라. 녀석아.”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 말 없는 민수가 하루걸러 한 번씩 자신에게 전화해서 푸념했을까?
며칠 전 민수의 하소연을 떠올리며,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웬일이냐?”
용건이야 이미 알고 있는 것!
달란다고 째깍째깍 줘서야, 체면이 서겠는가?
연인 사이엔 밀당이, 거래관계엔 흥정이 있는 법.
‘그동안 학교 일을 맡아 달라고 하면서, 한 번도 프로젝트에 끼워주지 않았으렷다! 녀석!’
이번에는 기필코 자신도 참여할 요량이었다.
그냥 끼워달라고 하면, 콧방귀도 안 뀔 녀석이니, 이렇게라도 흥정을 해볼 참이었다.
‘치졸해 보여도 어쩔 수 없지!’
그동안 후방 지원만 몇 년이었던가?
뇌가 돌덩이처럼 굳어가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설계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부탁하는 자는 저자세일 수밖에 없지! 흠.’
그런데 웬걸!
-교수님. 실력 있는 놈들로 골라서 서울로 좀 올려보내 주세요. 쓸데가 있어요.
부탁이라 아니라 요구였다.
맡겨 놓은 것 내놓으라는 그 말투 말이다.
‘상투적 감사로 시작하겠지?’ 하고 기대했던 한 교수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허허. 야! 인석아! 애써 키운 애제자들을 데려가면서, 일언반구 감사도 없이 대뜸 용건만 말하기냐?”
수화기 너머로 뻔뻔스러운 음성이 들렸다.
-웬일이냐? 하면 무엇 때문에 전화했느냐? 즉! 용건을 묻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제 후배도 된다고요.
‘어!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나오면 물 건너가는 건데?’
“그, 그게. 한국 사람의 정이란 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훈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교수님도 좀 올라오셔서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크흠. 그러냐?”
의도치 않게 목적을 달성한 한 교수가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압둘 왕자의 공모전 때문에 그러는 거지?”
-네. 맞습니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으니,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게다가 몸이 두 쪽이라도 바쁘다는 녀석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인선은 지금까지처럼 내게 맡기는 거겠지?”
-음. 네. 특이사항은 없죠? 한석이처럼 농땡이가 올라온다거나 하는 그거요.
저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린 한 교수가 답했다.
“어떻게 알았냐? 일단 한석이…….”
그의 말은 대뜸 잘려 버렸다.
-네? 그 농땡이를요? 여기가 학교인 줄 아세요?
성훈이 생각하는 한석의 이미지가 단적으로 드러났다. 그 말에 한석의 얼굴을 붉히며 발끈했지만 한 교수가 손가락을 입에 대며 막았다.
“아냐. 그 녀석, 학생회장인 데다가…….”
-학생회장이면 정치나 하라고 해요!
수화기를 빼앗으려는 한석을 한 손으로 막으며, 다른 손으론 수화기를 막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네가 말하면 될 일도 안 돼!”
그리고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너 보내지 말라는데?”
한석이 다급하게 입을 뻐끔거렸다.
“제가 가야 이번 졸업 박람회 건을 처리하고 올 것 아닙니까? 님을 봐야 뽕을 따든 말든 하죠!”
한 교수가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커험! 거기다 우리 과 수석이야. 진짜라고.”
-…….
믿을 수 없다는 듯, 수화기 저편에서는 말이 없었다.
“진짜야. 내가 실력도 없는 놈을 데려간다고 하겠냐? 무슨 잔소리를 듣겠다고.”
성훈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눈앞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의 개인적인 목적만큼이나 학과의 미래도 중요했다.
진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믿어 봐라.”
-쩝. 실력이 된다면야. 대신….
“대신?”
-와서 ‘학교 일이 어떻고, 애교심이 어떻고.’ 쓸데없는 소리 하면 다리 몽댕이 분질러버린다고 하세요!
한 교수가 수화기를 막으며 속삭였다.
“한석아. 이렇게 나오는데, 안 가는 게 좋지 않겠냐? 이러다가…….”
한석은 되려 콧김을 내뿜으며 각오를 다졌다.
“킁! 제가 이번에! 선배님께 제 진면목을 보여드리고 오겠습니다. 교수님.”
비장한 표정의 한석에게서 소피아에게로 눈을 돌렸다.
소피아가 작게 속삭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섭섭하긴 하지만, 사정이 이러니까요.”
