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63화
왕의 거처(07)
“자! 이제 말하거라.”
왕의 허락을 받고 성훈이 돌아보며 말했다.
“리야드 호텔의 오너인 김성훈입니다.”
젊어 보이는 관리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뭔가? 얼른 말해 보게. 다들 바쁘신 분들이니.”
고작 호텔 사장 따위의 말 때문에 나가던 걸음을 멈췄다는 것이 탐탁지 않은 듯 보였다.
훅!
등 뒤에서 누군가의 콧김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대가리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밀어내야 하는 것에 모든 신경이 몰려 있었다.
‘과연 이 중에서 얼마나 설득할 수 있을까?’
삼분의 일 정도만 제대로 설득되어도 성공이었다.
‘그것만 해도 어디야? 그래도 객실 100개는 비게 되는 거잖아!’
주변 상황은 물론, 그 젊은 관리의 말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네놈도 잔챙이구나. 그럼 상대할 필요 없지.’
정작 나이가 많은 대신들은 궁금해도 말을 아끼고 있었다.
그들을 부른 사람이 성훈이 아니라, 왕이었거든.
당연히 성훈이 국왕과 모종의 관계가 있으리라 예측하고 자중하는 모습이었다.
성훈이 말했다.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대부분이 제 호텔에 예약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름이 아니오라, 다른 객실을 소개해 드리려고 한 겁니다.”
“뭐? 다른 객실?”
그는 팍 인상을 구겼다.
“네. 다른 객실을 소개하려는 겁니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삐딱하게 젖혔다.
“설마하니 자네! 나한테, 내가 택한 객실 말고 다른 곳에서 잠을 자라? 뭐 이딴 말을 하려는 건가? 지금!”
그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감히! 호텔 사장 따위가 말이야. 엉?”
‘감히? 새파란 놈이! 한번 참는다.’
밟는 건 다음에 하면 된다.
이 일이 다 끝나고 녀석이 호텔 고객이 아닐 때!
‘그때 가서 사뿐히 지르밟아줄게!’
욱하는 성질이 목구멍을 간질였지만, 꾹 눌러 참았다.
‘지배인만 없었으면, 당장에라도……. 으읔!’
하지만 더 분노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성훈, 네 녀석이 내 덕을 보지 않으려 하는 건 알지만, 이건 아닌 것 같구나.’
별로 유명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양아들이었다.
‘아니 오히려 유명해지지 않기를 원하는 놈이지!’
그렇다고 네놈들에게 무시당할 녀석은 더더욱 아니란 말이다.
아크람이 얼굴이 달아오르는 왕에게 속삭였다.
“전하. 혈압이…….”
“알고 있네!”
국왕이 아크람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걸 보고 참으라는 말인가?”
“전하. 분명 성훈 님께서 나중에…….”
“흥! 그렇다고 이걸 참으라는 말인가?”
분명히 나중에 미주알고주알 잔소리를 해대겠지.
‘그때는 그때고!’
황토방의 효능으로 잠재웠던 혈압이 뒷목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이것들이. 감히 어디서! 나도 아까워서 함부로 하지 않는 녀석에게 저따위 말을.’
성훈을 무시하는 것은 국왕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느껴졌다.
국왕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전하!”
등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크람의 억누른 목소리에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잘못하면 초 치겠는데?’
국왕과의 관계를 대신들이 아는 순간, 지금까지의 계획이 모두 틀어진다고!
미친놈이 아니면, 모두 내 눈치를 보겠지!
성훈이 돌아보며 인상을 팍 썼다.
아크람에게 눈치를 주며, 대신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왜?”
“왜 이리 화를 내시는 겁니까?”
“녀석아! 너는 저런 모욕을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냐?”
“모욕은 무슨 모욕이요. 이 자리는 아버지 아들이 아니라, 호텔 사장으로 왔다고요.”
허나 왕이라고 할 말이 없으랴!
“내 아들이라는 걸 숨겨야 할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
“아 참! 아버지. 관심은 감사합니다만, 때와 장소를 좀 가리세요. 고객과 사장의 대화라니까요.”
“어허!”
왕이 양보하지 않자, 성훈이 답답한 듯 말했다.
“제 호텔에 관련된 일입니다. 얹혀사시는 분은 좀 빠지세요.”
“얹혀살아? 이 내가?”
성훈의 그 말에 왕이 얼빠진 표정으로 아크람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크람은 슬며시 국왕의 눈을 피했다.
여기서 국왕 편을 들어봐야, 오지랖도 넓다고 핀잔을 당할 터였다.
‘어차피 이기지도 못하시면서. 쯧쯧.’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사랑도 지나치면 민폐라고 말이다.
하지만 왕의 입장은 달랐다.
‘얹혀산다니?’
