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65화
왕의 거처(09)
‘무슨 혼이 나더라도…….’
혼자 각오를 다지는데, 누가 손을 덥석 잡았다.
“뭐 하고 있어요? 몇 번을 불렀는데.”
성훈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번쩍 들었다.
“네? 어쩐 일로 부르셨는지.”
성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긴 뭐예요? 예약 용지 가져오라고 불렀죠. 저 인간들 마음 변하기 전에 싸인 받아야죠. 갖고 있죠?”
“네? 아! 벌써 결정인 난 모양이군요. 여기.”
서류를 내미는 손을 뻔히 보고는 성훈이 말했다.
“나더러 이것만 들고 가라고요? 어떻게 작성하는지도 모르는데? 당신이 설명해야죠. 따라와요! 당장!”
그리고는 팔을 끌며 왕에게 물었다.
“아버지. 내 지배인한테 하실 말씀 있으세요?”
하지만 답을 기다리는 질문은 아니었던 모양인 듯, 여간 급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럼 데려갑니다.”
알리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성훈. 아직 부왕께서…….”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왕은 화내기는커녕,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지배인은 왕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전하. 제가 주제넘은…….”
성훈이 팔을 당기며, 짜증을 냈다.
“아! 뭐 해요! 얼른 오라니까!”
성훈의 성화에 왕이 재차 손을 내저었다.
“얼른 가 보게. 녀석이 더 짜증나기 전에…….”
“감사합니다. 전하. 다녀오겠습니다.”
몸을 곧추세우고 성훈의 뒤를 급하게 따랐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왕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성훈이 녀석이 저 연극을 한 게, 저 지배인 때문이라 이거지?”
“네. 부왕.”
“후훗! 녀석은 또 한 명의 든든한 우군을 만든 건가? 녀석을 변호하기 위해서라면, 내게도 직언을 할 수 있는.”
대신들 대부분이 지배인의 설명을 들었고, 자리에서 예약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정무차관님! 지금 시험 치십니까? 왜 옆의 분들 걸 보세요? 소신껏 작성하시라고요!”
대신들을 닦달하는 성훈에게 지배인이 공손히 물었다.
“저……. 국왕 전하께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왜요?”
“국왕 전하께 말씀드려야 할 것이…….”
뚱한 표정으로 성훈이 물었다.
“뭔데요? 급한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만, 전하께서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진지한 그의 표정을 보며, 성훈이 투덜거렸다.
“그럼 얼른 갔다 와요. 바쁘니까.”
그의 안색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쓸데없이 귀찮게 하시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그, 그럴 리가요.”
당황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성훈이 입을 툭 내밀며 손을 휘휘 저었다.
“왜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그래?”
그리고는 대신들을 향해 소리쳤다.
“기간이 30일 넘거나, 중복하지 않는다는 조항에도 사인하시고요. 그거 빠트리시면 무효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뒤돌아 걸음을 옮기는데, 성훈의 잔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거기 다 쓰신 분은 앞으로 넘기시고! 그리고 맨 앞에 있으신 분이 정리해서 이리 가져 오세요! 잘못 작성하셔서, 예약에서 밀린 거에 대해서는 호텔에 항의할 수 없습니다. 아시죠?”
***
왕 앞에 선 지배인이 사죄했다.
“전하. 죄송하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지만 왕은 화내지 않았다.
“괜찮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감사합니다. 전하. 앞으로는…….”
더 깊이 고개를 숙이는 그를 아크람이 말렸다.
“괜찮네. 전하께서는 화나신 게 아니니 말일세.”
“흥. 내 앞에서 성훈 녀석을 편든 게 어찌 화날 일이 아닌가?”
“그런 분께서 얼굴에 그리 웃음을 띠고 계시옵니까?”
“허허허. 그나저나 누가 저 녀석의 뒤를 닦을지 몰라도 꽤나 고생하겠구만.”
아크람이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잘 헤쳐 나가지 않습니까?”
“쯧쯧. 좀 더 천천히 생각했더라면, 저리 급하게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 아닌가? 수천의 직원을 거느린 사장이라는 녀석이 저리 경박해서야.”
염려의 말에 저도 모르게 아미르가 눈가를 꿈틀했다.
왕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또 무슨 바른말을 하려고?”
“송구하오나, 저는 그리 생각지 않습니다. 상황이 다급하여 저리 신속하게 진행하시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생각은 지극히 깊은 분입니다.”
왕이 실눈을 뜨며 물었다.
“지배인 이름이 무엇인고?”