그녀의 속상함이 씁쓸한 미소로 드러났다.
또한, 둘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대목장과 귄터의 얼굴도 한 교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대목장 어르신과 귄터가 알면 잔소리 좀 듣겠지만, 당사자들이 결정한 일이니 어쩌겠어?’
당장은 연애보다 제 꿈을 이루려는 청춘들의 의지 또한 존중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소피아를 안심시켜줘야겠지? 녀석 성미에 일을 놔두고 연애를 하지는 않았을 테고.’
민수에게서도 여자 얘기는 한마디도 없지 않았던가?
그녀로서는 연모하는 사람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리라.
한 교수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성훈아. 국수는 언제 먹을 수 있는 거냐?”
찻잔을 응시하던 소피아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무슨 결혼 같은 말씀을 하세요? 여자도 없는데.
기대를 벗어나지 않는 대답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한 교수의 입술이 동그랗게 말렸다.
‘소피아. 염려 안 해도 되겠어. 그리고 그 일 끝나면 준비하고 있어.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너 부를 테니까. 그때 콱 도장 찍으라고!’
직설적인 말에 소피아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안심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한석이 슬며시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교수님. 현주 누님은 잘 계시는지 물어봐 주세요.”
다급히 수화기를 막으며 물었다.
“누구? 현주?”
고개를 갸웃하는데, 한석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 있잖아요. 서울에서 박람회 할 때, 한복 입고 무용했던 누나요.”
짧은 기간의 박람회였지만, 한복을 입고, 회장 가운데서 춤을 추던 그녀가 떠올랐다.
“아! 현주? 네가 걔를 어떻게 알아? 휴가 나와서 잠시 본 게 전부일 텐데, 눈썰미가 좋다?”
그의 묘한 시선을 받으며, 한석이 헤벌쭉 웃었다.
“에이. 그 누나 덕분에 무용과 애들이랑 단체 미팅도 했었는데? 아! 교수님은 모르시겠구나?”
가만히 듣던 소피아가 한석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미팅? 무용과랑 미팅을 했다고?”
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현주 누나랑 성훈 선배님이 주선자가 돼서 여러 번 했었거든.”
소피아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한석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제대하고 나서 연락을 하려니까, 전화번호가 바뀌었는지 안 되더라고. 선배님하고는 연락하고 지낼걸? 그 누나가 선배님 되게 좋아했었거든.”
추억을 떠올리며, 환한 미소를 지은 한석에게 소피가 따지듯 물었다.
“그럼 박람회 때, 처음 본 사이가 아니었던 거네?”
한석이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 교수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쯧쯧. 눈치라고는. 저러니 매번 얻어터지지.’
소피아에게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장담한다만, 그 이후로는 만난 적도 없었을걸?”
소피아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데요?”
물론 한 교수도 그녀가 당시에 성훈 옆에 붙어있다시피 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오래된 관계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뒤로 무슨 접촉이 있었으랴?
“소피아. 생각해 봐. 박람회 끝나고 성훈이가 뭘 했는지 말이야.”
“네? 아!”
잠시 후 소피아가 탄성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박람회 끝나자마자 바로 현재 건설에 입사했고, 곧장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사를 따내서는 일 년이나 외국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 뒤로는 계속 외국에 있었죠.”
그녀의 말에 한 교수가 눈썹을 으쓱했다.
“거봐. 접점이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이라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며, 한 교수가 말을 이었다.
“내 장담하는데, 녀석은 현주 기억도 못 할 거다. 이 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
그리고는 찡그린 소피아에게 물었다.
“진짜인지 확인해 볼까?”
수화기의 손을 떼고 두루뭉술 휘돌려 물었다.
“걔 이름이 뭐더라? 그 박람회에서 한국 무용하던 애.”
답은 금세 나왔다.
–아! 현주요?
대번 답하는 성훈의 말에 뜨끔했지만, 소피아의 눈을 피하며 되물었다.
“아! 그 친구 이름이 현주였었나? 하, 하여간 보통 아니게 예쁘던데, 걔랑은 요즘도 연락하냐?”
성훈이 그의 답답한 마음을 알 리가 있나?
심드렁한 답이 들려왔다.
–흠. 연락은 종종 오는데, 한국에 있어야 말이죠.
소피아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종종? 한국에 있어야? 있으면……?”
소피아가 한 교수와 뺨이 닿을 듯, 수화기 반대편에 바짝 얼굴을 붙였다.