태어나 살면서 이런 대우를 언제 당해 봤으랴?
벙찐 표정으로 말했다.
“이, 이보게. 아크람.”
힐끗 왕과 눈을 마주친 아크람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이 듣기에 성훈 님의 말씀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닌 것 같사옵니다.”
성훈의 호텔 관련된 것도 사실이고…….
이유야 어찌 되었든, 성훈의 호텔에 무상으로 얹혀사는 건 사실이 아니던가?
아크람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속삭였다.
“그러게, 전하. 제가 끼어들지 말자고 하지 않았사옵니까?”
“아크람. 자, 자네마저도…….”
믿었던 그마저도 성훈의 편을 들 줄이야!
황당함에 뒷목을 잡으며 말했다.
“치사하다. 녀석아. 나도 돈…….”
성훈이 단호하게 말허리를 끊으며 말했다.
“됐어요. 부자간에 뭘 돈거래를 해요. 주셔도 안 받아요.”
“허허허!”
아크람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는 왕의 팔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 저희도 저쪽으로 빠져 있으심이 어떠하신지요.”
아크람의 고갯짓에 왕이 고개를 돌리니, 싱글거리며 상황을 관망하는 알리가 보였다.
“에잉! 맘대로 하든지!”
코웃음 치고는 알리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
그걸 본 알리가 물었다.
“저 녀석, 왜 저러는 건가?”
묵묵부답인 지배인에게 재차 물었다.
“이 정도는 얘기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우리 사이에. 뭐 기업 비밀도 아닌 거 같은데. 어떤 식으로 결론 나든지, 결국에는 알게 될 거고!”
잠시 고민하던 지배인이 알리에게 아까 있었던 일을 말했다.
배를 움켜쥐고 박장대소하던 알리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크하하. 그래서 저 녀석이 저러고 있다고? 어쩐지! 박살을 내겠다고 벌써 뒤집었어도 시원찮을 녀석이! 대신들 눈치를 보고 있다니!”
그리고는 지배인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아미르, 자네도 참 대단해! 이런 난제를 내어놓다니 말이야.”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답했다.
“저는 지배인으로 마땅히 할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녀석이 자네 눈치를 저렇게 보는 거였군.”
알리가 곤경에 처한 성훈을 보며, 재미있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큭큭! 그래서! 녀석은 어떤 식으로 저 대신들을 설득할 생각이라고 하던가?”
“거기까지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부왕의 후광을 업으면 안 되니, 자력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말인데? 과연 방법이 있을까?”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환불해 준다고 해도, 그걸 받을 대신들도 아니고 말이야.‘
상황을 주시하던 알리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방법이 안 보이는데. 어떤 식으로 처리할 것 같은가? 자네가 보기에는?”
지배인도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저는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나도 그렇다네! 뭔가 승산이 보였으니 덤볐겠지만, 쉽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지 않나?”
“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만약에 녀석이 대신들을 억지로 설득하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전하.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고지식한 대답을 들은 알리가 실눈을 뜨며 물었다.
“아직도 사직서를 가지고 있나?”
“…….”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 자네 고집도 알아줘야 해. 만약에 녀석이 하는 행동이 마음에 안 들거든, 그거 던져버리고 내 호텔로 오라고. 아까도 말했지만, 난 자네가 꼭 필요해.”
성훈이 처한 난관이 즐거운 듯 보이는 알리였다.
“…….”
“사실 호텔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녀석은 어떻게든 살려낼 놈이니까.”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저기 가서 의자나 두 개 더 가져오게.”
“네? 의자라니요?”
영문을 모르는 지배인이 물었다.
“곧 노인 두 분이 이리 쫓겨 오실 테니 말이야. 부왕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된다면서? 그럼 녀석이 부왕을 저 자리에 둘 리가 없지!”
그 말에 지배인이 웃음을 머금고 걸음을 옮겼다.
***
“전하께서 황토방에 대해서 여쭤 보시는군요. 시간을 끌어 죄송합니다. 바쁘신데.”
“아닙니다. 바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 숙식을 책임지는 사장님께서 훨씬 바쁘시지요.”
성훈의 사과에 답한 사람은 내무대신이었다.
씩씩대는 젊은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쯧쯧. 성급하기는……. 정무차관이나 되는 사람이. 앉게. 자네가 나설 자리가 아닌 것 같으니.”
영문을 모르는 젊은이가 되물었다.
“네? 왜 말입니까?”
“나이가 드니, 느는 건 눈치뿐이더군.”
“하지만 아무리 사장이라도…….”
“쯧쯧. 누가 우리를 불러세웠는지, 그새 잊어버린 게로군.”
“그야 국왕 전하께서…….”
“훗. 잘 알고 있군. 그럼 앉게.”