“아미르라 하옵니다.”
“그래. 아미르. 그리 생각하는 연유가 있는가?”
“이 일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제 고집으로 시작된 일입니다.”
“그게 무슨 고집이냐? 자네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던데 말이야.”
아미르는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요. 원래의 저였다면, 지배인으로서 사장님의 의견을 백분 참고하여, 무난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수단을 취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왜 그리하지 않았지?”
“제 신념도 있었지만, 저는 저기 있는 대신들을 설득할 수 없다 생각했었습니다.”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일반적인 반응인 게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요.”
아미르는 힘없이 입꼬리를 내리며 말을 이었다.
“경영의 경험이 없으시니 그런 것이다. 힘으로 누르지 못하게 하면 방법이 없으니, 포기하지 않을까 하여, 그 조건을 내건 것입니다.”
“어떤?”
“왕세자의 배경에 기대지 않는 것 말입니다.”
“하하하. 알리의 지원이 없으면, 녀석이 포기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로구만.”
“네. 바로 그렇습니다.”
성훈의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 떠올랐던지, 왕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주 제대로 길을 막아선 거구만.”
“하지만 사장님은 포기하지 않으셨고, 어쩔 수 없이 끌려오는 내내, 제 의견은 무시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흠. 실망이 컸겠구만.”
“마음이 맞지 않는 주인과 일하는 자가 얼마나 성심을 다하겠습니까? 그러느니 그만두는 게 낫지요.”
지긋이 듣던 왕이 물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인가?”
“아닙니다. 지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장님이 말한 한 마디 한 마디는 빈말이 없었건만, 오히려 제 짧은 생각으로 사장님을 오해하고 있었다 생각하니, 얼굴을 들지 못하겠습니다.”
“무슨 말이었기에? 소상히 말해 보게.”
잠시 생각을 정리한 아미르가 왕에게 고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장님은 처음부터 여러 가지 규칙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사장이니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단 한 가지 규칙만을 말씀하셨고, 제게는 가타부타 다른 말 말고, 그게 맞는지만 답하라 하셨습니다.”
“오호. 녀석이 그랬다고? 그 이유가 무어라 생각하는가?”
아미르가 확고한 눈빛으로 답했다.
“그건 지배인인 제 입장을 배려한 겁니다.”
“그건 왜 그런 거지?”
“중복 금지의 규칙은 누가 말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말한 대로 그런 경우 자체가 드물고, 고객 중 누구도 묻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말하지 않은 것은 제 실책이 될 수 있지요.”
“방금 만든 건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배인은 그 호텔의 얼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도 제게 화살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사장님이 그 화살을 받았지요.”
“훗! 그게 배려라……. 녀석을 너무 좋게만 보는 걸? 녀석은 고작해야 스물 중반이라네.”
왕의 핀잔 섞인 말이었지만, 아미르는 말없이 웃음을 머금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사장님이 처음부터 한 달의 규칙을 만드실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상관이 있나?”
“그런데도, 귀찮음을 감수하며 대신들을 독려하여 그런 규칙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 눈에는 그게 독려로 보이던가? 나는 협박으로 보이던걸? 안 그러냐? 알리?”
“그렇지요. 계획에도 없었던 예약을 들이대면서 대신들을 다급하게 만들고는, 둘 중의 하나를 고르라고 했지요. 칼만 안 들었다뿐이지, 강요한 것이나 진배없지요.”
왕이 맞장구쳤다.
“그렇지. 그건 녀석의 특기이기도 하지.”
아미르가 적극적으로 성훈을 변호하고 나섰다.
“허나 전하! 대신들 누구도 불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중복의 규칙과 한 달의 규칙은 그 의미가 확연히 다릅니다.”
“뭐가 다른가?”
“그게 호텔의 규칙이니 지키라고 우기면, 그건…… 고객의 기분이 상하고 또한, 설명하지 않은 제 체면이 상하게 되니, 일부러 지금 만드신 거라 생각됩니다.”
“자네 체면이 상하지 않도록, 녀석이 배려했다. 그 말인가?”
“네. 저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왕이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시간이 엄청 없었던 것 같은데, 저 녀석이 정말 거기까지 생각을 했을꼬?”
놀리는 말에 아미르가 정색하며 말했다.
“설령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해도, 사장님이 지배인인 제가 얼굴을 붉히는 상황은 절대로 만들지 않았을 거라 확신합니다.”
왕이 손뼉을 짝 쳤다.
“옳거니!”
“그런 연유로 저는…….”
왕이 박장대소했다.