‘이거야 원. 안심시켜 주려다가 되레 벼락 맞는 거 아니야?’
뜨끔해진 한 교수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큼. 어쨌거나 만난 적 없다는 말이지?”
-네.
소피아가 작게 속삭였다.
“앞으로는요?”
머쓱해진 한 교수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어쨌거나 앞으로도 만날 예정은 없다는 거네?”
이 상황을 빨리 종결짓고 싶은 한 교수의 유도 질문이었다.
-흠. 딱히 보고 싶은 건 아닌데, 조만간 한번은 만나야 할 것 같아요.
미간을 좁힌 채, 소피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왜? 현주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걔 아버지가 국세청장이잖아요. 세금 관련 건으로 물어볼 게 있어서요.
소피아가 입술을 깨물며 으르릉거렸다.
“세금이면 세무사나 변호사를 통하면 되는 거지. 왜 국세청장을 만나야 하는 건가요?”
틀린 말은 없었다.
‘이거 원. 방자와 향단이도 아니고.’
당장에라도 수화기를 넘겨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모양새가 어색해질 것이 뻔한 노릇!
그는 체념하며 소피아의 말을 전했다.
“하아. 세금이면 세무사랑 상담하면 되지.”
말을 하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너 혹시 탈세는 아니지? 그건 무서운 죄야. 국민의 정당한 의무를 저버리는 거라고.”
-에이. 제가 무슨 돈이 그렇게 많다고.
너스레를 떠는 성훈을 다그쳤다.
“호텔에서만 한 달에 천만 달러씩 꽂히는 놈이 무슨!”
-세금 내는 것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에요. 계획하는 사업이 있는데, 그게 국정 방향도 그렇고, 시기도 맞아야 되거든요.
“어떤 사업인데.”
-아직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뭐하고요. 하여간 세무사랑 할 얘기는 아니에요.
“흠. 어쨌거나 여자로 생각하는 건 아니로군.”
그의 다그침에 성훈이 투덜거렸다.
-이상하시네. 평소엔 이런 거 전혀 안 물어보시더니.
성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시 옆에 소피 있어요?
“아, 아냐.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지.”
얼버무리는 사이, 소피아는 결심을 굳혔다.
“교수님. 저도 갈래요.”
그녀의 속삭임에 한 교수가 속으로 혀를 찼다.
“성훈아. 소피아가 가도 문제 될 건 없겠지?”
대뜸 답이 들려왔다.
-뭐. 굳이 온다는 데 말릴 것까지 있나요. 경험한다 치고 올려보내세요.
성훈의 말이 이어졌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교수님. 인원 좀 챙겨주시고…. 내일 다시 전화 드릴게요.
“벌써 끊으려고? 많이 바쁜가 보구나.”
-급히 전화해야 할 곳이 있거든요.
“그래. 아, 알았다.”
성훈과의 통화가 끝나고, 한석이 말했다.
“교수님. 이건 분명히 현주 누나랑 통화하려는 거라고요. 생각난 김에 해버리는 거죠.”
“에이. 그럴 리가 있나?”
“확실하다니까요. 선배님이 뜸 들이는 것 보셨어요. 생각나면 한방에 해치우지.”
조잘대는 한석의 입을 막으며 한 교수가 말했다.
“일 때문에 만나는 거랜다. 알지? 어떤 녀석인지?”
소피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었다.
“그렇겠죠. 저도 그렇게 믿어요.”
문이 닫히고, 한석이 물었다.
“선배님은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고, 국세청장을 만난다는 겁니까?”
“글쎄다. 올라가 보면 알겠지.”
“칫. 그래 봤자 건축가가 집짓기지. 별 거 있겠습니까?”
그러다 생각난 듯, 환한 얼굴로 웃었다.
“참! 교수님...”
능글맞은 웃음에 한 교수가 대꾸했다.
“왜?”
“장 지지셔야겠슴다.”
절로 한 교수의 손이 올라갔다.
“아이고 머리야!”
***
성훈이 시계를 힐끗 보며 폴더를 열었다.
“이제 시스템 팀만 부르면 퍼즐이 맞춰지는 건가?”
싱긋 웃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묵혀놨던 칼을 빼드는 느낌이네.”
두세 번의 연결음 끝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유창한 영어가 들려왔다.
–‘KT 홈 시스템’ 기획부 이정희입니다.
“정희냐? 오랜만이네?”
-오라방! 이게 얼마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