기세에 눌린 젊은이가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국왕이 호텔 사장을 위해서 퇴청하는 대신들을 도로 불렀다?
그 하나로 내무대신은 눈치를 챘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평범한 호텔 사장 때문에 움직이실 전하가 아니시지!’
내무대신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장님. 말씀하시지요.”
“아! 죄송합니다. 바쁘신 분들을 붙들고.”
성훈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말씀 편하게 해 주십시오.”
내무대신이 눈썹을 으쓱하며 미소 지었다.
“덕분에 지금도 충분히 편합니다.”
‘하! 확실히 늙은 생강이 맵군.’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 별다른 동요는 없었다.
고맙다는 눈인사를 건네며, 성훈이 말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다른 객실이란 기존의 객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번에 새로 개장하는 2차분 객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이번에는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큰 소리로 용건을 정확하게 짚었다.
“아! 그렇습니까?”
“제 호텔에 관심을 보여주신 분들이시니, 2차분에도 관심이 있지 않으실까 해서 모신 겁니다.”
“오! 벌써 2차분을 개장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직 완전히 완성되려면 아직 한 달 정도가 남았습니다만, 빠른 층은 2주 정도면 완성됩니다.”
대신들이 소곤거림이 커졌다.
‘벌써 2차분이 개장한다고? 별 차이가 있을까?’
‘그러게. 난 지금도 충분히 좋은데? 그 객실에만 들어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재미있잖나!’
‘자네도 그렇지? 난 완전히 반했어. 한마디로 뻑 갔다구.’
그의 말에 다른 대신도 호응했다.
‘응. 특히나 대놓고 화려하지 않아서, 그게 마음에 들어.’
지나친 화려함에 눈이 피곤한 그들이었다.
게다가 매일 보는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있나?
하지만 리야드 호텔의 새로운 객실은 무료한 그들의 눈에 낯선 느낌을 제공했다.
‘게다가……. 막말로 하나하나가 새로워.’
하루가 지나면 다른 게 보이고, 또 하루가 지나면 또 어제는 모르고 지나쳤던 것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국정 회의를 하기 전에, 서로가 발견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새로운 즐거움이 아니던가?
새로움과 숨바꼭질을 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 즐거움을 내무대신 또한 느끼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굳이 따로 소개하실 필요까지……. 그때 가서 보면 될 텐데요?”
반응을 살피느라 귀를 쫑긋 세웠던 성훈이 헛기침을 하며 답했다.
“아! 2차분은 지금 여러분이 묵고 계신 객실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리고 설명을 이었다.
“1차분이 한국 전통과 다른 디자인의 퓨전이었다면, 이번 것은 더 한국적인 느낌을 살렸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많이 다르다는 말씀이시군요.”
대신들이 성훈의 입으로 시선을 모았다.
“처음부터 너무 이국적이면 적응이 어려우실 것 같아. 퓨전을 먼저 내놓은 것이지요.”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어?’하며 의문의 눈빛을 보내는 대신들에게 성훈이 말을 이었다.
“보시면 다르다는 걸 금방 아실 겁니다. 하지만 1차분에서 거부감이 없었던 분들은 아마 2차분도 마음에 드실 거라 확신합니다.”
성격 급한 대신이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다른 건가?”
“말로는 설명이 안 되겠지요? 보면서 설명해 드릴까요?”
성훈의 말에 대신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어떻게 말인가? 아직 완성도 안 되었다면서?”
성훈이 왕에게 말했다.
“국왕 전하! 방을 좀 둘러보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국왕의 객실은 1, 2, 3차분의 집대성이었으니까,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씰룩거린 왕이 아크람에게 중얼거렸다.
“흥! 어차피 제놈 거면서. 얹혀사는 나한테 허락을 왜 받아!”
그러면서도 왕은 손을 휘휘 저으며 허락의 뜻을 보였다.
아크람이 빙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뭘 할 건지, 한번 따라가 보시지요. 전하.”
“흥!”
투덜거리면서도 대신들의 꽁지를 따라가며 설명을 듣던 왕이 가만히 물었다.
“저 녀석. 이놈들 쫓아내러 왔다면서?”
지배인은 부끄러움에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알리가 대신 대답했다.
“원래 목적은 그거였답니다.”
“그런데 나가라는 말을 한마디도 안 하는데?”
알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무슨 속셈인지 영…….”
“내가 보기에는 신상품 설명회 같은데?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냐?”
“제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입니다. 부왕.”
거실과 객실의 곳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하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을 것이다.
대신들의 눈과 귀가 성훈의 손가락을 쫓았다.
국왕이 아크람과 눈을 마주치며, 피식 웃었다.
‘남 좋은 일만 시킬 녀석이 절대 아니라고.’
‘그렇지요. 곧 속셈을 드러낼 겁니다.’