“이 친구가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구먼그래.”
알리가 그 말을 받으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네. 고생길이 훤하게 트였어. 저 녀석이 현장의 건축 기사들을 얼마나 갈구고 다니는지 모르지?”
아미르가 그의 말에 반박했다.
“일이 힘들지언정, 그들에게서 사장님께 불평하는 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사옵니다.”
그래도 알리는 확신하며 말했다.
“흐흐흐. 곧 자네도 우는소리 하게 될 거야. 저 녀석이 사람을 부리는 실력이 보통이 넘거든!”
그리고는 어깨를 토닥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어 붙였다.
“저 녀석이 섭섭하게 하면, 언제든지 나한테 오라고.”
그런 알리를 보며 아미르는 미안한 표정으로 양복 상의로 손을 집어넣었다.
“전하. 죄송합니다.”
“뭐가?”
품에서 꺼낸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예전에 드리고자 했던 사직서이옵니다.”
알리가 찌뿌둥한 눈으로 말했다.
“그걸 왜 지금?”
“이 일에 대한 확신도 없어 흔들리다 보니, 마음을 다잡고자 지니고 다녔던 것이옵니다.”
“알아. 이 일 처음 시작할 때부터 가지고 다녔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 내놓는 이유가 뭔가?”
알리는 정색하며 묻고 있었다.
“그동안 거둬주시고, 예까지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리에게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 대신, 완곡하게 말하고 있었다.
성훈을 선택하겠다고 말이다.
알리는 말없이 사직서에 시선을 주었지만,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이 메인 듯, 헛기침하며 말했다.
“자네의 마음을 붙잡았던 것이니, 자네가 처리하게. 그리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직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네.”
아미르의 자리는 항상 비어 있다는 말이었다.
“전하의 그 배려. 평생 잊지 않고 가슴에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자기 손의 사직서를 찢었다.
쫙! 쫙!
사 등분으로 조각난 종잇조각을 휴지통에 버렸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나?”
“네. 사장님께 죄를 지어 쫓겨나지 않는 이상은…….”
알리가 입맛을 다셨다.
“거기다 뼈를 묻을 생각이로구만.”
“더 모실 수 없게 되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닐세. 송구할 게 뭐 있나? 자네처럼 능력 있는 자가 더 좋은 고용인을 만났으니, 축하해 줘야지.”
아크람도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미르. 진정으로 섬길 주인을 만났구만.”
축하인사에 아미르도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알 리 없는 성훈이 아미르를 부르고 있었다.
“아미르! 볼 일 다 봤으면 얼른 와요!”
이미 나갈 채비를 끝낸 듯,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성훈이 문서를 흔들어 재꼈다.
“이거 얼른 정리해야 하니까, 빨리 오세요. 내일 예약받기 전까지 정리 다 해야 하니까.”
“전하.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용서를…….”
아미르가 다급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서 성훈의 뒤를 쫓았다.
웃음을 머금고 뛰어가는 아미르의 뒤통수를 보며, 왕은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고생길로 들어서는 것도 모르고.”
아크람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리 수하의 마음을 배려해 주는 주인이라면, 가시밭길을 걸어도 즐거울 것 같습니다.”
“훗. 그야 그렇지. 자신을 알아주는데, 무엇이 두렵겠나.”
“그런데 부왕!”
“왜 그러느냐?”
알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미르 말대로, 성훈이 정말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했을까요?”
그를 보며, 피식 웃고는 되물었다.
“질투가 나느냐? 데려오겠다 마음먹은 수하를 빼앗겨서?”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그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냐?”
“대신들을 쥐락펴락하는 것도 그렇고, 수하를 다독여서 제 사람으로 만드는 것 말입니다. 제가 성훈의 입장이었다면, 둘 중 하나만 하라고 해도…….”
“그렇지. 권력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더더욱 불가능했을 것이고…….”
“네! 닳고 닳은 노년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성훈은 고작해야…….”
알리의 말에 왕은 아미르를 닦달하는 성훈을 바라보았다.
20대 중반의 혈기 충천한 나이!
‘저 나이에? 설마! 저런 건 사오십 줄을 먹어도 생각하기 어려운 게 아닌가?’
허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걸 해냈다는 것이다.
계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자연스레 몸에 익은 연륜일 터!
‘제 목적 하나 챙기기도 바쁜 와중에, 수하의 체면까지 생각한다고?’
연륜이 아니라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국왕도 성훈의 재치와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이것에 대해서만큼은 확신할 수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알리에게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 녀석의 타고난 천성인 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